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내가 갈게, 노르웨이.”
홍콩에서의 직장 생활은 다른 이들이 꿈꾸는 것 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잦은 야근, 2주에 한 번씩은 꼭 있었던 주말 출근. ‘시간도 없는데, 이거라도 해야지’란 생각으로 쇼핑을 해대고, 늦은 퇴근 후에도 꼭 맥주를 마셔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몸이 망가져 일에 지장이 가지 않을까 싶어 매일 아침, 지금은 이름도 희미한, 영양제를 몇 알씩 때려먹었다.
‘이렇게 계속 살 수 있을까?’ 란 물음표가 스멀스멀 뱃속 깊숙이 크기를 키워오고 있을 때쯤이었다.
함께 홍콩에 있던 남자친구는, 아시아의 업무스타일에 진절머리가 났다며, 본인의 고향인 노르웨이로 돌아가겠노라고 선언했다. 뜬금없는 선언이었지만, 쉽게 수긍했다. 남자친구는 내게 같이 가자 했고, 나는 단박에 싫다고 했다. 홍콩에서의 삶도 물음표지만 노르웨이에서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더 큰 물음표였기 때문이다. 일단 장거리 연애로, 각자의 일과 생활의 추이를 지켜보자 약속하고, 남자친구는 노르웨이로 먼저 떠났다.
일상은 반복됐고, 남자친구가 없어도 나는 늘 바빴다.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고 또 맥주를 마시고 또 다시 영양제를 밀어넣고 다시 출근. 이런 나에게 남자친구는 노르웨이에서의 삶이 얼마나 ‘평화롭고, 인간적인가’에 대하여 매일 강조했고, 나는 애써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척 했다.
그러나,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느닷없이 찾아온다.
저녁 늦게 외부 미팅을 마치고 서둘러 걷다가 계단에서 화려하게 굴러버렸다. 대충 파스를 바르고 잠에 들었는데, 다음 날 발목이 퉁퉁 붓고 발을 내딛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통틀어 내 인생 처음으로 병가를 신청했다. 병원에서는 엑스레이도 당장 찍을 수 없고, 진통제로 버텨보라며 진통제를 처방해줬다. 다음 날부터 진통제와 압박붕대로 버텨가며 출근을 했고, 엑스레이 차례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중의원을 전전해 침을 맞아가며 버텼다. 몸은 아프고, 회사 일은 바쁘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든 나날들이었다. (나중에 홍콩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서 병원 진료를 받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때 나는 발목 뼈에 금이 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회사에는 마침 출장자들까지 왔고, 그들 스케줄까지 함께 동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들의 출국 날만 버티고 있었는데, 막판에는 공항 송영까지 요청해오는게 아닌가. 그들에게 애써 웃어보이며 상사에게 물어보겠노라 시간을 벌었다. 상사에게는 ‘공항송영까지 필요하냐’는 뉘앙스로 애써 가고싶지 않다는 마음을 표현했는데, 상사가 단 한 마디로 정리해줬다.
“잘 다녀와, 빠빠이(Bye bye)”
(바이바이도 아니고, 정말 이렇게 들렸다.)
당겨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내내 망설이던 방아쇠가, 이 말 한마디에 그렇게 당겨졌다.
그 날 퇴근길에 나는, 노르웨이의 시차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남자친구에게 울며불며 전화했다.
“야, 내가 갈게. 노르웨이.”
그렇게 나는 어쩌다 노르웨이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