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teracy는 우리말로 문해력 정도로 해석한다.
영영풀이
1) the ability to read and write 읽고 쓸 줄 아는 능력
2) competence or knowledge in a specified area 특정 분야의 능력이나 지식
그러나 그 교육적 함의는 문자를 읽고 쓴다는 문자적인 의미 이상을 담고 있다.
미국에서 15년간 리터러시를 교육하고 연구한 조병영교수의 리터러시에 대한 명쾌한 주석서와 같은 책을 만났다. 리터러시의 교육적 함의, 삶의 방식, 다양한 읽기에 대한 실제 지침까지 자세하게 담겨 있다. 그저 일독만으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책을 찾아본다는 것 자체가 리터러시를 실천하는 삶이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터러시가 더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은 일부러 이런 책을 찾아보지 않을 것이니 그 중요성에 대한 메시지가 잘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교사들과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학습능력은 말하기, 듣기로도 이뤄지지만, 결국 자기주도학습의 시작은 문자와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리터러시는 모든 영역에서 배움의 효율성과 속도와 깊이를 결정한다. 복리효과처럼 적용을 한다면 빨리 능력을 얻을수록 그의 삶은 몇 배 이상 달라진 수 있다.
그것이 단지 좋은 성적을 받아서 출세한다는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평생 배움과 평생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만큼 더 행복한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리터러시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이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역할을 해주어야 하지만, 보다 설득력 있고, 진정성 있게 영향을 줄 수 있으려면 교사의 리터러시의 삶 자체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이 이상적일 것 같다. 교사라도, 나이가 많아도 우리는 평생 배움과 성장을 멈출 이유는 없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이 의무적으로 감당할 과정이 아니라 즐거운 행복의 길인 것이니까...
이 책에서 몇 가지 내용만 발췌해 보았다.
Literacy : reading the word and reading the world
– Paulo Freire
파울로 프레이리의 말처럼 리터러시는 단어를 읽는 행위에 머물지 않는다. 세상을 읽는 행위로 당연히 확장된다. 영어로 표현하니 더 묘미가 살아난다. word에 L 하나만 더 했을 뿐인데... 이 정의가 대략적인 리터러시의 방향성을 다 말해주는 것 같다.
아는 만큼, 준비된 만큼, 우리의 어휘력만큼 세상이 보인다.
작가는 리터러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정확한 낱글자 읽기가 복잡다단한 세상 읽기로 전환되는 과정에 기여하는, 매우 정밀하고 섬세한 지적, 정서적, 사회적 의미 구성 과정과 실천의 스펙트럼을 포괄합니다.
리터러시는 그저 읽고 쓸 수 있는 기능적인 차원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하면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을 이어간다.
파울로 프레이리는 일상에서 글을 읽을 때 특히 '정신의 관료화 bureaucratization of mind'를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정신의 관료화란 행정기관의 공무원들이 업무에 지나치게 익숙해진 나머지 마치 모든 일이 원래 그렇게 되기로 했던 것인 양 타성에 젖어 서류를 처리하는 것과 비슷한, 경직된 마음 상태를 이르는 말입니다. 즉, 눈앞에 보이는 것을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구태의연한 독자가 되지 말라는 조언입니다. 누군가가 정해준 방식으로 읽는 것, 영혼과 의식이 부재한 상태에서 읽는 것에 익숙해지지 말라는 충고입니다. 정신이 굳어 있는 관료적 읽기에는 날카로운 문제의식이 스며들 틈이 없고, 비판적으로 질문하는 유연성이 발휘될 여유도 없습니다.
