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세대, 추억하는 세대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보고

by 청블리쌤

고3인 둘째 딸은 영원을 꿈꾸고 난 현실을 보았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드라마를 보면서 10대들은 극중 인물들과 동일시하며 아직 겪어보지 않은 미래를 그려 보고, 30-40대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주인공 두 사람의 사랑이 결국 이뤄졌는지에 대해 네티즌들의 토론도 활발했다.

복선을 찾아내며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응원하고 있었다.

딸도 너무 몰입을 한 나머지, 남주를 동경하기도 원망하기도 했었다.

본방 사수를 할 수가 없어서 딸과 스케줄을 맞춰 VOD로 함께 보았다. 딸과 드라마를 보니 통하는 것이 많아 마음이 편했다. 눈물 나는 타이밍에서는 둘이 함께 눈물을 훔쳤다.

본방 사수를 하지 않으면 스포를 당하는 단점이 있었다. 딸은 이미 스포를 당한 채로 드라마로 확인을 했다.

아무리 고3이라도 마지막 회는 본방사수를 하기로 했는데 난 약속을 어기고 그만 그보다 일찍 잠들고 말았다. 예전에 VOD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에 인기 있는 드라마가 방영을 하면 거리가 휑했던 그 시절이 아니라서, 본방을 놓쳤어도 언제든 다시 찾아볼 수 있었지만, 본방을 놓친 아쉬움보다 딸과 함께 보는 그 교감과 소통의 순간을 놓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세대가 다르면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칫 어른 자신에게만 소중한 추억을 강요하다 보면 젊은 세대에게 꼰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관점과 어른이 되어 느끼는 현실은 분명 괴리가 있지만, 그 간격을 어른의 경험과 생각으로 막무가내로 채워서도 안 된다. 그게 정답이 아닐 수도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정답이더라도 그걸 채우는 건 서투르고 시간이 걸려도 아이들 자신의 몫이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온 것처럼 젊은 시절은 사랑과 우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다. 그리고 그 시절의 모든 소중한 것에 대한 영원을 꿈꾼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충격처럼 영원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중년 이상의 시간의 흐름으로 탈탈 털리면서 상실감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아이들이 꿈조차 꾸지 못하게 할 권리는 없다.

어른들은 현실에 디딤발을 두어야 하는 책임과 삶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지만, 젊은이들은 젊다는 이유로 얼마든 헤맬 자유도 있고, 실패를 무릅쓰고 모험할 권리도 있다.

중학교 때 외삼촌이 중고등학교 때 의무적으로 사랑을 꼭 겪어봐야 한다고 내게 미션을 주셨던 기억이 난다. 계산하지 않고 감정 자체만으로, 그 순수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난 숙제를 하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내게 찾아온 사랑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랑을 하는 것과 사랑을 이루는 것과는 별개였다. 무슨 공식처럼 사랑의 도달점은 결혼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결혼에 이르지 못한 사랑은 새드엔딩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결혼에 이르지 못한 모든 사랑을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시 그 때로 돌아가서 첫사랑의 이별의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첫사랑 후 아쉬운 것은 이별을 막을 수도 있었다는, 운명을 거스르는 듯한 거창함이 아니라, 보다 더 현실적인 이별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별 자체를 아름답게 미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얼마나 순수한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했는지, 그로 인해서 서로가 얼마나 더 성장하고 감성이 자랐는지, 그래서 이 현실과의 단절로 인해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 보물처럼 가슴속에 자리하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알려주는 이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이별이 덜 아프지는 않겠지만, 사랑의 깊이만큼 반드시 아픔을 감당해야 하고 그것이 진정한 사랑으로 치러야 할 대가이긴 하지만... 그런 이별은 현실이 아닌 이후의 삶 속에서도 우리에게 응원으로 격려로 닿지 않을까 생각했다.

난 첫사랑과 헤어진 후 우연한 기회(아이러브스쿨 동창 찾기)에 16년 만에 전화 통화를 했다. 아프게 헤어졌지만, 나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음에도 그녀는 날 용서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난 그녀가 내 첫사랑이었음을, 그 순간 마음이 변하거나 다른 이유로 헤어진 건 아니었고, 그 이후로도 몇 년간 그리워하며 가슴 아파했음을, 그리고 매 순간이 다 소중하고 행복했음을, 그녀로 인해 용서와 이해를 배우고 감정도 깊어질 수 있었음을 진심을 담아 고백할 수 있었다.

그 이후 또 소식이 끊겨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지만ㅠㅠ

내겐 운 좋게도 첫사랑의 아픈 이별에 대한 변명할 기회가 주어졌던 거다. 그런데 그런 내 구구절절한 말이 아니어도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매 순간이 진심이었고, 이별조차도 평생 가슴에 자리 잡을 소중한 기억임을 그 순간에도 이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랑이 이뤄지는 건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결혼은 사랑 이상의 다른 뭔가가 더 개입을 한다. 그런데도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마음이 그 모든 걸 다 극복하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하게 크기 때문이다.

