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아들이 정시파이터 된다고 기말 공부도 안 하고 냉방병으로 병원 다니고 있다면서 속이 탄다는 친구의 문자를 받았다.
그 아들은 교육특구에서도 2학년 1학기 중간고사까지 수시로 의대를 지원할 사정권에 있었기 때문에 엄마의 안타까움은 더 클 것이었다. 수시에 대한 절실함이 좀 부족했을 뿐, 정시파이터로 의대를 갈 역량도 되기 때문에 부모 입장이 아닌 난, 큰 걱정은 되지 않았지만 친구의 아픔을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내신보다 모의고사가 훨씬 비교우위가 있는 객관적 이유 말고도 내 큰 딸처럼 낙천적이고 다소 게으른 학생들이 주로 정시파이터를 선언한다. 수시대비는 중간, 기말고사 대비만으로 임무가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중간, 기말 사이의 과정평가형 수행평가는 특히 수시가 절실한 아이들에게 폭풍처럼 닥쳐서 제대로 숨 쉴 틈도 허락하지 않는다. 거기다 자소서와 추천서가 없어진 2022년 고2부터는 생기부의 영향력이 더 커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생기부 항목과 글자수도 줄었다. 그래서 가장 주목받는 항목이 내신성적 다음으로 교과목세부능력특기사항이다. 이전에도 세특의 중요성은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놓고 중요해졌다. 세특은 글자 몇 자로 퉁칠 일이 아니다. 진정성 있는 유의미한 기록이 되려면 삶으로 스토리가 나와야 한다. 자신의 관심사를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학생들에게는 고통스럽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전 과목을 다 균형 있게 관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다. (고등학교 교사들도 고통이다. 예전에는 우수한 학생들, 개성이 강한 아이들 위주로 작성해 주었는데, 지금은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는 학생들을 포함해서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 써주어야 한다. 물론 복사해서 붙여넣기하는 방식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런 긴장감이 3학년 1학기 종료될 때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그리고 대부분은 수능공부도 손에서 놓을 수 없기 때문에 3년 내내 쉼 없이 입시를 겪는 셈이다.
오히려 중간에 많이 아프거나 피치 못할 개인적인 일로 인해 내신성적이 구멍이 나면 마음 편하게 정시파이터를 선언하는 경우도 많다. 수시를 버린다는 건, 비율 상 정말 하기 힘든 결정인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합리화시키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시파이터들에게서 당장의 긴장감과 부담감은 없어진 게 아니라 수능 때까지 유보되고 있는 것이다. 3학년 1학기까지 수시준비생이 느껴야 할 고통과 부담을 수능이라는 단 한 번의 기회로 감당해야 하는 부담감은 상상 그 이상이다.
그러나 그 부담감은 수능이 다가올 때에만 구체화되며, 원래 하던 루틴대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는 수시준비생의 매순간 압박감과 긴장감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단지 당장의 공부가 싫어서 미뤄뒀던 학생이라면 압박감이 더 클 수 있겠지만, 제대로 수능 준비를 차분히 한 학생의 경우라면 변수로 인해 실력발휘가 안 될 수도 있다는 누구나 하는 걱정 외의 부담은 크지 않은 편이니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걸 바라보는 부모의 입장은 또 다르다. 부모는 늘 최악의 가능성까지 고려하며 걱정하고 고민하기 때문에 수시라는 더 큰 가능성을 내려놓는 것에 대해 속상한 건 당연하다.
딸 둘 모두 정시파이터인 나로서는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속상하겠다. 의외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더라ㅠㅠ"
큰 애가 중학교 내신 중상위권 정도였지만, 고등학교 입학하여 1학기 때 거의 모든 과목의 1등급을 받았다. 교과우수상을 받아온 것을 책장에 전시하려 하니까, 딸은 전시 안 해도 된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계속 교과우수상 받아줄 거라고 장담했다. 1학년 2학기 때까지 약속을 지키는가 했는데 그 이후에는 그 약속을 계속 지킬 일은 없었다. 2학년 올라가자마자 담임선생님과 상담할 때 이대로 계속하면 수시로 성균관대 이상 가겠다고 하자, 딸은 그렇게 힘들게 애쓸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도 사춘기 이후 아이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것에 격하게 공감하며 잘 실천해왔다고 생각했지만,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딸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딸은 정시파이터 신분으로 여유와 행복을 누렸다. 그리고 결국에는 의도하지 않게 논술전형으로 성균관대를 진학하여 여전히 행복하게 지내고 있으니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물론 성대를 진학하지 않았더라도 불행해지거나 후회할 일은 아니었다. 수능 끝나고 후회 없이 행복했다고 내게 선언했었으니 말이다. 성대는 어쩌다 주어진 보너스 같은 기쁨일 뿐이었다. 그 결과가 아니라도 후회하지 않을 거라는 걸 다짐하듯 선택을 한 것이었으니...
결과가 만족스럽다고 과정까지 만족스러웠을 보장은 없다. 오히려 결과만 중요하게 생각하여 과정 중의 아픔을 당연시하기도 한다. 지금 아이의 선택을 강제로라도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영영 후회할 일만 있을 것 같은 게 어른의 당연한 마음이다. 어른도 때로는 물러서면 안 되고 타협해서는 안 되는 지점에서 아이를 향한 강력한 반대와 설득과 강권도 필요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수시로 드는 무력감은 어른의 몫이다. 본전 생각도 어른들이 내려놓을 수 없는 아픔이다. 아이들의 선택이 무조건 옳을 수 없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른들의 일은 그냥 믿고 기다려주는 일뿐인 거다.
