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내 수업을 듣지 않는 정시 파이터 학생과 상담을 했다.
실은 상담 신청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 정도로 절실하다는 것인듯해서 내 귀한 시간을 내주었다.
정시파이터를 향한 윤도영쌤의 명언으로 시작했다.
"수시로 못 가는 대학은 정시로도 못 간다!"
학생도 어느 정도는 인식하고 있을 정시의 높은 문턱도 극도로 현실적인 상황을 추가해서 자세하게 얘기했다.
정시파이터는 두 종류로 나뉜다.
경쟁력 있는 진정한 정시파이터.. 내신이 나쁘지 않은 학생들 중에서도 수능의 경쟁력이 압도적일 때 정시파이터는 숙명이기도 하다.
그리고 불만족한 수시러. 그저 내신 성적이 마음에 들지 않을 뿐 수능의 경쟁력을 갖추지 않은 부류다. 확정된 내신에 비해 아직은 기회와 가능성이 있는 것 같은 느낌으로 정시를 자신만의 기회라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 전부터 치열하게 공부량을 축적하면서 준비해 온 진정한 정시파이터들과 경쟁할 수 있는 현실적인 가능성이 높지 않으나 당장 자신의 내신이 마음에 안 드는 것일 뿐.. 아니면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귀차니즘도 있을 수 있다.
수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수행평가를 포기하면서 정시파이터라고 외치면 선생님도 납득시킬 수 있고 자신의 마음도 편해지기 때문이다.
불만족한 수시러는 그렇게 치열함과 거리가 있는 삶을 살다가 대부분은 3학년 9월 모의고사 성적에서 현실을 확인하고는 수시원서를 쓴다. 차라리 그때그때 최선을 다해서 내신과 생기부를 준비했다면 선택의 폭은 더 넓어졌을 것인데.. 원 없이 정시 파이터로 살아본 것도 아니면서 수시에 대한 낮아진 가능성에 후회만 남기는 경우가 많다.
진정한 정시파이터는 대개 내신을 망쳤다고 갑자기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능 준비를 차곡차곡해 온 경우에 해당된다.
상담 학생의 경우 내신으로 목표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은 없었다. 그렇다고 모의고사 성적이 내신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것도 아니었다. 기본부터 우상향을 이루는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은 N수생이 수능에 유입되면 평소 등급보다 더 추락하는 것이 현실임을 생각할 때 마냥 격려만 해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참고로 작년 9월 모의고사까지 참여하지 않았으나 수능에 유입된 N수생의 숫자는 7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목표 대학과 자신의 성적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두 가지 옵션이 있다. 자신의 성적을 높이거나, 목표 대학을 낮추거나. 내신이 확정되어 갈수록 수능이 다가올수록 그 간격은 어떻게든 좁혀져야 한다. 그 간격을 좁히지 않는 학생들은 수시 6광탈을 맞이한다. 내신성적에 맞춰 대학을 지원했어도 수능최저를 맞출 가능성이 없다면, 그것도 우주상향이다. 확정된 내신에 비해 수능은 아직 확정이 아니라서 많은 수험생들이 수능대박의 꿈을 놓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수능 낙관론은 정시파이터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이 아니다.
이 학생은 목표를 낮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내가 나서서 목표를 끌어내릴 이유도 없었다. 그저 현실만 차분히 얘기해 주었고,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학습방향 등을 얘기해 줄 뿐이었다.
학생 본인도 너무 막연한 낙관주의인가 싶어서, 현실적인 쓴소리를 해줄 분이 필요했다고 나를 지목하듯 말했다.
그러나 무조건 안 될 거라는 비관적인 이야기만 하지는 않았다.
학생의 국어 성적의 가능성이 보였고, 수학에 다소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어도 2학년 때까지는 제법 나왔었다고 했다. 다만 3학년 올라와서 점수가 방황하는 듯했다. 그건 이 학생에게만 특별히 적용되는 현실은 아니었다. 영어는 고3 때부터는 고2 때까지와 확연히 달라진 난이도에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다. 넉넉하게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면 모의고사 난이도에 일희일비하며 공부 시간을 조절하는 경향을 보인다. 오히려 잘 안 나올 때는 위기감으로 더 공부할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수능보다 쉬운 모의고사에서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가 더 위험하다. 자신도 모르게 방심하며 공부를 덜하게 되면서 감을 차츰 잃어가기 때문이다.
학생은 수학 공부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수학이 관건인 건 맞지만, 국어, 영어가 안정이 안 된 상태에서 몰입하는 건 위험하다고 했다. 수능이 전체적으로 긴 시간과 노력의 축적이 필요하지만, 국어, 영어야말로 매번 공부할 때마다 수학처럼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는 유혹과 싸워야 해서 그 축적의 시간과 분량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학생에게 국어, 영어 학습 시간을 물었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수학 및 탐구 공부, 학원 숙제하다가 남는 시간에 국어, 영어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이 맞았다.
물리적인 최소한의 시간도 매일 투자하지 않고 국어, 영어 성적이 오르길 바라며 상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현실을 얘기했다.
보통은 어떻게든 매일 애쓰면서 방향을 잡지 못할 때 나의 처방의 효과가 드러나는데 이 학생은 자신의 의지와 공부의 당위성부터 점검해야 했다.
부디 수준에 맞는 글부터 매일 꾸준히 읽을 것을 권했다. 잘게 쪼개서 수학, 과학 공부하기 전에 루틴처럼 끼워 넣으라는 수업시간에도 강조한 조언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수업을 듣지 않는 이 학생은 그 말을 못 들었거나, 들었더라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개별적으로 그 말을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을 보니...
결국 학생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겠는지 확인을 받고 싶었거나, 불안함 마음에 위로가 필요해서 상담을 신청했을 수도 있었던 것 같다.
정시는 평소에 모의고사가 잘 나와도 늘 불안하다. 수능이 가까워지면 더 불안해진다. 특히 점수가 더 잘 나오는 학생들일수록 지켜야 할 더 큰 부담이 있으니 더 힘들어할 수도 있다.
현실의 높이를 강조하면서도 학생의 노력을 인정해 주었고, 희망과 응원의 마음도 전했다.
이후 다른 학생들과 개별 상담을 계속하면서 많은 학생들이 고3이 되어서도 공부 방법과 방향에 대한 확실한 정립 없이 어설프게 흉내 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현실 인식이 더 커지고 있다.
고3이라고 알아서 하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지 않아야 할 시간적 부담이 있으므로, 의외로 내가 개입해야 할 부분이 많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장 우리 반에서 중간고사 직후 수능필수어휘구 800개로 아침마다 단어 시험을 치기 시작했다. 유쾌한 강제성이 되어주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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