리터러시는 글자 읽기에서 출발하여 세상 읽기로 발전됩니다. 텍스트는 이러한 지적, 정서적, 사회적 경험과 참여를 매개합니다. 형식, 내용, 표현, 양식, 출처, 질에 상관없이 리터러시란 결국엔 텍스트를 다루는 일입니다. 텍스트는 세상을 거울처럼 '반영 reflect'하지만, 동시에 세상을 그림처럼 '표상 represent'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조금 더 엄밀하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을 반영하고 표상하는 텍스트들을 조금 더 엄밀하고 폭넓게 직접 찾아 나서고 발견하여 서로 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텍스트가 항상 우리가 추구하는 진리나 진실의 방식을 따르지는 않습니다. 텍스트도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 만든 사회적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좋고 싶음이나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텍스트는 늘, 언제나, 예외 없이 편향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텍스트를 읽고 쓰는 리터러시의 과정은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처럼 늘 주의와 경계를 요구하며, 민첩한 판단력과 명민한 전략을 필요로 합니다.
시험을 잘 봐서 성적을 올리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리터러시의 효용 가치를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다양성 시대의 리터러시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글자를 깨치고 글 내용을 이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것으로 삶을 배우고 앓을 다집니다. 그들은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서 '읽기와 쓰기'라는 행위를 적극적으로 수행합니다. 능동적으로 텍스트를 탐색하고, 그것으로 세상을 읽고 쓰면서 당면한 생활의 문제를 해결하고 중대한 사회적 숙의 과정에 참여하며, 첨예한 토론의 과정에 기여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자발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실천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제대로 읽고 쓰는 사람들 being literate'이 되어 갑니다.
작가는 <효과적으로 읽는 사람의 세 가지 인지 활동>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1) 인지적 역량 – 의미를 구성하다
2) 메타인지적 역량 – 생각을 조율하다
3) 인식론적 역량 – 앎을 성찰하다(독자가 정보의 출처를 조사하고 평가하는 맥락에서 자신의 지식과 앎에 대해 성찰하려는 노력으로 발현)
(지식은 결과이고 앎은 과정이다.)
그리고 <리터러시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에 대해서 삶의 격차가 점점 더 벌어지는 양극화 현상을 의미하는 매튜(마태) 효과(마태복음 25:29)를 언급하며, 심리학자 키이스 스타토비치가 기초 읽기 능력 성취한 아동과 그렇지 않은 아동 간의 학력 격차를 밝혀낸(읽기의 매튜효과) 논문의 내용을 소개하기도 한다.
학교현장에서 실감하는 내용이다. 똑같은 내용을 배우는데도 학생들 간의 격차가 줄어들지 않는 것은 사전지식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리터러시의 차이가 결정적이다. 소위 말귀를 빨리 알아듣고 못 듣고를 결정하며, 듣기의 이해력 정도를 결정하며, 더 상위단계에서는 이해한 내용을 자신만의 지식구조로 체계화하는 능력과 배움의 결과로 결정된다.
복리를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면 무조건 유리하듯, 아이들의 리터러시를 위한 심각하고 진지한 접근이 정말 절실하다. 아이들이 의지가 있어도 학원만 다니는 일상으로는 그 역량을 키울 기회를 갖기는 정말 어렵다.
작가는 실질적 문맹 사회로 가는 잘못된 설계를 지적하면서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리터러시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유도합니다. 생산적이고 의미 있는 대화는 대화자들 사이에 공유된 '책무성'을 전제로 합니다. 이렇게 배운 읽기는 평소와는 다른 읽기입니다. 제대로 읽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소와는 다르게 읽어야 합니다. '평소'란 예전에 배웠던 대로, 늘 하던 대로를 뜻합니다. 질문 없는 사회, 대화 없는 사회, 책임 없는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 읽기 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평상시에 다양한 경로로 글 읽는 법을 배우고 경험합니다. 평소대로 하는 일은 익숙하기 때문에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심신이 편한 상태에서는 변화가 일어날 일이 없습니다. '변화는 언제나 '불편함'에서 시작되며 그것을 느끼고 자각하는 일 역시 의식과 노력을 요구하는 불편한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 여러분은 불편해져야 합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불편함은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점으로 읽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자신의 지식의 체계의 껍질을 깨고 나와 또 다른 성장된 자아를 갖는다는 것도, 그저 안일한 시간의 흐름과 일상의 반복만으로는 불가능한 거니까.
이 외에도 디지털 시대의 리터러시, 새롭게 변화를 체험하는 리터러시 등에 대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