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말들 – 은유

by 청블리쌤

이전의 책에서도 작가의 깊은 통찰과 섬세한 필력에 감탄했던 기억이 있는데 이번 신작은 그 기억과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이었습니다.


부제인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에 충실하여 다양한 처지의 타인에 대한 몰이해에 대해 말과 글의 힘으로만 공감의 자리로 초대하는 힘을 가진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작가의 모든 생각에 모두 동의하고 뜻을 같이할 수는 없었지만 대부분의 글들에서 직접 체험할 수 없는 많은 삶의 모습들에 대해 적어도 그 입장을 생각할 기회가 되었으며, 비슷한 처지의 글에서는 온 마음을 다한 공감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은 작가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들을 글로 풀어가기도 하였지만 이미 삶이 되어버린 독서를 통해 삶과 관련된 내용을 끌어와서 적절하게 인용하고 재해석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많은 책들을 어떻게 구해서 읽는지 궁금했는데 내용 중에 알고 보니 유명한 작가라서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준다는 대목을 보고 부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니 책 제목은 그렇게 삶과 일체화된 독서를 통해 작가에게 다가오는 말들이라는 의미가 담아낸 것이었습니다.


작가의 주옥같은 많은 내용 중 제게 특히 더 다가오는 말들을 몇 가지 인용하고 정리합니다.



<어정쩡한 게 좋아>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산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 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 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안정을 추구하고 불확실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에 오히려 어정쩡함에서 발전과 성장이 이뤄진다는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삶은 늘 어정쩡할 수밖에 없는데 어느 순간 어정쩡함을 인정하지 않고 안주하는 사람을 꼰대라고 하는 건 아닌지, 나도 꼰대가 되어가는 건 아닌지 돌아보았습니다.

학교에서도 확실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부족함을 인식하는 겸손함과 부족함을 채우려는 계속된 의지만이 실력과 인격의 성장을 가져온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하고 있어 이 내용이 더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의 주체로 살아갈 수 있을까.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 아닌가 하는 물음에 <사랑의 급진성>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위험 제로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성적 욕망으로 팽배한 현대사회지만 아이러니하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며 자기동일성에 안주하는 현대인의 왜소함을 저자는 지적한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위험을 무릅쓰는 것, 이 숙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일상의 좌표가 변경되리라는 점을 알면서도, 오히려 바로 그 이유에서 만남을 갈구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세 가지다. “첫째는 보는 것, 둘째는 듣는 것, 셋째는 연인의 후한 마음"

...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사랑은 없다.” 사랑은 특별한 지식이나 기술이 필요치 않다는 점에서 쉽고,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점에서 어렵다. 그러니 사랑을 얼마나 해보았느냐는 질문은 이렇게 바꿀 수도 있다. 당신은 다른 존재가 되어 보았느냐. 왜 사랑이 필요하다고 묻는다면, 비활성화된 자아의 활성화가 암울한 현실에 숨구멍을 열어주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존재의 등이 켜지는 순간 사랑은 속삭인다. “삶을 붙들고 최선을 다해요.”


일상의 좌표가 변하고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자 과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어렵지만 그래서 사랑을 한다는 지적은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입니다. 이것저것 재보고 계산하고 손익을 따져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볼 각오를 하고도, 위험을 무릅쓰고도 하게 되는 게 사랑인 것이지요.



<읽고 쓰지 않을 권리>

초등학교 6학년 아이에게 독서기록을 억지로라도 시키는 방법을 묻는 엄마에게


내가 아는 배움의 최고 동력은 절실함이고 필수 조건은 덩어리 시간이다. 당장 생존에 필요하지도 않고 (놀) 시간도 없는 아이들에게 글을 쓰라니 얼마나 고역일까. 자투리 시간으로 학습지 하듯 해치우는데 생각이 여물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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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부모나 교사가 시키는 무리한 것들을 ‘싫어도’ 해낸다면 훗날 자기보다 힘이 센 사람이 시키는 별의별 일도 ‘싫은데’ 꾸역꾸역 감당할 여지가 있다. 복종은 습관이다. 성찰 없는 순종이 몸에 배 면 자기의 좋음과 싫음의 감각은 퇴화한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를 지키기 어렵다. 시급한 건 ‘자기 돌봄’이다. 수능 고득점의 초석을 다지는 독서와 논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는 법을 들여다볼 기회와 자기 억압을 털어놓을 계기가 필요하다. 그게 나에게는 책과 글쓰기였는데 내 아이에게는 무엇인지 아직 모르겠다. 한 가지는 알겠다. 해봐서 안다며 책부터 들이밀면 아이가 스스로 가꾸어갈 경험과 사유의 자리가 막힌다는 사실이다. 책 읽고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가 격려 받는 만큼 싫어하는 아이의 권리도 존중받기를. 입막음을 당하는 약자에겐 ‘행동하지 않음’도 행동이다.


누가 뭐래도 바람직한 가치와 활동을 학생들이나 아이들에게 권장하는 것은 어른이 할 일인 것 같지만 강요로서는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없을 거라는 엄마의 입장과 글쓰기를 가르치는 멘토로서의 체험을 통해 작가는 말합니다. 어른들의 타이밍을 강요하면서 아이들의 어설프지만 확실한 자신의 걸음을 막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상처의 수만큼 우리는 돈을 번다>


미국 빈민 여성의 생존기이자 노동 르포르타주인 <핸드 투 마우스>의 저자 린다 티라도는 말한다, “나는 내 상처의 수만큼 돈을 번다.” 베이고 데는 상처만 뜻하는 게 아니다, 짜증, 분노, 무시 같은 것도 독처럼 쌓여서 영혼을 부식시킨다. 그는 병원에 가면 스트레스를 줄이라는 처방이 내려지곤 한다며 말한다. “의사들은 잠을 잘 자고 잘 먹으라고 환자에게 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마치 그게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늘 단순한 상황 판단은 타인의 구체적 처지에 대한 고려 없음에 기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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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생계로 삼는 일을 더 힘겹게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려고 애쓴다.”


