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성과에 조급한 이들에게
고등학교에서 기본기가 부족한 학생들을 보면서 느꼈던 안타까움이 학생들의 그 후회가 시작되는 지점인 중학교로 타임슬립같이 다가가 후회의 물줄기를 바꿀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뭔가 드라마틱한 성장의 기회가 되기를 바랐던 기대와 설렘은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는 느낌이다.
일단 학생들이 나의 타임슬립 같은 이야기를 잘 믿지 않는다. 아이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킬 나의 내공이 부족한 탓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본인이 아프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병원을 찾지 않는 것처럼, 뭔가 잘하고 있다는 고집으로 가득한 아이들에겐 현실을 직시하게하는 나의 말은 망상에 가까운 잔소리에 불과하다.
부족하다고 느끼기에는 나름 열심히 하고 있고, 중학교에서의 성적이 잘 나오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학생일수록 더 그러하다. 눈에 보이는 증거가 있는데 굳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고등학교에서 하게 될 후회나 불안감 따위는 신경 쓸 일이 아닌 거다.
뭔가 열심히 해보았지만 중학교 수준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성취 의지를 가지고 도전했으나 좌절감을 느끼고(실제로는 보통은 선행을 나갈 때 그런 좌절감은 잘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선행의 과정이니 잘 못해도 나중에 하면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크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해지는 대구 수성구의 최상위권 학생들은 먼 길을 둘러서라도 정말 필요한 기본기에 대한 절실함을 갖게 되기는 한다.
그러나 어설프게 남들처럼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기본기를 무시하며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자신의 방식이나 학원에서 하는 방식이 맞다고 고집부리는 학생들이 많다. 이건 학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나라 교육 현실과 사교육의 성향, 우리나라 사람들의 조급함 등으로 인한 상황적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열심히 학원을 다니면서 밤 10시 이후에 지친 몸으로 귀가하는 아이들이 이 중학교에서는 매우 흔한 광경이다. 여긴 나름 이 읍면지역의 서울 대치동이나 대구 수성구 같은 경쟁과 높은 성취 의지에 관련된 문화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교육의 특성상 눈에 안 보이는 기본기보다 가시적인 성과가 우선이라는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그래서 학생들조차 중학교 내신의 성취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볼 기회를 박탈당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거기다 아직 그 정도 내용을 볼 수준이 아님에도 영어의 경우 남들처럼 고등학교 1학년 모의고사를 1년 앞서서 풀면서 수업을 듣는다. 이 경우 본인이 완전학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뭔가 어려운 것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앞서가고 있다는 안도감으로 안주한
해버린다. 이것도 불안함을 극복하려는 눈에 보이는 양적 증명의 형태 중 하나다.
그런 아이들은 지금 꽃꽂이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꽃꽂이가 화려할수록 당장 그 문제점을 파악하기 힘들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뭔가 잘못된 것을 인지하게 될 때까지 진정한 성장이 유보되고 있는 격이다. 그런데 그 인지하는 시점이 때로는 너무 늦어버려 안타까운 경우도 많다. 그러니까 꽃꽂이 같은 공부는 깊고 꾸준한 성장을 당장의 가시적 성과와 맞바꾸는 일회용 이벤트일 수 있는 거다.
난 외롭게 학생들에게 예언자처럼 외친다.
난 너희들의 미래에서 온 시간여행자다!!! 지금 당장 꽃을 피우려는 것은 재앙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뿌리를 내려야 한다. 정말 제대로 된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는 것이 중요하다. 조급함과 불안함을 지금 이 순간의 한 걸음의 행복감으로 바꿔야 한다!!! 정말 작고 초라해 보이는 기본기에 최선을 다하면서 사소한 성취를 얻는 것이 진정한 행복교육이며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비결이다. 남들보다 얼마나 앞섰냐, 얼마나 뒤처져 있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의 위치는 아무리 초라해도 단지 출발점일 뿐이며 매 순간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으며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분량만 성장하면서 행복 걸음을 걷다가 마지막 순간에 내디딘 마지막 걸음이 너희들의 도달점이면 되는 거다. 그저 “행복할 만큼만”
오늘 이찬수 목사님의 설교를 듣다가 이런 대목에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중등부 사역을 할 때 겪었던 어려움과 고통의 순간을 교사들과 나누다가 눈물로 씨를 뿌리고 거두려고까지 하지 말고 그저 눈물로 씨만 뿌리자고 선언을 했다고... 거두려고 하는 욕심을 못 내려놓으니까 아이들을 못 기다려주고 교사인 본인도 힘들어하는 거라고... 그저 눈물로 당장 할 수 있는 진심을 다하면 누군가는 기쁨으로 거둘 날이 있을 거라는 소망을 품으면 되는 거라고...
교사들의 보상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때가 많아서 교사의 보람을 느끼기가 힘들며, 교사 자신의 미미한 교육적 영향력에 심지어 깊은 무력감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의 진정한 역할도 아이들을 당장 교사의 시나리오대로 꺾어서 꽃꽂이를 하는 게 아니라, 뿌리를 내리도록 오래 기다려주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이 다 그러하다. 순리가 있고 단계가 있고 각자 감당할 분량이 있다. 그걸 넘어서면 아무리 의미 있는 일을 하더라도 고통스럽다. 조급함은 남의 걸음의 속도를 의식하는 데서 나온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게 몰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나 어른들이 늘 위로자가 되어 주어야 한다.
다른 이들의 화려한 꽃꽂이 결과에 아이들이 흔들리지 않게, 어른들도 함께 흔들리지 않게...
오늘 그저 눈물로 씨를 뿌리고, 그저 뿌리를 조금 더 깊게 내리도록 서로 격려하고 도와주기...
그래서 교육이 어렵다. 확인할 수 없는 희망을 품고 확신에 찬 버팀목이 되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그 열매를 체험한 어른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의 넘어짐이 그저 일시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성장의 더 큰 기회가 되고 있음을 당장은 너무 아파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학교에서 눈물로 씨를 뿌리며 지치지 않기를 희망한다.
부디 아이들이 내가 하는 말들을 고등학교에 가서나 그 이후에 가슴을 치며 실감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눈물로 뿌린 씨가 그것을 받아들인 아이들에게 존재감이 없이 자연스러운 꽃과 열매로 맺히는데 역할을 하기를, 아이들이 너무 잘 되어서 그 씨앗을 심어준 나에게 의식적인 고마움조차 생길일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