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형철이라는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입니다. 슬픔을 테마로 한 이야기를 중심 테마로 시작해서 소설, 사회, 시, 문화 등의 테두리로 작가의 평론가적인 깊이와 소질을 유감없이 표현하고 발휘한 훌륭한 책입니다.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읽어도 그때마다 느낌이 새로울 것 같은 진한 깊이와 감동이 읽을 때마다 스며나왔습니다.
쉽고 호흡이 짧으며 보다 많은 대중들에게 깊은 생각 없이도 표면적인 의미만으로도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일반적인 책들보다 절제된 말의 간결한 표현과 곰삭은 듯한 함축미 등이 책은 누구라도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전문가만의 영역에서만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높은 벽 같은 것을 보여주는 책이라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물론 작가의 생각이 진실 되게 묻어나는 글들이라서 그의 사상과 사회를 보는 눈, 정치적인 시각 등도 진하게 표현이 되어 있고 모든 부분에서 제가 다 공감한 것은 아니지만 독서는 자신이 받아들이는 범위에서의 해석이니 불만은 없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매우 훌륭한 글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짤막한 산문에 깊은 느낌을 주고 있지만 그중 몇 가지만 소개하려 합니다.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 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이 비참에 진저리 치면서 나는 오늘도 당신의 슬픔을 공부한다. 그래서 슬픔에 대한 공부는 슬픈 공부다.
감히 다른 사람들의 슬픔을 나의 한계에서 쉽게 이해하는 척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남의 슬픔과 아픔을 나의 것처럼 느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노력으로만 가능합니다. 나의 아픔은 그 자체로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위로입니다. 나의 아픔과 슬픔은 나를 성장시키기도 하지만 훗날 만날 누군가의 위로로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슬픔을 위로한다는 것>
슬픔의 위안이라는 책이 있다.
슬픔에 대한 어설픈 통찰을 늘어놓으면서 빨리 거기서 빠져나오라고 훈계하는 대목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어디를 인용해도 상관없지만 내키는 대로 '휴식'이라는 제목의 챕터를 펼친다.
순수한 휴식은 슬픔의 고통을 치료해주는 가장 효과적인 치료제다. 그러나 슬퍼하는 사람이 참 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도 휴식이다. 휴식이 왜 어려운가. 저자들은 “슬픔이 원기를 고갈시키는 것처럼, 좋은 감정 역시 에너지를 무척이나 소진시킨다는 점"을 지적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따뜻한 위로를 건넨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므로 나는 좋은 감정으로 응대한다. 그러나 그 응대는 나의 감정적 자원을 크게 소모시키는 일이다. 그런 일들이 피곤하다고 느껴지면 고마워할 줄 모르는 나 자신에게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것이 또 나를 갉아먹는다.
함께 기도해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말하라고. “기도는 제가 직접 할 테니 설거지나 좀 해주시겠어요?” 이쯤 되면, 정확히 알지 못하면 제대로 위로할 수 없다는 뜻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렇게 인생에서도 그렇다.
슬픔을 극복한 시간이 필요하고 휴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대의 슬픔을 헤아리고 있다는 나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어설픈 위로로 상대를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욕망과 사랑의 차이, 완벽인가 완성인가?>
욕망과 사랑의 구조적 차이를 이렇게 요약해보려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 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정확한 사랑의 실험》
작가는 위의 인용문에 대해 perfect(완벽), complete(완성)의 논리를 적용합니다. 있음으로 채우는 것은 완벽함이며, 없어도 서로의 존재로 채워지는 것이 완성이라는 것이지요. 서로의 약점과 부족한 점까지도 끌어안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격과 조건을 갖춘 후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시작되어 서로를 보완하며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작가는 제리 맥과이어라는 영화의 명대사 “You complete me.”를 언급하기도 합니다. 제 기억에 이 대사는 청각장애 커플이 수화로 나눈 대화였고 그게 마치 복선처럼 깔리며 이후에 주인공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절실하게 느끼며 서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서로의 존재가 아니면 자신의 존재는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에 대한 실존적 자각에 의해 터져 나오는 고백이었습니다. 주인공의 고백이 물론 영화의 주류이지만, 저는 한편으로는 청각장애 커플의 고백이 더 와닿았습니다. perfect라고 볼 수 없는 신체적 조건으로도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며 서로의 존재로 인해 온전해짐을 고백하는 수화는 어떤 모습으로든 인간으로서 결함을 안고 사는 우리들에게 특히나 더 위로가 되는 외침이었습니다. 내가 완벽하기 때문에 당신이 내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의 불완전함으로 그대에게 다가설 수밖에 없다는 것은 사랑을 망설일 수 없게 하는 용기의 메시지인 것이지요.
