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최전선 - 은유

by 청블리쌤

은유 작가의 놀라운 글쓰기 강의 책이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에 설득당하고, 어떻게든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고, 이왕이면 진정성 있는 좋은 글을 쓰는 데 실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정말 훌륭한 책이다. 소장하면서 한 번씩 참고해도 좋을 것 같다.


버릴 내용이 없어 발라낼 수 없는 느낌이 들면서도 모든 내용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심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 더 강력한 울림이 있었던 글만 추려보았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외적 원인에 휘말리고 동요할 때, 글을 쓰고 있으면 물살이 잔잔해졌고 사고가 말랑해졌다. 글을 쓴다고 문제가 해결되거나 불행한 상황이 뚝딱 바뀌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줄 한 줄 풀어내면서 내 생각의 꼬이는 부분이 어디인지, 불행하다면 왜 불행한지, 적어도 그 이유는 파악할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후련했다. 낱말 하나, 문장 한 줄 붙들고 씨름할수록 생각이 선명해지고 다른 생각으로 확장되는 즐거움이 컸다. 또한 크고 작은 일상의 사건들을 글로 푹푹 삶아내면서 삶의 일부로 감쌀 수 있었다. 어렴풋이 알아갔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 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다. 상황을 바꿀 수는 없지만 상황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바꿀 수 있다. 막연한 생각으로가 아니라 글을 통해 구체화되고 질서가 부여되며 그 실체가 객관화되는 작업이라는 이야기다. 이런 글이라면 누군가에게 보여줄 의사가 없어도 습관처럼 써야 한다.

학생들에게도 자주 말한다. 고민이 있으면 일단 써보라고. 완결을 향하지 않더라도 글로 나열되는 그 자체가 해결의 방향을 향해 있다고...



일상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그런 기회는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글쓰기라는 장치를 통해서 나를 세속화시키고 호기심을 무디게 하는 것들과 잠시나마 결별할 수 있으니, 관성적 생활 패턴에서 한발 물러서는 기회만으로도 글 쓰는 시간은 소중하다.
『1984』의 저자 조지 오웰은 “인간이 물질세계는 탐사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탐사는 하지 않으려 한다”며 “인간은 자기 삶에서 단순함의 너른 빈터를 충분히 남겨두어야만 인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여행은 일상에서 의도적 멀어지기다. 시간과 공간의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래야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일상이 더 잘 보이기도 한다.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내 경우, 글쓰기는 여행의 상위 호환 도구다.




누가 읽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전반적으로 글에 열과 성이 깃든다. 나는 글쓰기를 더 적극적으로 나누려고 블로그를 시작했다. 인터뷰 원고를 올리고 시를 읽고 글을 쓰고 철학을 공부하고 요점을 정리해서 글을 남겼다. 하나 둘 독자가 생겼다. 블로그에 흐르는 침묵의 공기는 훈훈했다. 처음에는 써놓은 글을 올리려고 블로그를 만들었지만 나중에는 블로그가 있어서 거기에 올리려고 글을 썼다.


딱 내 이야기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게 블로그는 글이 아닌 영어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정리해서 나누는 공간이었지만, 그 공간에서 나의 이야기가 어느샌가 자리를 잡게 되었고 지금은 영어라는 매개 없이도 나의 이야기를 쓴다. 나의 글을 올리는 플랫폼이 블로그이고 브런치지만 작가의 말대로 그 플랫폼 때문에 글 쓸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게 된다. 일단 준비되지 않았어도 시작하고 볼 일이다.



좋은 글은 울림을 갖는다. 한 편의 글이 메아리처럼 또 다른 글을 불러온다. 글을 매개로 남의 의견을 듣고 삶을 관찰하다 보면 세상에는 나와 무관한 일이 별로 없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균형 감각이 발달한다. 이는 삶에 이롭다. 인간은 아는 만큼 덜 예속된다.

글을 통해 우리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난다. 한 사람과의 만남도 세계를 만나는 일인데, 책과 글을 통해 우리는 세계를 선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배려를 배울 수 있다. 아래 작가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매 순간 모든 존재를 상식적으로 대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는 대인배로 살 수 있다. 이를 두고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충분히 배우고 우리의 눈과 귀를 충분히 연 경우 언제든 우리의 영혼은 더욱 유연하고 우아하게 된다.”


