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고생의 흔한 아날로그 감성 2

by 청블리쌤

내가 이렇게 학생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기억날 때마다 눈물이 나려 한다. 아직도 난 영어교사로서 계속 성장중이어서, 젊은 시절 내게 영어를 배웠던 학생들은 부족한 영어교사를 만나야했을 것임에도, 그런 부족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좋아해주고 따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모든 학생이 다 그러진 않았지만 내 능력과 내 인격의 크기를 훨씬 넘어서 흘러 넘칠 정도로 너무도 많은 학생들이 그랬었고, 이 학생처럼 그런 호의를 표현해준 학생들도 많았다는게 논리적 추론으로는 설명이 불가능ㅎㅏ다. 그래서 더 은혜롭고, 더 감동이고 그 덕분에 내가 교사로서 늘 힘을 낼 수 있었던 거다. 세월이 많이 흐른 아직까지도...

난 아이들에게 뭔가를 주려 만났는데 오히려 더 많이 받고 있었고 더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땐 넘치는 아이들의 사랑 속에서도 난 제대로 감사하지 못했다. 때로는 내가 멋있어서, 내가 뭔가를 잘해서,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사랑받고 있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훌륭한 교사"라는 실체가 아니라 "좋은 학생들"만 있었을 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교사는 학생들의 열정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

나를 스쳐간 모든 학생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지난 글에 이어지는 이야기...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과 행동과 상황.. 그 의미들..>

- 2003년 졸업식 마치고 썼던 글

영화 <메멘토>는 우리에게 충격에 가까운 생각거리를 던져주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이란, 어찌 그리 부정확한지.. 우리 마음대로 기억을 변형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유리하게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겠죠.

기억은 기록(record)이 아니고 해석(translation)이라는 것..

그렇게 이 영화는 우리의 기억에 대한 맹신을 뒤집어 엎는 영화입니다. 영화의 전개 형식도 기존의 우리 상식을 뒤집습니다. 시간의 흐름으로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전개합니다. 결과만 놓고 보면 관객들은 아무도 그 행동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 둘 씩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그 행동이 의미를 갖게 되고 이해도 하게 되는 거죠.

그게 기억상실증에 걸린 영화 속 주인공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저는 이번 해에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과분하게도 많은 학생들에게 사랑받았는데요..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런데 그 목록을 완성할 수 없었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secret admirer 때문이었죠.

분명 뭔가는 있었는데, 누군지는 알 수 없었던...

생각지도 못하게 졸업식 때 그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그 기억은 그 실체를 얻게 되었습니다. 의미를 갖게 되었고, 또 이해가 되기 시작한 거죠.

그러고 나서 시간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보니 그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에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암시나 신호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밝혀지지 않는 경우에.. 얼마나 많은 순간을 그냥 의미를 모른 채 보내게 되는 건지.. 누군가는 내게 의미를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을 했는데, 그냥 지나쳐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지..

좀 더 살펴야겠습니다. 주변을..

특히 학생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학생들의 말과 행동에 나타난 암묵적인 의미를 세심하게 잡아내서 그들을 대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것이 행복의 메시지이거나, 절망 속에서 소리 없이 외치는 도움을 청하는 호소이거나, 그 무엇이든 간에 말이지요.

그의 생일이었습니다. 학교에 갔다가 자전거 타고 가는 도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의 친구가 누구 생일인데 맛있는 거 사 주세요..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것도 망설여졌지만.. 너무도 당돌한 요청에 호의적인 대답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많은 학생들 중에서 어찌 누구 생일만 따로 챙길 수 있겠냐는 생각까지 들어서 말로만 축하인사를 건넸었는데.. 알고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였지요.

수능 치기 전날.. 그의 친구가 그를 굳이 제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시험 잘치라고 악수한 번 해주셔야되어요. 라는 거의 강제 비슷한 요청.. 그리고 격려를 해주었던 일.. 그것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때로는 오히려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음을.. 더 많은 말을 담을 수 있음을..



그리고 졸업식 때 받은 그 학생 편지의 일부

선생님께

사실 처음엔 고3 생활에 억눌려 있던 호기심과 장난기의 발동으로 시작했는데...

두번째. 세번째 자꾸 자꾸 할수록 '나도 선생님 진짜 좋아하는데...' 하는 마음이 선생님께 전달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모르셨죠?

선생님이 모의고사 감독들어오셔서 저한테 'thank you' 한마디 던지시는 바람에 저 그 시간 시험 완전 망쳐버린 거...;

선생님이 야자감독 맡으셔서 이리저리 지나다니시면, 선생님 뒷모습 한 번 쳐다보려고 힐끔 힐끔 뒤돌아 봤던 거...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는 다른 애들 (많죠?ㅋㅋ) 이랑은 다르고 싶어서 선생님 좋아하는 거 티 안낼려고 무지 노력했던 거... ^^;)

어느날 선생님 홈피에 I can find out who is the secret admirer! 라는 문장 올라와서 혹시나 진짜 들켜 버릴까봐 가슴 졸이며 수업들었던 거....