<클리셰 벗어나기>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너무라니, 얼마나?"
“봄날의 곰만큼..”
"그게 무슨 말이야, 봄날의 곰이라니?"
"봄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같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 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게 말을 건네지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그래서 너와 새끼 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널 좋아해.“ - <노르웨이의 숲> 무라카미 하루키
여기서 핵심은 ‘너무’라는 간편하고도 흔해빠진 부사어에 습관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이를 여섯 줄의 문장으로 바꿔낸 성의(물론 이것도 사랑의 힘이다)에 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클리셰(cliche, 상투어)를 남발한다는 것은 그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랑에 익숙해지고 설렘과 특별한 느낌이 무뎌진 일상이 되어 그 존재 자체에 대한 자각이 없이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클리셰일 것 같습니다. 그게 말뿐 아니라 행동과 일상의 태도에서도 드러나겠지요.
<익숙함에서 탈출하는 인문학>
작가는 인문학의 생각법에 대해 그 무뎌진 일상에 대해 경계하는 내용을 언급하기도 합니다.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라는 작가의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소개한 우화입니다.
어린 물고기 두 마리가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그러다가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나이 든 물고기 한 마리와 마주친다. 그가 어린 물고기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잘 있었지, 얘들아? 물이 괜찮니?” 그와 헤어지고 어린 물고기 두 마리는 잠시 말없이 헤엄쳐갔는데, 문득 물고기 한 마리가 다른 물고기에게 말한다. “도대체 물이란 게 뭐야?”
물속에 살고 있음에도 물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는 물고기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물)이 대부분 엇비슷한 일상과 권태로운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어 너무 익숙하고 진부한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가 가장 어려운 대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인문학에 대한 이런 주장을 이어갑니다.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월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심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늘 같은 방식으로 생각한다고? 그렇다 월리스는 이를 "디폴트 세팅(default setting)", 즉 '초기설정'이라고 부른다. 컴퓨터가 그렇듯이 인간에게도 초기설정이라는 것이 있다.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자기중심적인 본성과 자신이라는 렌즈로 만물을 보며 해석하도록 되어 있는 경향이 그것. 타인의 생각이나 감정은 특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반면 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은 언제나 생생하고 절박하며 현실적이다 그래서 대체로 우리는 나를 중심에 놓고 세상을 해석한다.
껍질을 깨고 나오는 듯한 의식적인 "다르게 보기"의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저항하지 않고 도전을 받지도 않으며 그냥 흘러가는 것으로는 인생의 진정성을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겠지요.
그리고 인용한 작가의 작품의 한 구절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여러분이 받은 인문학 교육의 진가라고 나는 감히 주장하고 싶습니다. 성인으로서의 삶을 그저 편안하고 순조롭게 그럴싸한 모습으로 죽은 사람같이 살지 않는 방법, 무의식적인 일상의 계속이 아닌 삶을 사는 방법, 또한 자기 머리의 노예, 즉 허구한 날 독불장군처럼 유일무이하며 완벽하게 홀로 고고히 존재하는 태생적 디폴트 세팅의 노예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나가는 방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 <이것은 물이다>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
<배움이 가능한 인간의 유형>
작가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인간의 유형에 대해 주목합니다.