원래 부모의 역할은 그런 거였다. 아주 어린 시절에 부모의 존재와 도움이 절대적이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무력할 정도로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공부도 스스로 하는 것이고, 삶이라는 무대에 결정하고 후회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들도 아이들 스스로 하는 과정이다. 무대는 아이들만을 위한 것이고 부모는 관객일 수밖에 없다. 때로는 관객이기를 거부하면서 무대 뒤에서나 옆에서 아이의 공연을 노심초사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부모의 심리도 이해가 되지만... 그게 아이들에게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것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난 그저 애써 편안한 척 관객처럼 아이들의 무대를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저 관객모드가 될수록 부모의 역할이 최소화될수록 아이들의 역할과 주도성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넘어져도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고, 뭔가를 성취했을 때에도 부모님께 공을 돌리기보다 자기효능감과 자신감으로 이어지게는 것이 이후의 아이들의 삶에서도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회복탄력성을 갖출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해주는 도움이 아이에게는 절대적인 힘이고 응원이자 지지의 메시지였지만, 사춘기 즈음 그 이후부터는 부모의 무존재감 같은 거리 존중의 믿음과 기다림이 아이들에게 가닿는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가 된다.
사춘기 이후에도 어린 시절과 다를 바 없이 부모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거나 요구하거나, 부모의 도움과 간섭을 거부감 없이 다 받고 있다면 mama’s boy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부모의 도움 없이 살아가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걸 독립이라고 한다. 물리적 독립은 상황에 따라 지연될 수는 있지만 심리적 독립은 때가 되면 빨리 이뤄야 한다. 그런데 아이들만 독립이 어려운 건 아니다. 독립은 아이들에게 더 힘을 내서 이뤄야 할 미션이지만, 부모는 더 이상 힘을 내지 않고 참아야 할 고통이다.
부모라면 다 해봤을 일인 아이들을 위한 완벽한 대본 짜기...
부모는 자신의 모든 것을 갈아 넣어서라도 아이를 위한 최상의 삶의 계획을 구상한다. 진학과 진로와 취업과 결혼... 그리고 삶에서 겪게 될 온갖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까지...
그러나 알고 보면 부모가 고민할 필요는 없었는 지도 모른다. 부모의 대본과 계획은 그저 판타지였을 수도 있으니.
그리고 부모는 어디까지 무엇을 도와줄지 고민할 필요가 없음도 알게 된다. 정말 도움이 필요할 때는 아이가 먼저 절실하게 도움을 청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가 표현하기 전 부모는 아이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관찰하고, 그 필요를 채워줄 준비를 평소에 하고 있어야 한다. 언제든 도움을 줄 5분 대기조처럼... 대기만 하다가 허탕치는 경우가 더 많지만, 그 허탕은 아이들이 스스로의 주도성으로 채워가며 독립을 이뤄가는 과정이니 부모로서 다소 섭섭하고 허전하고 무력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흐뭇하게 독립을 응원하고 기뻐할 이유가 된다. 도움을 자주 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 무관심하면 아이들도 마음을 열거나 도움을 청하지 못하게 되니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교육 걱정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다정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엄마라는 윤리의 준칙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다정한 무관심
바로 그거였다. 부모의 무관심은 귀찮음의 발현이 아니라 사랑으로 애쓰는 다정함이었던 것이다. 무관심하기만 하다면 아이들이 부모에게 기대는 일은 없을 거다. 거리를 존중하고 선택을 존중하고 실패할 권리도 존중하면서도 언제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자리에서 다정함으로 기다려주는, 정말 어려운 역할을 부모들은 하고 있다.
정시파이터를 선언한 동기에게 따뜻한 위로의 전화를 해주지 못했다. 요즘 목상태가 안 좋아서 묵언수행처럼 관리하고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아이에게 느끼는 부모의 마음 못지않게 사실 내가 친구를 도움을 줄 수 없을 거라는, 내 위로가 가닿지 않을 거라는 무력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해결책이 아니라 나중에 속상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속상함은 한 번의 위로로 종결되는 것이 아닐 것이니, 친구의 마음이 좀 더 정리가 되고, 내 목상태도 좋아지면 내가 먼저 전화를 해줘야겠다. 힘내라 친구야...
의외로 정시파이터 부모는 일상이 편할 수도 있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고3이라고 해도 결국 가는 데까지만 가면 되는 거니 부모가 욕심낼 것이 아니라 아이가 욕심내도록 내버려 두면 되는 것이니. 끝까지 가본 길이 도저히 본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결과라면 그때 가서 아이의 재수의 결정도 존중해 줄 수 있다. 재수도 부모의 강요로는 대개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없으니...
물론 수능이 다가올수록 부모의 입장도 마냥 편하지는 않지만... 그저 아이가 힘들어할 때 같이 아파해주는 것만으로, 그 이야기를 조건 없이 들어주고 판단하지 않으며 무언의 격려를 보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큰 애가 수능 볼 때도 난 이렇게 선언했다.
“넌 시험장에서 너의 수능 스토리를 완성해라. 아빠는 그 시간에 너 덕분에 드디어 수능 감독 빠지게 된 자유를 만끽하며 잘 놀고 있을 테니.”
아빠가 하루 종일 너를 위해 교문 앞에 서서 응원하겠다는 말보다 그 말에 아이가 더 마음 편할 거라는 믿음으로...
내 친구처럼 이런 고민을 하고 속상했던 부모는 대개 아이를 위해 그동안 헌신적으로 너무 애썼던 유형이다. 그래서 난 이렇게도 말해주고 싶다.
이제까지도 정말 애썼고 고생 많았다고. 너 덕분에 아들이 이렇게 잘 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해낼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