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딸에게서 갑작스럽게 문자가 왔다.
아빠 저 열심히 하면 원하는 대학 갈 수 있나여?
현실적으로요
어떤 마음일지 짐작은 했지만, 전화를 할 상황은 아니어서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갈 수 있지. 눈에 보이는 지금의 모습으로 이후에 이뤄낼 미래의 성취를 제한하면 안 된다. 넌 바른 방향으로 조금씩 빌드업해가고 있는 것이니 지금의 느낌이나 성적으로는 너가 어디까지 성취할지 짐작도 못 할 수 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거 아니다. 수능 전에는 모든 것이 가능성이고 수능친 후에는 모든 것이 현실이니 아직 정해지지 않은 큰 기회에 계속 베팅하렴.
할 수 있다. (중략) 마음이 힘들고 주변의 일반화된 용기 빼앗는 말에 굴복하지 마라. 아직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으로도.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끝까지 해보자
그리고 오늘 아침 딸을 일찍 깨워서 상담을 하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주변 친구가 목표에 비해 당장의 성적이 잘 안 나와서 벌써 재수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는데, 상위권 학생들 중에 그렇게 마음먹는 애들이 꽤 많아서, 그렇지 않아도 공부도 잘 안되고, 충분히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목표에 다가가는 것이 구체화되지 않은 막연함에서 더 큰 부담을 느꼈던 것 같다.
모든 말이 다 기억나지 않지만 이 정도로 딸에게 조언했던 것 같다.
일단 재수를 생각하는 건 현재의 치열함을 감당하지 않고 미루려는 심리가 크기 때문일 수 있다. 어떤 시기에든 늘 아쉬움은 있게 마련인데,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현재의 초라한 성취수준에 비해 이후의 또 다른 기회에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더 큰 희망을 품게 된다. 늘 중간고사를 망치고 나서 기말고사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되는 것처럼.
그러나 지금 불리한 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조건이라고 역량을 다 발휘할 것을 장담할 수 없다.
실제로 1년이라는 시간을 더 공부하면 산술적으로 성적이 훨씬 올라가야 하는데 꼭 그렇지는 않으니까.
네 언니도 수능 2주 전에 1년만 더 있었으면 대박 났을 것 같다는 말을 했을 때 아빠가 뭐랬게?
"혹시 1년의 시간이 더 주어졌더라도 2주 전에 똑같은 말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주어진 제한된 환경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을 겪어보고 전략을 짜는 훈련이 필요한 거다. 수능 망쳤어도 주어진 성적으로 원서 쓰는 전략도 짜 보라고 권한다. 그 현실을 겪어보고 느끼는 좌절감은 훗날 몸으로 기억하는 동기유발이 될 수도 있고, 실제 원하는 성적을 받았을 때에도 원서 쓰는 전략에 대한 경험치로 쌓이게 될 거니까.
네 언니 논술도 마찬가지였다.
언니는 논술을 준비한 적도 없고, 기출문제조차 풀어보지 않았어. 수능 끝나고 3일 후에 시험이었으니 따로 준비할 여력도 안 되었고. 그럼에도 아빠는 그저 언니가 경쟁률 60 대 1 정도의 치열함의 현장에만 있어본 것만으로도 삶에 대한 예의를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언니가 혹 반수를 하거나 재수를 하면서 논술을 응시하려 할 때에도 그때의 경험이 실제적 도움이 되는 경험치로 축적될 거라 믿었고. 그래서 귀찮아하는 언니를 일으켜서 서울 놀러 가자는 핑계로 데려갔던 거란다. 물론 수능 최저도 맞췄고, 언니가 오히려 학원을 다니지 않아서 원리부터 이해하면서 나름 수학, 과학의 체계를 쌓아 갔었으니까 어느 정도의 가능성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합격권에 들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합격했잖니.
하다 보면 무슨 요행이 있을 거라는 얘기는 아니다. 물론 그 요행도 준비하고 실력을 갖춘 자들에게만 따라오는 선물 같은 것이긴 하지.
더 준비했으면 좋았을 거고, 더 열심히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후회는 언제나 남을 수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런데 어쨌거나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인 거잖니. 아직 기회가 있다는 사실만 기억하면 된다.
