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pearte, 간절함에 대하여

싱어게인2를 보고

by 청블리쌤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미 가수지만 대중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무명가수들의 기회의 무대다. 난 참가자의 모든 음악 장르를 다 좋아하지도 않고, 모든 노래와 심사평을 공들여 다 보지도 않지만 계속 프로그램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은 프로그램에 담긴 서사 때문이다. 어떤 가수든, 상위권으로 올라가거나 탈락하거나 관계없이 그들 모두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뭔가가 있다.

그걸 한 단어로 난 “간절함”이라고 말하고 싶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계속 강조하는 삶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물론 강조한다고 그 간절함이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실체를 알려주고, 지향점을 보여준다면 적어도 아이들이 언젠가 자신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간절함”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거기서 희망의 한 자락을 찾아낼 수 있을 거니까...


desperate

이 단어는 라틴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의미는 “deprived of hope, hopeless”이다. 그러니까 희망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despair라는 단어도 이 라틴어에서 유래하여 영어에 영향을 준 고대 프랑스어를 어원으로 둔다.

두 단어 모두 라틴어 de(without) + sperare(to hope)에서 유래했다.


despair는 희망을 잃은 상태를 명사와 동사로 표현한다. “절망 혹은 절망하다”

desperate는 희망을 잃은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다. 그러니까 in despair, 즉 절망적인 상태를 묘사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desperate는 희망이 없는 객관적인 상태를 시작점으로 각기 다른 반응을 다양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심각하고 많이 안 좋은 상태를 가리키기도 하고, 희망이 없어서 폭력적이 되거나 자포자기하거나 될 대로 되라는 묘사도 가능하다.

그리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절망을 넘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경우 “절실한, 간절히 원하는, 필사적인” 정도의 의미로 해석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절실함”, “간절히 원함”은 희망이 없을 때 더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설프게라도 뭔가를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절실함은 존재할 수 없다. 배가 고파야 음식을 찾는 거다. 배부른 상태에서는 맛있는 음식조차 고문일 수도 있는 거니까.


그래서 난 이런 절실함에 이르는 여러 좌절들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기회를 얻는다. 보통은 절실함이 드러나면 학생들이 먼저 손을 내밀기도 한다. 그 순간이 교사로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가장 큰 교육의 효과가 드러나는 때다.


그래서 혹 간절함을 품고 있으나 아직 인식 못 하고 있는 학생들을 일깨우기 위해 난 “desperate”라는 단어를 학교에서 자주 외친다. 고등학생들은 크고 작은 희망의 결여를 누구나 겪는다. 고3이 되어갈수록 더 그러하다. 고1 학생들은 간절함에 이르기까지 더 먼 길을 걸어야 하는 게 안타까웠는데, 중학교 첫해에 중학생들에게 간절함을 일깨우는 일은 얼마나 불가능한 미션에 가까운 일인지 완전 실감하였다. 그건 더 오래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간절함을 억지로 불어 넣어 후회를 막을 방법은 없다. 약간 늦은 듯한 후회가 간절함의 확실한 동력이 된다.


성경에 탕자 비유가 있다. 영어로는 a prodigal son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초점은 탕자가 아니라 탕자 형이었다. 그 당시 기득권층에게 던지는 메시지였던 거다. 율법을 잘 지키고 남들보다 우월감에 빠져 있는 종교지도자들에게 묻고 있는 거였다. 너희들이 손가락질하는 탕자 같은 부족한 자들이 과연 너희들보다 못한 게 맞는지...


탕자 형은 그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 옆에 있었다. 탕자는 불효자이고 루저이기도 하다. 계산 값으로는 당연히 탕자형이 우위에 있다. 그러나 탕자형에게는 진심도 성장도 없었다. 탕자는 인격도 행실도 바닥을 쳤지만 오히려 그럼으로 기회를 얻었고 온전히 은혜 안에서 용서받고 회복되었다.


탕자 형에게는 영영 기회가 없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집을 떠나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학교에서 만나는 학생 중 탕자 형 유형이 가장 교육하기 어렵다. 교사의 가르침이나 상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분명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고 진심도 진리에서도 거리가 멀어도 스스로 인정하려 들지 않으면 교사인 나도 방법이 없다.