마트에 가면 계산대 옆에 직원이 당신이 가족일 수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문구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감정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갑질을 하는 소비자들이 많다는 방증이기도 해서 씁쓸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체험을 소개하며 그 사람 입장이 되어주지 못한 자신을 반성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자신의 입장에서 당연한 이야기를 조언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의도적으로 감정을 다치게 하는 것 이상의 상처를 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책 말고 좋아하는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도 대학생 추천도서에 꼽히는 책이다. 상징과 비유로 된 문학서이자 철학서로 난도가 높다. "니체를 이해하는 사람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이해할 수 있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만으로는 니체를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역자 해설에도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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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게 ‘좋은 책’을 묻는다면 말문이 막히겠지만 ‘좋아하는 책’을 물어오면 기꺼이 말을 나누고 싶다.


권장도서 따라 읽기가 보통의 학교 현장에서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시행착오를 최소화하면서 효율적인 실적을 거두기 위한 관행처럼 되어버린 안타까움입니다. 작가의 마지막 결론이 퍽 마음에 듭니다. ‘좋은 책’은 사람마다 기준과 수준이 다르니 객관화시키기 어려운 용어이니, ‘좋아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말 자체에 각자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까지 담을 수 있겠지요.



<차분히 불행에 몰두하세요>


황현산 선생님은 말했다. “작은 조언도 큰 이론도 자신의 몸으로 영접하지 않은 한 자신의 앎이 되지 않는다.” “내용 없는 희망은 불행을 대신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주 그 불행의 씨앗이 된다”고.


그래서 작가는 때로 고민하는 학인에게 ‘오늘도 행복하세요’말고, ‘차분히 불행에 몰두하세요’라고 말하고 싶다고 합니다.


<내 아이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


아이를 잘 키우기보다 명대로 본성껏 살게 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내는 게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좋은 부모 10계명> 대신 붙여놓고 싶은 문장이 있다. “도덕성, 공감, 윤리, 이런 건 한 번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하는 모든 것에 깃들어있다.” 수 클리볼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저도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 책을 읽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1999년 미국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총격 사건을 벌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의 어머니가 아이와 함께 한 16년의 기록을 출판했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지만, 가해자 아이는 어릴 적부터 그런 범죄를 저지를 징후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은 어떤 기준으로 보면 평범한 아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어머니는 아이에게 설교하지 말고 말을 좀 더 들어줬어야 했다는 후회 등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그런 후회는 어떤 부모도 다 할 수 있는 후회이기 때문에 부모로서의 진정한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하게 하는 책이었습니다.



<자소설 쓰는 어른들>


자기소개서는 과거 경험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기만의 서사를 만드는 뜻깊은 작업이다. 그것이 자소설이 된다는 건, '살아온 나'가 아니라 '평가받는 나'로 자기를 바라본다는 말이다. 강요된 가치로 자기 삶을 평가하고 타인의 시선에 길들여지면 나라는 존재는 늘 부족하고 초라해 보일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스펙을 쌓아도 자존감은 낮은 ‘불안한 어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지금처럼 사회적 위계가 공고한 풍토에선 아이들 자소서에 어른이 나서고 어른들 자소서가 돈벌이가 되는 현실을 막을 수 없을 거다. 시몬느 베이유는 “밭을 가는 농민이 자기가 농민이 된 것은 교사가 될 만한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회 체제는 깊이 병든 것이다”라고 썼다. 먼 꿈같지만, 궁극적으로는 농민도 교사도 정비공도 비슷한 임금을 받고 동등하게 사람 취급받는 사회가 될 때라야 자소설이란 단어가 소멸할 수 있으리라.


작가가 슬픈 현실을 잘 꼬집어주었습니다. 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에게 최대한 사실에 입각하여 자소서를 쓰도록 지도하고 교사의 양심을 걸고 추천서를 써주지만 작가의 말대로 ‘살아온 나’가 아니라 ‘평가받는 나’를 자신을 바라보면 자소설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의대 갈 성적이라도 평소 가고 싶었던 건축학과를 간다거나, 영어영문학과를 갈 성적이라도 프랑스 문학을 너무 사랑하여 불어불문학과에 갈 수 있는 것이 진정 용기 있는 멋진 선택이라고 말을 하면서도 근본적인 사회시스템의 변화 없이 강요할 수어 조신스럽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아예 자신의 뚜렷한 진로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하며 흘러가다가 가장 무난한 길을 선택 당하는지도 모릅니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명령과 복종이 있다>


끼니와 끼니 사이 벚꽃이 난분분한 봄날, 딸은 말한다. "벚꽃 꽃말이 중간고사래." 해마다 벚꽃 시즌이면 다가올 중간고사에 대비해야 하는 중고등학생들 처지를 빗댄 말이다. 꽃을 놓치고 밥을 거르며 자란 아이들 몸에 무엇이 남을까. 패스트푸드에 길들여지는 것은 자발적 자기 착취에 길들여진다는 것이고 명령과 복종의 속도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먹는 인간'으로서 아이가 통제의 맛에 길들여지느니 부모가 초라한 성적표에 길들여지는 게 백번 낫다.


작가가 학원을 다니며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는 아이들, 심지어 벚꽃의 아름다움조차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부모가 초라한 성적표에 길들여지는 게 백번 낫긴 하지만 알고서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아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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