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법적 생각에 중독

by 청블리쌤

설거지를 하다가 사소한 부주의로 아끼는 그릇을 깼다. 순간 후회와 가정법적인 생각이 밀려왔다. 결과를 놓고 보았을 때 직전의 그 행동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물론 결과를 의도한 건 아니었으니 결과만 놓고 멍청한 짓이었다고 자책할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날 밤늦은 시간에 둘째 딸로부터 침울한 전화를 받았다.

알바 마감하다가 매장에 음악을 트는 공기계 폰을 떨어뜨렸다고 했다.

함께 알바를 하는 후배가 퇴근 시간 넘어서까지 함께 있어주다가 사장님께 자기 집에서 공기계를 가져오겠다고 제안했지만, 사장님은 자기 폰으로 그 공기계를 대신하고 새로 폰을 사야겠다고 하셨다고 했다. 오래된 폰이라서 어차피 바꿔도 된다고 위로하시면서.


순간 괜찮다고 말해주기가 망설여졌다. 남에게 피해를 끼친 상황이니 내 입장에서 괜찮다고 할 일은 아니었으니까.

혹 사장님 마음이 바뀌셔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시면 혼자서 해결하려고 힘들어하지 말고 아빠한테 얘기하라고. 다친 데 없고 다른 사람도 괜찮으면 그걸로 된 거라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 좋았겠지만 돈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쉬운 거라고.

더 조심했어야 했던 건 맞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이후 알바에서 더 진심을 다해 열심히 하라고.

그렇게 위로했다.


기아 야구팀 이범호감독은 실책을 하는 선수를 질책하지 않고 기다려준다는 인터뷰를 했다. 문책성 교체는 자신감을 떨어뜨려 플레이를 위축되게 할 수 있다면서.

얼마 전 이미 전설이 된 농구 선수 스테판 커리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농구선수로서는 키가 작아서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그냥 묻혀버릴 뻔했던 그를 전설적인 선수로 만들어 준 것은 대학 농구팀 감독이었다. 신입생으로서 첫 경기에서 너무 부진했을 때 다음 경기부터 벤치에 앉혀도 당연한 상황에서 계속 믿음으로 기다려 주었다. 심지어 팀이 경기에서 지고 있을 때도 감독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웃으면서 선수들이 최고의 플레이를 끌어내도록 해주었다.

코치를 보면서 학습코칭, 생활코칭을 해야 하는 부모와 교사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뭉클해졌다.


실수를 권장할 것은 아니지만 위축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른의 일이다.


단순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여서 철저한 계산을 했어도 좋았을 것인데 딸은 그런 좋은 어른을 만났다. 감사했다.


딸은 사고를 치고 자책하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 자책 중 많은 부분은 가정법적인 사고였을 것이다.


The Night Agent라는 미드에서 작전 수행 중 파트너 요원을 잃은 요원이 자책하는 장면에서 이런 대화가 오간다. (S2, Ep5)

Maybe if I would’ve taken a different route, run faster, I don’t know...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더 빨리 달렸더라면...


Stop. Don’t do this, man. Don’t play the ‘what if’ game, I mean it.

It’s impossible to know the best way forward.

그만해요. 그러지 마요. '만약에' 게임 같은 거 하지 말아요. 진심입니다.

최선의 방법을 미리 아는 것은 불가능 한 거니까.


우리도 자주 하는 게임이다. 그랬으면 어땠을까... 그 결론이 무엇이든 그 고민하는 과정 자체가 고통이다. 물론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적어도 일정 기간 동안에는 애도 기간을 갖듯 그 일을 복기해야 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악령처럼 머물면 안 된다.


학생들에게 가정법을 가르치면서 이런 예문을 소개한 적이 있다.


Don’t stress over what could have been. Chances are if it should have been, it would have been.

될 수도 있었던 것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지 마라. 마땅히 되었어야 하는 일이었으면 그렇게 되었을 거다.

Should have. Would have. Could have. Didn’t.

(마땅히) 했어야 했거나, 의지로 하려 했었거나, (능력이나 상황 상) 할 수 있었거나. (모두 결국) 하지 않은 것이거나 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는 결과까지 알고 말과 행동을 유기적으로 해낼 수 없다. 많은 실패와 시행착오를 통해 실수를 줄이는 방향으로 애쓸뿐이다.


가정법적인 생각에 머물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가정법적인 생각에 머무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며,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은 어른의 역할이다.

그러나 정작 그런 어른이 되려는 나도 그 가정법적 게임에 중독된 듯하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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