1번 :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2번 : 배워서 아는 사람
3번 : 곤란을 겪고 나서야 배우는 사람
4번 : 곤란을 겪고 나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
작가는 네 가지 유형의 사람들에 대해 배움의 가능 여부에 대해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네 유형을 다시 양분할 수 있다. 2번과 3번은 자의든 타의든 배우려는 사람들이니 가르침이 가능하다. 그러나 1번과 4번은 가르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이는 가르칠 ‘필요’가 없고,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는 이는 가르칠 ‘도리’가 없다. <양화(陽貨)> 편에는 이런 말도 나온다.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만은 변화시킬 수 없다." 물론 최악의 경우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을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 믿고 변화를 거부할 때일 것이다.
실제로 너무 똑똑하거나 그렇지 않은데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력하여 어떤 자극도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경우도 그러합니다.
서울의 강남 8학군 정도 느낌의 수성구의 공립학교에서는 실제로 너무 똑똑한 학생들도 있고 그런 똑똑한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동일하게 설정하여 인식하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학생들도 의외로 많음에 놀라곤 했습니다. 그런데 대구라는 큰 도시라도 지역에 따라서는 배움에 대한 학습된 무력감으로 인해서 시험 성적, 학교에서의 자극, 가정에서의 강권 등에도 전혀 꿈쩍하지 않고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경우를 보고 교사로서 함께 무력해하고 힘들어하였습니다.
결국 자신이 뭔가를 배우고 있고 그 사소한 성취감이 그들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과 그 결론적 상황에 이르기 위해서는 교사가 그들의 눈높이에 맞도록 치열하게 연구하여 다가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감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다짐하게 됩니다.
<멘토의 조건>
학교에서 영어교과 멘토링 학습코칭을 실시하며 스스로 학생들의 멘토를 자처하고 있습니다. 물론 원하는 학생들, 간절한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합니다.
학교가 아니어도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멘토가 되어 멘티들에게 영향을 주는 자리에 놓이기 됩니다.
멘토라는 말의 출처는 <오디세이아>라고 합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출정길에 오를 때 어린 아들 텔레마코스의 장래를 그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에게 부탁하여 20년 만에 귀향했을 때 그 아들의 성장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 mentor는 아버지 같은 스승이라는 의미로 영어권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에서 두 가지 멘토의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멘토르가 결정적인 순간에는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오디세우스를 찾는 모험길에 오르게 한 것은 실제 멘토르가 아니라 멘토르로 변장한 여신 아테네였다는 점에서 작가는 아래와 같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텔레마코스의 시선에서 보자면 아테나가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신뢰할 수 있었고 모험에 나설 수 있었으니까. 이를테면 좋은 '멘토'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멘토르'가 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지혜와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뢰라는 것. 나를 잘 아는, 내 편인 그런 사람만이 나를 진정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
멘토는 멘토의 성장에 있어 그 역할이나 존재감이 두드러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제 경우도 처음에는 방향성을 강조하며 코칭을 하지만 결국 자기주도적인 학습 습관형성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멘토링 과정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렇게 말합니다.
“출발점(그러니까 현재의 점수) 따위는 중요하지 않으며 끝까지 가려는 태도와 절실함만이 중요하고, 여러분들이 손을 먼저 놓지 않는 한 제가 먼저 손을 놓아버리는 일을 없을 것이며, 결국에는 멘토인 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그리고 멘토링 과정을 수업을 하지 않는 다른 학년에서 진행하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중단하였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멘토의 두 번째 의미입니다. 멘토로서의 라포(rapport)에서 시작된 신뢰감이 없다면 절대 의도한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육현장에서 만날 수 있는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이 훌륭한 책에서 발견하게 되어 무척 반갑고 힘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