지난번 얘기했던 6월 모의고사 성적으로 경대 안정권도 아니었던 제자도 수능 전에는 그 어떤 확신을 가질 증거를 찾지 못했지만, 그저 수능으로 학교선생님들을 전부 놀라게 했단다. 그 제자를 격려할 때 아빠가 가졌던 믿음은, 1학년 때는 거의 노베이스였지만, 그때부터 습관형성에 노력하고 기본기부터 꾸준히 공부를 해왔다는 사실이었다. 의외로 고3 아이들이 공부 안 할 이유를 더 많이 찾고, 합리화하며 고3 생활을 지내고 있는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킬 거라는 믿음이 있었던 거란다. 그건 우리가 보통 모의고사 성적 등으로 확인하려는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본질인 거였지.
너도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 있겠고, 이런 고민을 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잠을 퍼 자고, 집중 못 하고,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 않고, 다른 애들에 비해 많이 밀려 있는 것 같은데도 그 이상 공부하지 않는 것 같고, 곧 있을 6월 모의고사 성적에서 사소한 희망이라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하고, 미래는 막연하고, 희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마음의 평정심을 겨우 찾았는데 주변의 친구들의 모습과 말이, 선생님들의 일반화된 말씀이, 너의 성적이 자꾸 악마의 속삭임처럼 너를 흔들 거란다. 그렇지만, 의식적으로 둔감해지도록 애쓰면 좋겠구나. 가변적인 주변 상황보다 지금 배움을 이뤄가고 있다는 너의 노력은 변하지 않는 본질인 거니까... 그게 언제 발휘가 되고 안 되고는 너의 영역이 아니니, 성취가 드러나는 그 타이밍조차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학원을 다닌다는 외적인 증명, 그리고 친구들이 학원에 다닌 축적량 등에 비교하면 그 자체로 넌 초라함을 느끼겠지만, 아빠가 늘 강조하는 정확한 방향성과 기본부터 너 스스로 쌓아올려간 경쟁력은 지금 당장보다 결국에는 다 발휘될 거라 확신한다.
장담하건대 넌 수능 때 이전에 구경 못한 성적을 받게 될 거다. 그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니까.
물론 성적이 떨어지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지. 아빠 제자 중에 오히려 수능 가까이 와서 절정을 찍고는 안심하게 되어 수능 망쳐서 의대를 떨어지고 삼수한 사례도 있었단다. 그래도 결국에는 한 해만 늦었을 뿐 지금은 의대 교수까지 하고 있지.
다음 기회는 있지만 이번이 너에게는 절호의 찬스다. 준비도와 상관없이.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럼에도 원하는 대로 잘 안되었을 때, 그때까지 최선을 다했다면 후회를 남기지 않을 것이니 다른 옵션을 놓고 고민하고 선택할 여지는 있는 거란다. 혹 너가 목표했던 대학을 못 갔을 경우 대학생활을 해보면서 경험치를 쌓고, 너의 목표의 현실성과 너의 노력의 방향성을 함께 고민한 후 반수라는 선택도 할 수 있다. 그래서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한 한기 등록금(1학기 때는 대학마다 휴학이 안 되니까)을 날린 것 같지만, 인생을 배운 수업료로 아빠가 기꺼이 투자해 줄 수 있다.
지금부터 열심히 한다고 모든 것을 다 보장받을 수는 없다. 노베이스이거나 그동안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경우, 축적된 기본기의 정도에 따라 앞으로 주어진 시간은 같지만 그 성과는 완전히 다를 수 있으니 지금 아빠가 하는 말은 모두에게 다 적용되는 말은 아닐 거다. 그런데 기본부터 혼자서 여기까지 꾸준히 해 온 너에게는 적용된다고 확신한다. 게다가 아직 시간이 많이 있고 너가 만들어낼 기회가 많단다. 물론 열심히 안 해도 잘 된다는 의미가 아닌 건 알고 있지?
그러나 꼭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나면 좋겠구나. 그러기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일들이 너에게는 더 중요한 거니까... 혹 오늘 공부가 잘 안되어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지키고, 다음 날 주어질 기회에 감사하며 즐겁게 배움의 성장을 이뤄 가면 그걸로 족하다. 수능은 그 일상의 연장으로 그저 그 주어진 기회에 너가 해온 것을 다 쏟아붓고 나서, 그다음에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이고 결정하면 되는 거다.
그저 힘내렴. 너의 속도로 너의 길을 가렴. 힘든 순간에 아빠를 찾아줘서 고맙다. 한 번씩 주기적으로 슬럼프도 오고 고민이 생길 텐데 언제든 얘기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