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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상품 Sep 20. 2020

글을 쓰는 이유

 저번 주에 독립서점에서 한 책을 샀다.


'당신이 글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여러 독립출판 작가들이, 글을 쓰게 된 이유에 대해서 풀어 쓴 책이다. 책을 사자마자 서점의 한 구석에 앉아 모든 작가의 글을 단숨에 읽어버렸다. 동감이 되어선지, 작가님들의 글이 매력적이어선지, 아이스아메리카노만 마시던 내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셔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에 다 읽었다. 누군가의 글은 감탄을 하며 읽었고 또 누군가의 글은 읽으면서 토를 했을 뻔한 정도로 불편하기도 했다. 왜 이렇게 양극단의 감정이 든걸까. 불편했던 작가분의 글을 다시 곱씹어보니 담백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화려한 글이었으며, 전체적으로 잘 읽히다가 중요 부분에서 강점을 두지 못하고 산발적으로 비유나 산파를 날리는 글이었다. 왠만하면 책을 읽는데 불평을 하지 않는 내가 이 정도로 불쾌감이 드는 이유는 읽을면 읽을수록 내 글의 단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작가님의 글은 내가 평소에 쓰는 것과 퍽 비슷했다. 내가 느끼기엔 나의 그런 이전 글이 만족스럽지 못했었는데, 타인의 글을 통해 이유를 깨닫게 된 것이다. 


 잘 쓰려면 어떻게 써야될까?


 이 질문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들고서부터 시작됐다. 내가 처음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지 나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책을 한 번 출간한 이후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시작했고, 그게 욕심으로 이어졌다. 요즈음의 나는 문장 하나하나에 욕심을 부렸고, 은유, 직유, 활유 등을 남발하는 난잡한 글만 양산하곤 했다. 독서 과정에서 나오는 감탄이란 문장의 외관이 아름다울 때 나오지 않는 것인데, 읽는 이로 하여금 동질의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생각과 표현에서 깨달음을 주어야 잘 쓴 글인데말이다. 


 나를 위해서도, 내 글을 읽게 될 타자를 위해서도 마음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나조차도 쓰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글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가진 마음들을 글이라는 외부 저장소에 기록하는 일,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혼자 감정에 대해 공부했다. 산발적으로 떠오르는 감정은 물론 생각들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날 것의 생각들을 눈 앞에 늘여놓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 끊임없이 얽혀있고 사라지기도 하는 존재라 꽤나 귀찮기도하다. 그래서 공부가 필요했다. 내가 가진 감정과 생각들을 좀 더 단단하게 만들어서 책상 위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잠을 자려고 누웠다가도 떠오른 생각을 글로 남기기 위해 일어났고, 샤워를 하다가도 잊지 않기위해 몇십번 되뇌었다. 그렇게 행동하다보니 다시금 글을 쓰는 머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아직은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이제 읽기는 편해졌지만 여전히 그저 그런 보편적인 글일 뿐이었다. 행동력을 키웠으니 상상력과 창의력을 키울 차례였다. 물론 상상력이나 창의력은 키우고 싶다고 느는 게임 능력치같은 존재가 아니다. 사람들이 흘러가는 결을 볼 줄 알아야하고, 그러려면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1년간의 편입 준비로 머리가 굳어질대로 굳어진 상태였다. 정답을 찾는데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전 서강대 철학과 교수이자 현 건명원의 운영위원인 최진석 교수님의 말대로라면 상상력과 창의력에서는 완전히 벗어난 상태였다. 교수님의 말을 인용하자면 '바람직함', '해야 함', 그리고 '좋음' 등이 선명하고 뚜렷하게 행사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단일한 기준으로 관리되고 통제된다는 뜻이며, 그 사회는 매우 폭력적인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내적 충동, 즉 욕망이 사라지고 창의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으로부터는 멀어진다. 현재의 나는 그런 사회에 꽤나 잠식돼있는 상태기도 했고,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요즘 트렌드에 병들어 있기도 했다. 


그동안 입어온 낡고 단단한 옷을 벗고 나체 상태로 추위를 견딜 줄 알아야했다. '-할 것 같다'라던가 '아무거나'와 같은 자기 욕망에서 벗어난 생각보다 나만의 주체성을 키워야했다. 감정의 바닷가에서 새로 모래성을 쌓고 지킬 줄 알아야 했다. 그래서, 다시, 사람들 앞에 나가서 행복해지고 상처받는 일을 기꺼이 하고자 한다. 사랑도 다시 해보고 싸움도 해보면서.


 살다보면 걱정이나 회한과 같은 분실물들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이 꼭 있다. 그리고 그런 물결이 밀려와야 내가 행복과 사랑과 같은 감정으로 쌓아놓은 모래성이 단단해질 수 있다. 다만 무너지지 않기 위해선 이를 표현하거나 해소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상처를 받고 살겠지만 이를 표현하거나 해소하는 방식은 전부 다르다. 운동이나 친구와의 만남 등은 아마 그동안 정성스레 쌓은 모래성을 지키기 위해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이 되겠다. 그리고 글을 쓰거나 상담을 받는 일 등은 내게 밀려오는 파도 위에 서서 그 파도를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일이 되겠다. 감정을 받아내고 쌓는 일을 하면서 꼭 필요한 작업들이다. 나의 감정을 써내려가되, 너무 날 것이거나 극단의 것들은 정제하는 일. 그리고 그 안에 새로운 표현을 담는 일. 이 모든 과정은 우선 바람이 불어야 가능하다. 내 욕망을 마주하기 위해, 다시금 '나의 글'을 쓰기 위해 밖에 나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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