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날들을 위하여-파스칼 브뤼크네르
<세계적 지성이 전하는 나이듦의 새로운 태도>라는 부제가 붙은 책이다.
젊을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이었을 텐데, 이 책을 손에 잡은 건, 나도 이제 나이듦에 대한 위로와 공감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그건 더 이상 젊음이라는 이름으로 뭉개고 있기에는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걸 받아들였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작가는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가로 세계적 지성으로 명망이 높다고 한다. 지성이 있어야 나이듦에 더 잘 대처하는 건 아니겠지만, 책을 보면서 당연한 사실에는 위로와 공감이 되었고, 현실을 바라보는 몇 가지 새로운 시각도 얻게 되었다.
아래 챕터 제목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프롤로그 – 나이가 들었다고 꼭 그 나이인 건 아니다
1 포기 ― 포기를 포기하라
2 자리 ― 아직은 퇴장할 때가 아니다
3 루틴 ― 시시한 일상이 우리를 구한다
4 시간 ― 당장 죽을 듯이, 영원히 죽지 않을 듯이
5 욕망 ― 아직도 이러고 삽니다
6 사랑 ― 죽는 날까지 사랑할 수 있다면
7 기회 ― 죄송해요, 늦으셨습니다
8 한계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9 죽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10 영원 ― 불멸의 필멸자들
에필로그 -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그중 나이가 충분히 많이 들지 않았어도 삶을 더 의미 있게 해줄 수 있는 세 번째 챕터의 한 대목만 소개하려 한다.
특히 권태로움을 싫어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모험을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많은 젊은이들이 놓치기 쉬운 일상에 대한 이야기다.
그 일상은 절대 권태로움이 아니었다는 것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 실감하게 된다. 두 딸들의 어린 시절, 나는 퇴근 후의 고단함이라는 이유로 그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더 절실히 깨닫지 못했음이 가슴 사무친다. 단 하루만이라도 그 평범한 일상에 있는 아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상상은 그 사무침의 부질없는 부산물이다.
흐린 날이 싫다고 매 순간 햇빛만 바란다면 그곳은 사막이 될 것이다.
우리 삶의 특별한 순간은 시간이 지나서는 너무 평범해서 기억조차 잘 나지 않는 일상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던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상 자체도 특별한 것이었음을, 많은 일상을 겪어보고 나서야 깨닫기 시작했다. 그때 아니면 겪을 수 없는 특별한 일들을 평범함으로 포장된 일상으로 겪고 있었던 거였다.
p.72-73
그렇지만 습관은 찬양해야 한다. 습관은 우리의 행위에 입히는 옷, 우리를 구조화하는 집, 우리 일상의 정신적 소재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 된 기질로서 심리적 낭비를 크게 막아준다. 우리는 늘 습관의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신념보다 더 뿌리 뽑기 힘든 게 습관이다. 전위파들은 규칙성은 죽음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규칙성이 운명의 존재론적 기반이요, 생존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규칙성을 폐기하고 예측 불가능성과 영원한 창의성을 떠받들면 끔찍한 진부함은 없을지 모르겠으나 생활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죽이는 시간 없이 살아라, 속박 없이 즐겨라"라는 상황주의자들(195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일상의 비일상화를 외치면서 유럽에서 일어났던 예술 운동의 주창자들- 옮긴이)의 상업적 슬로건은 치열함을 또 다른 빡빡한 일상으로 둔갑시킬 위험이 있다. 삶이 꽁꽁 얼어붙은 시냇물처럼, 보톡스를 잔뜩 맞은 얼굴처럼 굳어지면, 새로운 파트너, 새로운 직업, 새로운 나라를 꿈꾸고 싶어진다. 하지만 커다란 변화에 대한 환상은 주로 자기 삶의 조건을 견디기 위한 수단이다. 그런 환상이 오히려 현 상태를 강화한다. 불평할수록 그 상태에서 잘 버틴다.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기 위해서 불평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나름의 전통을 만든다. 루틴은 역사 없는 존재들이 우발적으로 빚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를 바로 세우는 뼈대다. 이 자동적 행위들의 집합이 우리를 구성하는 동시에 억압한다. 삶은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옥죄기도 하고 떠받치기도 하는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려 있다. 언젠가는 그 실이 하나하나 끊어진다.
"움직이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휴식 중인 것은 아니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어떤 사건이 잿빛 일상에서 확 떠오르려면 백색의 시간, 별일 없이 살아가는 중립의 지속이 필요하다. 허를 찌르는 순간은 거의 항상 자잘한 소음을 배경으로 삼는다. 단조로운 일상이 없으면 전격적인 변화도 가능하지 않다. 우리 일상의 선율은 일종의 통주저음이다. 그 통주저음을 배경 삼아 이따금 가슴 떨리는 아리아가 연주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