작가는 세상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했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원래부터 작가라서 지식인의 본분으로 세상에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세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작가라는 뜻으로. 그래서 작가가 되기는 쉬워도 작가로 살기는 어렵다. 엄밀하게 말하면 작가라는 말은 명사의 꼴을 한 동사다. 작가는 행하는 자, 느끼는 자, 쓰는 자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언어로 세공하고 두루 나누면서 세상과의 접점을 넓혀가는 사람이다. 세상과 많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감각과 지혜가 많아지는 법이니, 그렇게 글쓰기는 존재의 풍요에 기여한다.




딱 이만큼이다. 생의 모든 계기가 그렇듯이 사실 글을 쓴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전부 달라진다. 삶이 더 나빠지지는 않고 있다는 느낌에 빠지며 더 나빠져도 위엄을 잃지 않을 수 있게 되고, 매 순간 마주하는 존재에 감응하려 애쓰는 ‘삶의 옹호자’가 된다는 면에서 그렇다


글의 한계지만 그 현실적인 한계가 막연하지 않은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회복시키기도 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지 않는다. 그저 일상의 글과 쓰기를 통해서 우리의 세계를 확장해간다. 그래서 오히려 우리는 아래 작가의 말처럼 자신과 삶의 한계를 넘어선다.




글쓰기는 ‘나’와 ‘삶’의 한계를 흔드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삶’은 하루하루 똑같은 일상의 지루한 반복이다. 기쁨과 슬픔을 자아냈던 대소사의 나열은 삶의 극히 일부분이다. ‘나’의 범위 역시 피와 살이 도는 육체에 한정되지 않는다. 정신의 총체이기도 하며 관계의 총합이기도 하다. 나는 나 아닌 것들로 구성된다. 내가 쓰는 언어를 보자. 그간 읽었던 책, 접했던 언론, 살았던 가족, 만났던 애인, 놀았던 친구의 말의 총합이다. 깊은 밤 빗소리에 홀로 상념에 젖어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면 그것 역시 ‘비’라는 자연 현상이 마음을 건드린 덕분이다. 한 개인의 사생활도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남의 경험이 내 경험에 들어 있듯, 내 경험도 남의 경험에 연루되어 있다. 글쓰기에서 공과 사라는 영역은 그렇게 서로 유동하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삶이란 ‘타자에게 빚진 삶’의 줄임말이고, 나의 경험이란 ‘나를 아는 모든 나와 나를 모르는 모든 나의 합작품’인 것이다. 누구도 삶의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 없다는 사실과 경험의 코뮨적 구성 원리를 인식한다면, ‘경험의 고갈’이라는 난감한 사태는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닐까.



일단 쓸 것. 써야 쓴다.
무능력에서 출발하면 글은 영원히 쓸 수 없다.
아무리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껴져도 자기 능력에서 출발하기. 일단 써봐야 어디까지 표현이 가능한지, 어디가 약한지, 어디가 좋은지 볼 수 있다. 글쓰기 초기 과정은 ‘질’보다 ‘양’이다.



글쓰기도 공부도, 세상의 어떤 일도 다 그렇다. 무능력의 느낌과 비교행위로는 늘 그 자리일 수밖에 없다. 자기의 출발점, 자기의 능력, 자신만의 속도, 그리고 오버페이스 없는 지속성... 축적된 것만큼 출발점에서 멀리 가 있게 되고, 어느 순간 자신이 원했던 수준에 와 있음을 놀라움으로 조우한다.




혼자 쓰고 혼자 읽고 혼자 덮는 것은 일기다. 글쓰기가 아니다. 비밀이 한 사람에게라도 발언할 때 생겨나는 것이듯 글쓰기라는 것에는 어차피 ‘공적’ 글쓰기라는 괄호가 쳐 있다. 그래서 글쓰기는 곧 남들에게 보여지는 삶, 해석당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버리는 일이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말라고 다그치듯 말할 수도 없다. 몸에 들러붙은 그것이 쉬이 떨어진다면 왜 고민이겠는가. 고통이란 원래 사회적 의미망에서 생겨난다.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 되어버린 상태인 것이다.


공적 글쓰기는 남들이 바라는 자아의 모습에 매몰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의미가 있는 건, 그런 위험을 무릅쓰지 않으면 자아의 변화와 성장은 한없이 더뎌질 것이기 때문이다. 공적 글쓰기를 통해 우리는 강요되고 억압된 가면을 벗기도 한다. 악플이나 좋아요 숫자 등에 상처받는 것은 모두가 자신을, 자신의 글을 다 좋아할 것이라는 오만함과 착각에서 비롯된 자기연민이다. 남을 해칠 의도가 없고, 불편하게 하는 글이 아니라면 자신의 솔직한 모습에 주저할 이유는 없다. 아래의 작가의 말을 보면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다.



