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자유의지 관점으로 바라본 자기주도학습

by 청블리쌤

(오늘 주일예배 설교를 들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정리함. 신앙적인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음.)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의미다.

강제성을 부여해야만 무조건 순종하게 되는 인간의 모습을 원하지 않으신 것이다. 그런 모습이라면 인간이 아니라 기계를 만든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누르면 “I love you”라고 말하도록 설계된 인형의 사랑고백에 감격하면서 외로움을 벗어날 사람은 없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사랑고백을 들었을 때, 그 마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때 그 기적 같은 황홀함으로 전율하고 감격하는 것은, 사랑고백을 듣지 못할 더 큰 가능성을 넘어선 자발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순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자발적인 순종의 기쁨과 행복이 훨씬 더 크고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기쁨은 창조주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큰 기쁨이고 행복이라는 것에도 의미가 있다.

강제성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진심이 가려진 채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완벽함은 진짜 완벽함이 아니며, 그로 인해 온전히 행복해하거나 감동할 수는 없다.


성경적 자유의지를 교육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았다.

공부하는 것도 자유의지를 주어야 궁극적으로 더 온전한 단계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자기주도학습이라는 것은 실패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좌절 속에서 자기효능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아예 실패의 과정을 건너뛰려고 하는 것이 사교육의 속성 중 하나다. 불안함에 대한 마케팅이 성공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학교에서 개인적으로 실시하는 영어멘토링 과정에서 멘토인 내가 강제성을 최소화할수록 학생들의 만족감은 더 높아진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학원 숙제를 하면서 책을 끝낸 것보다, 안 해도 되지만 굳이 스스로 하면서 끝낸 책 한 권에 학생들은 더 감격해했다. 역설적이게도 멘토인 내가 한 일이 더 없었고 강제성도 없었기 때문에 학생 스스로 책을 끝내고도 내게 백 번이라도 절을 하고 싶다는 감사의 표현을 하기도 했다.


오래전 한 여고에서 수업 시간에 단어테스트를 했다. 불특정 학생들을 “너”라고 가리키면서 영어단어 뜻을 묻는 식으로 테스트했기 때문에 “너너테스트”로 알려졌다. 테스트 통과를 못 하면 재시험을 쳐야 했다. 그다음 수업시간 되기 전까지 교무실의 나에게 찾아와서 역시 구두로 단어시험을 쳤다.

수업 들어가는 15개 반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에 재시응시하는 학생들이 끊임없이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교무실 문에 “교무실에서 정숙”이라는 경고문이 붙었다. 난 직감했다. 그 경고문을 아이들이 아니라 나를 향한 메시지였다는 것을...

아이들이 재시를 통과할 때의 기쁨으로 괴성 가까운 소리를 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른 선생님들 방해될까 봐 복도에 나가서 했는데도 아이들의 그 기쁨의 소리를 잠잠케 할 수 없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테스트를 자발적으로 와서 자신의 노력으로 통과한 그 성취의 기억은 아이들이 평소 공부할 때에도 동기와 힘이 될 것이라고 난 확신했다. 실제로 아이들은 나의 이 단어시험 시스템을 귀찮아하지 않고 재미있어하면서 내게 감사하기까지 했다. 고3이라서 2학기가 다가와서 중단했을 때에도 오히려 계속해 주면 안 되냐는 요청이 쇄도하기도 했다.

물론 따지고 보면 완전 자발성을 부여한 것은 아니었다. 수업시간 너너테스트도 처음부터 아이들이 요청한 것이 아니었고, 다음 수업 시간까지 재시를 하라는 것도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재시를 통과하지 못하면 재시를 또 와야 했다. 끝까지 재시에 응시하지 않아도 불이익도 제재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음에도 아이들은 재시에 진심이었다. 아이들은 영어시간을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설렘으로 맞이했다. 자신이 지적받을지 몰라서 설레했고, 지적당했을 때 맞힐 수 있을지 몰라서 설레했다. 틀릴 수도 있는데 맞혔을 때 그 기쁨은 재시가 아닌 첫 시험에서도 학생들이 스스로 누리는 행복이었다. 틀렸을 때도 다시 기회가 주어지니 당장 좌절할 이유도 없었다. 재시라는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결국은 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열심히 노력해도 시험성적으로 바로 보상받지 못할 경우 아이들은 노력을 이어가기 힘겨웠을 텐데, 당장 할 수 있는 사소한 단어테스트를 통해 단어 학습에 대한 성취감을 자신감으로 이어갈 기회를 얻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유의지를 주고 강제성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완전히 자신의 자발적 의지로 개척해나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세상이라는 무대를 주셨다. 창조주의 역할이 있어야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자유의지도 자발적인 노력도 최소한의 여건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런 최소한의 기회나 무대를 준비해 주는 것이 교사와 부모의 역할이다. 준비 안 된 아이들을 향해서 때로는 강제성을 좀 더 발휘해야 할 때도 있지만, 본질적으로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은 아이들 본인이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이 혹 실패를 겪으면서도 그 무대를 통해 온전한 성취를 하고 그 자기효능감에 따른 성취감이 이어지면서 자신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 성취의 기억이 축적되어 자신감을 갖춘 아이들은 이후의 그 어떤 어려운 기회에서도 두려움 없이 묵묵히 도전을 이어간다. 도전은 실패를 전제로 한다. 그 도전은 보장하는 것이 없음에도 끝까지 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도전을 이어갈 자신감은 자발성으로만 발현된다.


인간의 자유의지로 죄를 선택했더라도 회개와 회복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 신앙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순종하지 않을 자유가 있음에도 자발적으로 순종했다는 참 기쁨의 성장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절망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실 거라는 확신이 막연한 불안감과 두려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아이들도 자신들의 선택으로 인해 좌절하더라도 변함없이 응원해 줄 교사와 부모의 믿음과 응원으로 두려움과 불안함을 이겨낼 수 있다.

결국에는 강제성이 전혀 없는 곳에서도 스스로 자발성을 발휘하며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자립성을 갖추게 될 것이다.

강제성은 당장의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하지만, 한계가 분명히 있으며, 누구도 그 초보 단계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립은 자발성으로만 이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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