오히려 성적에 관계없이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학생이라면 늘 배우고 성장한다. 꼭 성적이 나빠야 배운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글을 쓰며 자주 소환하는 서울대 의대를 진학한 제자는 이제껏 만난 학생 중에 가장 겸손하게 몰입하며 나의 모든 가르침을 그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꼭 성적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릴 이유는 없다. 매 순간 겸손한 마음이면 된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실패와 좌절을 미리 다 막아줄 필요는 없다. 너무 자주 아이들은 넘어짐을 통해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한다.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어내지 않으면 자기주도학습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싱어게인>은 그런 절실함을 불러내고 시청자들은 그 절실함을 만난다. 물론 각자의 음악 세계를 제작진이 더 좋고 나쁘고를 결정한다는 것 자체가 각기 자신만의 음악을 추구하는 뮤지션들에게는 대중에게 자신을 알릴 기회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지만, 대중적인 인기의 길을 걷지 못했던 대부분의 뮤지션들에게 그 무대는 그저 축제의 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 중 31호 가수 신유미의 인터뷰 내용을 보고 그런 감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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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가수 대신 보컬 트레이너로 지낸 이유? 왜 가수를 하지 않았냐?

A : 결론은 전폭적인 지지를 얻은 적이 없었고, 그런데 생계는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서 사실 시작을 한 거였거든요. (울면서) 제가 항상 보면서 따라 하고 싶었던 분께서(이선희) 이렇게 해주시는 게 저한테 너무나 큰 지지가 되어서 정말 감사합니다.


꿈에 다가가고 있는 느낌이에요그러니까 공연의 기회가 생기는 거잖아요. (Top 10) 갈라쇼라는... 그런 것들이 되게 ‘내일 뭐하지?’를 생각하는 저 같은 뮤지션들에게는 너무 꿈같은 일이죠. 정해진 스케줄이 있다는 게...

인터뷰를 보며 가슴이 먹먹해졌다. 모두가 자신의 노래를 좋아해 주는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나 홀로 가수라는 정체성으로도 버티기 힘들것 같기도 하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그저 자신을 알리려는 목적을 떠나서 그저 주어진 무대에 감사하고 그 무대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순간에도 서로를 향해 눈물을 흘려주기도 하고 함께 기뻐하고 같이 아파하는 모습도 모두 동일한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 같았다.


그들은 기회가 주어짐에 감사하며 그렇게 한순간을 영원처럼 간직한다는 비장함과 절실함으로 무대에 서는 것 같았다.


우리 모두 유한한 시간과 기회를 살고 있다. 자꾸 비교하며 자신의 불행을 키워가기도 하지만 그렇게 우리는 어느 때건 작고 큰 “희망의 결여”의 상태를 경험하게 되지만, 우리의 삶에서 희망만 가득한 순간만을 바랄 수도 없고 그런 삶을 이뤄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 그러다 포기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순간이 닥칠 수도 있지만, 적어도 후회는 남기지 않을 것이다.


오래전 한 여고에서 “간절함”을 외치면서 학생들에게 영어 단어 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영어 단어의 부족함으로 인해 영어실력에 대한 희망의 결여를 인정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려는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내게 오면 청블리 1300개 단어의 첫 장만 주었다. 학습을 충분히 한 후 내게 개별적으로 와서 테스트를 통과하면 그다음 페이지를 출력해 주는 식으로 진행했다.

처음으로 공지사항을 전달하고 수업 마치고 교무실로 가는 길에 참가를 희망하는 학생들이 “간절함! 간절함!”을 주문처럼 외치면서 나를 따라왔다. 그들의 간절함의 유통기한이 얼마가 될지는 그 순간,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나도 함께 그들과 “간절함”을 외치며 감격스러워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그 과정을 통과했던 기억이 난다. 그들은 수준별 영어수업에서 A반이 아니라는 사실만으로도 패배의식으로 좌절했던 아이들이었다.


난 그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외쳤던 것 같다.

절망의 순간이 클수록 이뤄낼 이후의 일들이 더 큰 감격과 은혜로 다가오게 될 것이라고... 탕자형은 느끼지 못하는 감동의 순간일 것이라고...

결국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거라고... 어디까지 가냐가 중요한 것이니..

그 대신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인정해야만 성장의 기회가 주어질 거라고...

탕자가 집 떠나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면 집으로 돌아올 일이 없었을 것이니... 오히려 아픔이 축복이 될 수도 있는 거라고... 그러니 아픈만큼 절망의 상태를 인정하되 포기는 하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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