먼저 느낀 대로 말하고 쓰고, 그 생각을 공적인 장에 내놓아 외부에서 검증받고 소통하면서 어떤 사건에 대한 해석을 바꾸어나가는 것. 그러니까 다른 (생각을 가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의 기록이 글쓰기의 본령이다.


또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과도한 주인공 의식’을 글쓰기에서 버려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문제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 문제를 두고두고 기억하고 되새기고 ‘색안경’으로 타인을 바라볼 만큼 부지런하지도 한가하지도 않다. 자신의 현안에 가려 남의 일은 뒷전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존재 개방의 수위를 고민하다 보면 자기 몰입이 어렵다. 좋은 글이 나오려면, 타인에게 비친 나라는 ‘자아의 환영’에 휘둘리지 말고 자기감정에 집중해야 한다. 자기 검열, 사회적 검열에 걸려 넘어지면 글을 쓰기 어렵다. 대개는 자기가 자기를 대하는 태도로 남을 대한다. 만약 누군가 자기 과거를 부끄럽게 여긴다면, 유사한 삶의 경험치를 가진 타인을 동정과 수치로 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인의 시선을 극복하는 과정은 자기의 편견을 넘어서는 일이기도 하다.



자기 색깔을 보여주는 것은 창작자의 임무이다. 창작 분야 종사자 중 ‘대체 가능한 존재’는 살아남지 못한다. 내가 아니어도 남이 할 수 있으면 그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내가 쓰는 글은 나만 쓸 수 있어야 한다. 박완서의 글은 김훈이 흉내 낼 수 없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썼을 뿐이며, 남들도 다 쓸 수 있는 것을 삼갔을 뿐이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쓸 때 꼭 염두에 두는 말이고 학인들에게도 자주 당부하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학식이 높은 사람, 문장력이 탁월한 사람, 감각이 섬세한 사람, 지구력이 강한 사람 등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많고도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이미 훌륭한 글이 넘치므로 나는 글을 써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내 삶과 같은 조건에 놓인 사람,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 나의 절실함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글은 나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또 기운이 난다. 글을 써야 하는 이유다.


사실은 없다. 해석된 사실만이 존재한다. 내가 만약 어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괴롭히는 대상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가는 보편적 관점을 변화시키고, 알고 있는 것의 지평을 변화시키고, 약간 옆으로 비켜서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경험을 했을 때 다른 시각으로 생각하고 내 진짜 느낌에 집중하려는 노력이 글을 참신하게 한다. 어떤 글이 읽힌다면, 독자의 눈길을 붙들었다면 그것은 진부하지 않다는 뜻이다.
또 흔히 나는 글재주가 없다, 개성이 없다고 말하는데 많이 써보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나의 삶을 숙고하고 나의 경험을 나의 언어로 말하는 훈련을 반복하기 전에는 글재주와 고유성은 드러나지 않고 드러날 수도 없다.


글을 쓰는 능력을 문장력이라고 하지만, 문장력의 정도만으로 좋은 글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다. 글쓰기를 망설이는 것은 넘사벽 같은 전문 작가의 영역에 도전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가수가 아니라도 노래를 하고, 주변의 사람들과 느낌을 공유한다. 사람들이 나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나의 노래를 듣고 싶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가창력이 뛰어나다고 모두 그 노래를 듣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는 우리만의 노래를 한다. 취향을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노래는 소수의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것으로 그 목적을 이루었다. 아니 그 목적도 덤으로 얻어진 예기치 않은 보너스일 뿐이다. 나는 다른 사람의 노래가 아닌 나의 노래를 부르는 그 자체로 이미 목적을 다 이룬 것이다.




