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전 고등학교 마지막 해 나는 너무 비장했다.
그래서 종업식이 일찍 끝난 겨울방학에 학생들의 자기주도학습 온라인 지도를 하고 희망자를 받아 온라인 수업도 해주었다. 보수를 받고 하는 건 아니었지만, 고등학교 교사로서 은퇴 무대라고 생각하고 절실하게 진행했던 것 같다.
대구 인사규정 상 고등학교 경력만 23년을 넘은 나는 중학교 갈 것이 200% 확실했고 남은 교직경력을 생각하니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올 방법이 없어 보였다.
비슷한 상황의 많은 선생님들 중에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간 사례가 거의 없어서 억지로 마음을 비워내야 했다.
중학교 8년 이상을 근무해야 일반 내신으로 고등학교 발령 가능성이 생기고, 그마저도 확실치 않기 때문이었다. 4년 만에 돌아갈 방법은 초빙교사밖에 없었다.
감사하게도 초빙교사로 감히 꿈꿀 수 없어서 더 절실했던 고등학교로 돌아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교사였던 시절 나는 고3보다 고1을 늘 선호했다.
고3은 학생들의 간절함에 비해 희망의 크기가 작고, 고1은 반대로 희망은 너무 큰데 간절함의 크기가 너무 작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의 간절함을 키워 희망의 크기를 지켜줄 수 있는 고1 담임이나 학년부장을 원했었다.
이번 초빙 면접에서도 고3 담임이나, 고3 부장의 가능성을 물을 때, 할 수는 있지만 고1 부장을 하면 더 역할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합격 후에도 동일한 말씀을 드렸는데, 학교 상황상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년에 고3학년부장이 계약처럼 예정된 고3 담임이 확정되었다.
크게 기대를 하지도 않았지만 의외로 역할 결정 후에도 실망스럽거나 아쉽지는 않았다.
고등학교로 돌아온 꿈을 이룬 것만으로도 어떤 일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특히 업무부장 아닌 담임이나 학년부장 분야 초빙이어서 최소한 업무 아닌 담임을 계속할 것은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있을 때에도 고3 수능 영어 1등급 프로젝트 수업을 3개 학교에서 진행하면서 현실적 희망의 크기를 이어갈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기도 했다.
딸들의 입시 과정에 멘탈 코칭의 중요성을 실감하기도 해서, 고3 담임이라도 분명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새로 발령 난 학교에 가보니 무엇보다 나의 나이가 정말 너무 많았다.
영어과 교사들 중에서 압도적인 넘버원이었고 다른 부장님들이나 선생님들 중에서도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을 찾기 어려웠다. 비슷하게 적은 정도가 아니라 완전 젊으신 분들이 많았다.
그나마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분들은 학년부장이나 업무부장을 하고 계셨다.
내게는 부장의 역량이 부족하지만, 능력이 아닌 많아진 나이 때문에라도 부장으로 섬겨야 할 이유는 분명히 보였다.
학교에서 부장은 매달 15만 원 수당을 더 받는다는 것 외에 승진 등의 다른 혜택은 없다. 부장은 젊은 선생님들이 소신껏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실 수 있게 도움을 드리고 지지해 주며 섬기는 역할이어야 하지 않을까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다.
물론 내년에 혹 하게 될 학년부장으로서의 부족한 역량은 다른 담임선생님들이 그 이상으로 메꾸실 것이다.
친한 대학 동기는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가는 내게 나의 70%만 쏟으라고 당부했다. 많은 선생님들도 내게 축하의 인사를 전하시면서도 무리하지 말고 건강을 살피라고 덕담을 전하셨다.
나이라는 숫자만으로 부장을 해야 한다는 인식은 나의 한계에 대한 솔직한 인식이기도 할 것이니, 무리함은 나의 선택지가 아닐 것이다.
올해 하게 된 고3 담임으로서도 무리하지 않겠다는 자기 다짐이 먼저였다.
고3 학생들도 오버페이스를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그들과 호흡을 맞추려 한다.
내일 고3 학생들 첫 등교일이며 반 학생들과의 첫 만남이다. 전에는 나의 열정을 갈아 넣어서 마스터플랜을 첫날 제시하도록 준비하고, 고3의 큰 그림을 미리 다 그려주려 했다. 마치 모든 고3 과정에 나의 개입과 도움으로 큰 역사를 이뤄낼 것 같은 희망을 가장한 압박이었을 것이며 오만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MBTI의 파워 J처럼 혼자 무리하지 않으려 한다.
그저 학생들에게 당장 할 수 있는 일과 방향, 그리고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미 부여만 소소하게 전달하며 서두르지 않을 것이고, 그들의 시행착오도 필연적인 과정으로 여기며 기다려 줄 것이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는 곁에 있어주겠다는 확신만 주며 기다릴 것이다.
내일 학생들에게 전할 메시지의 핵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명언이다.
"탁월함은 행동이 아닌 습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