결혼으로 이어지지 않은 어린 시절의 사랑은 계산도 조건도 따지지 않는 그저 순수한 마음, 진심 그대로인 것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사랑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삶의 궤도를 바꾸었다는 것은 자명하다.

큰 딸이 연애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고 1 때부터 난 이미 시작된 사랑을 응원했다. 그리고 이별을 맞이할 때 가슴 아팠지만, 딸에게 이 세상의 모든 이별 노래가 너의 노래가 될 것이라고, 반드시 사랑했던 만큼 가슴 아픈 이별의 과정을 통과해야 하고, 그건 너의 사랑이 진심이었다는 증거이며, 그래서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도 학창 시절의 사랑을 해보았기 때문에 그런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었다.

딸은 그 과정 중에 배려를 배우고, 공감의 깊이를 더했다. 그 시절의 나처럼...

실패한 사랑은 없다. 그 순간 할 수 있는 사랑이면 된다. 결혼에 성공한 사랑도 결국 이별, 아니 사별을 한다. 영원을 꿈꾸었지만, 영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될 때쯤 우리는 그저 그 순간의 찰라 같은 영원을 누릴 수 있다. 추억을 남기려고 이 순간 사랑하는 건 아니지만, 추억은 매 순간의 행복한 영원 같은 사랑을 한 것에 대한 보너스 같은 부산물이다. 그게 현실일 수 없어 때론 가슴 아프게 떠올리기도 하지만, 가슴 아프다는 건 그만큼 좋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불만은 없다. 아프지 않은 사랑은 추억이 아닌 거다.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니 교사가 된 나는, 군대 시절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학교를 떠난 적이 없었다. 사랑과 우정이 영원한 그 시절에 머물며, 그 영원함을 꿈꾸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축복을 여전히 누리고 있다. 마치 피터팬 증후군을 선택해서 겪는 것처럼, 난 아직 동화 속을 살고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보통 지금 이 순간의 현실 속에서만 아이들을 만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추억으로 봉인되기를 거부하듯 내게 찾아와 미래의 모습을 내게 알려주기도 한다. 그러면 난 또 그 이후 그들의 미래까지 내다볼 수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난 아이들에 대한 응원을 멈출 수 없다. 아이들의 불완전과 만났다는 건 이후에 끝없이 채워질 그들의 성장이 예정되어 있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금 불완전함과 부족함이 더 크게 느껴질수록 아이들의 미래의 모습이 더 기대가 되기도 한다.

삶의 굴곡이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좋은 날만 좋은 것이 아니다. 좋지 않은 날이 좋은 날을 더 빛나게 하고,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한다.

그러니 젊음은 실패할 권리와 모험할 이유가 명확하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둬두지 말아야 한다.

어른들은 ‘라떼’는 그만해야 한다. 우리 때는 상황이 지금보다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은 편리함은 더해져서, 예전에 그런 불편함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떠오르지 않을 정도지만, 그래서 아이들에게 배부른 소리 하지 말라며 헝그리 정신을 강조하기에는, 그 풍요로움과 편리함 속에 느끼는 빈곤과 결핍의 크기가 더 크다는 걸 어른들은 헤아려야 한다. 아니 비교할 이유는 없다. 기억 속에 잊혀졌을 뿐, 실제로 우리도 많이 아파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자신만의 스토리로 다 아파하며 성장한다. 그저 그 자체로 공감해 주어야 한다. 슬프게도 해결책은 어른들에게 있지 않다. 어른들은 아이들과 함께 아파해주며 응원하며 지지할 수 있을 뿐, 결국 그 아픔과 짐을 져야 하는 건 아이들 자신의 몫이다. 그런데 그 아픔의 깊이만큼 아이들은 성장한다.

상황이 달라지기를 기도하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잘 이겨내고 성장하기를 기도하고 싶다. 상황은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만의 결의를 하고, 실패를 하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선택을 하는 것도 모두 자신에게 달린 것이니까.

전설적인 야구선수들의 성공은 그에 못지않은 삼진이나 실패로 점철된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타자도 10번 중 6번 이상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10번 중 3번만 성공해도 3할 타자이며, 뛰어난 타자다. 전설로 기억된다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운 호칭이다. 성공보다 더 중요한 건 실패에도 계속하려던 그 어려운 결단인 것이다.

어른들의 응원이 아이들에게 닿기를... 그 응원은 꼰대의 소리도, 알아서 다 챙겨주는 과도한 개입도 아닐 것이다. 아픔을 함께 하고 넘어져도 스스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다.

아이들은 매 순간 행복할 권리와 자유가 있다. 이미 다 겪어보았으니 무조건 각본대로 따라오라는 어른들의 억지스러움이 아이들의 서툴러도 행복한 그 순간을 막을 권리는 없다.

난 오늘도 아이들에게 무한하게 펼쳐질 가능성 있는 미래로 향하는 그 길 언저리에서 아이들의 희망과 행복을 지켜보는 축복을 누리며 사명감을 재정비한다. 함께 아파하면서도 희망을 품고 기다린다. 당장은 실감 나지 않겠지만 모든 순간 행복하지 않은 순간이 없고, 어떤 경험도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는 것을 아이들이 느껴가며 성장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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