글쓰기는 파편처럼 흩어진 정보와 감정에 일종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주제’를 부각하는 행위다. 단계가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 일단 쓰기. 어지러운 생각들을 자유롭게 마구잡이로 풀어놓는다. 그리고 편집하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판단해서 덜어내고 보완한다. 행동 표정 대화를 떠올리고 그대로 묘사하여 글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런 식으로 차분히 앉아서 하나씩 써나가는 거다. 내가 쓰고자 하는 화제에 대한 사전적이고 교훈적인 정의를 내리기, 가령 여자에게 커피 심부름 시키지 맙시다가 아니라 ‘나에게 그 화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나의 경험의 의미는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 글 쓰는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얼마 전 포스팅한 <메이커스 랩>이라는 책이 떠올랐다. 작가들조차 결말을 정하지 않고 일단 시작한 스토리에서 자연스럽게 결말이 완성되도록 둔다는 대목이 있었다. 글쓰기 개요와 기획이 출발 단계에서 어느 정도 필요할 수는 있으나 완성수준의 고민과 구성을 미리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시작해서 흐름에 맡기면 된다. 나도 내가 쓴 글을 보고 놀랄 때가 있다. 시작 전에 생각조차 못 했던 것들이 글 안에 들어와 있을 때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니 이제는 완결과 완성에 대한 부담 없이 일단 시작해 본다. 어차피 완결되지 않을 글은 자동으로 멈추게 되어 있다.




생각을 멋있게 쓰는 것은 좋은 글이 아니다. 말이 장황해지고 설명하거나 강요하는 어조가 된다. 가령, 학인들이 과거를 성찰할 때 자주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내 삶은 내 나이와 어긋나고 있었다” “실존적인 고민이 시작되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의 삶을 살고 싶다” 등등. 이런 표현은 일반적이고 모호하다. 한 사람의 고유한 개성과 상황을 느끼지 못하면 독자는 글에서 멀어질 뿐이다. 처음 보는 사람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내 앞에서 한숨만 쉬고 눈물만 닦고 있는 격이다. 그보다는 한 대로, 본 대로, 느낀 대로 구체적인 줄거리를 써야 한다.
“국토 종단 자전거 여행 이후 나는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이런 문장은 설명하는 문장이다.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든지, 표정이 밝아졌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든지, 걸음걸이가 느려졌다든지, 말수가 적어졌다든지 등등 일상의 다각적인 측면에서 예시를 들어줄 때 독자는 알아차린다. 필자가 자전거 여행 이후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작가에 따르면 멋있게 쓰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결말에 급급하거나 너무 여백 없이 설명을 하려고 애써도 안 된다. 글을 읽는 사람의 몫도 남겨두어야 하는 것이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디제이가 사진을 붙여놓듯이 내 글을 들려주고 싶은 구체적 대상을 정하고 써야 한다. 그래야 글이 어떤 상황 속으로 들어가서 살아 있는 이야기가 풀려나온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과 주례사가 재미없는 이유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말들이 특정 개인에게 와닿을 리 없다. 공부 열심히 해라, 사이좋게 지내라, 부부가 대화를 많이 해라, 서로 이해해라 등등. 그 사람이 처한 상황과 조건을 배제하고 나오는 말들은 공허하다. 듣는 사람에게 공감의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는다. 버스나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사연이 재미있는 이유는 반대다. 깨알 같은 상황 묘사와 인물 묘사와 대사가 살아 있어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다.


내 글이 누구에게 가닿길 바라는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먼저 걸어가고 느낀 자로서 무슨 이야기를 건넬까. 그런 물음에 대한 응답 장치가 사진 한 장 붙여놓고 글을 쓰는 일이다. 좋은 사연을 들려주고 좋은 음악을 틀어주는 디제이처럼 글쓰기도 나와 닮은 영혼에 말 걸고 위로를 건네는 일이다.



너무 뻔한 이야기는 안 하는 게 이롭다. 지루함은 뻔한 예상에서 발생한다. 유머의 속성 자체가 예상치 못했던 반전과 뻔한 것에 대한 뒤틀림이지 않은가.




“나보다 더 잘 쓸 수도 없고 더 못 쓸 수도 없다”는 말은 잘 쓰고 싶은 욕심에 눈앞이 흐려져서 문장이 한 줄도 나아가지 못할 때 특효약이다. 얼마나 명확한가. 나의 역능만큼 써진다는 엄정한 진리. 영감 가득한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채워진 글은 날로 기대하지 말라는 일침. 뭔가 전율을 가져오는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이뤄진 글은 갈망의 산물이 아니라 습작의 결과다.
그냥 나는 나의 글을 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이야기로...

직업과 역할의 통념에 눌려 있던 예술가적 본성을 회복할 때 누구나 좋은 필자가 될 수 있다. 좋은 글은 그 자체로 다른 생각의 자리, 다른 인격의 결을 보여준다. 글은 삶의 거울이다. 글은 삶을 배반하지 않는다. 그것이 글 쓰는 사람에게는 좌절의 지점이기도 하고 희망의 근거이기도 하다.


글은 문장력이 아니라 삶으로 쓰는 것이다. 삶으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대로 삶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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