선생님 생일 날도 바나나 우유 정말 단출(?!) 하게 모아놓고 선생님이 기뻐했으면 좋겠다고 막 바랬던 거...

수능 전날 선생님이랑 악수하고 엄청 기뻐했던 거...

아~ 지금 이렇게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놓고 선생님께 제 정체를 밝히려고 하니 참!!! 부끄럽네요~ 하하핫 ^^;)

저는! 3학년 *반!! *번!!! *** 입니다 ^^;;

놀라셨죠? 그냥 매일 심화수업 늦고, 싸가지? 좀 없고... 맨날 걱정만 많고... 그런 학생인 줄만 아셨을 터인데 - ^^; (아~ 엄청 쑥스럽네요->

제가 마지막에 와서 저의 정체를 밝히는 건.

좋은 추억 만들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

맨날 **이랑 둘이 손 꼭 붙잡고 발 동동구르며 "쌤 너무 좋아!" 하면서 서로 웃고 했던일이며, 아무도 모르게 선생님 자전거에 포스트 잇 붙인다고 우리 L.O.M (Lack of money '레꼽머니' 선생님발음 ㅋㄷㅋㄷ) 친구들 야자쉬는 시간마다 쫓아나와서 망보고 붙이고 했던 일이며...

훗날 어른이 되어 고3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련히 추억의 앨범 속에 고스란히 꽂혀있을 사진들입니다.

제 여고시절 이상형으로 자리매김 하셨던 선생님!

그동안 저의 장난아닌 장난으로 혹시 신경쓰이셨다면 죄송하구요. 아까도 말씀 드렸듯이 좋은 추억 속의 한 사람이 되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대학가고 선생님을 찾아뵈었을 때도, 언제나 늘 저로 하여금 흥분토록 (ㅋㅋㅋ) 하셨던 감미롭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온화한 미소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선생님. 샬롬! ^^;;

From. secret admirer, ** 올림



이 학생은 졸업하고도 나를 찾았다. 그리고 대학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다들 놀랐고 낭만적이라고 부러워하는 친구들도 있었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 학생에게는 대상이 누군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거다. 그저 힘든 시기에 자신의 진심을 담아 표현할 수 있는 대상이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을까?

나와 소통을 하며 지냈던 애들은 졸업하고도 나를 찾아왔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걸 사줄 예산을 따로 떼어 놓을 정도였다. 어떤 아이는 교육특구 출신 친구랑 대화하면서 자기는 졸업하고도 선생님과 연락한다는 말에 굳이 왜 그러느냐며 신기해 한다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교사와 학생인 그 시간과 관계에만 충실한 것이었겠지. 그러면서 내 역할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긴 했었다.

그런데 이후 교육특구의 학교에서도 난 졸업생을 맞이했다. 그러니 학교 간의 차이는 아닌 것 같다.

이 학생이 메모를 남긴 해에는 특히 소위 열성팬들이 많았다. 내가 고3 담임을 계속 해도 되는지 망설일 정도로... 아이들은 내게 이메일이나 홈페이지 방명록으로 팬임을 인증했고, 수시로 내 책상위에 간식이나 꽃을 두곤했다.

지금은 아이들이 내게 와서 먹을 거 없냐고 묻고, 없다면 화를 내지만 그때는 아이들이 자기 비상식량까지 털어주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ㅠㅠ 덕분에 지들은 살 빠지고 나는 계속 찌고 ㅋ ㅋ 어떤 애들은 맛있게 드셨냐고 꼭 묻고. 그때부터 내 허리사이즈가 달라졌던 것 같다 ㅋ ㅋ

지금은 아이가 건네는 사탕 하나도 김영란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받을 수 없다. 그래도 난 사탕 하나 정도는 받는다. 사탕 하나가 먹고 싶어서가 아니라 법이라는 명목으로 아이의 진심을 무안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대놓고 팬을 자처하면서 내게 말을 걸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했는데 이 학생은 차별화된 노선을 취한 거였다. 정말 대단한 건, 그 비밀을 졸업식 때까지 본인과 친구들끼리만 간직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졸업식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다. 그 기다림은 그 때도 특별했지만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은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이 학생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심화수업도 듣고 수업시간에 계속 몰입하였으며 나와의 거리를 두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근데 눈에 보이지 않았던 적극성의 퍼즐이 극적으로 이미 맞춰지고 있었다는 것이 소름 같은 반전이었다.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던 지난 번 포스팅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전개였다. 그러나 졸업식의 편지 덕분에 추억은 완성되었고 엔딩을 갖게 되었다.

추억은 현실과의 단절인 것인데 이미 세월의 긴 흐름으로도 완벽하게 봉인된 추억이 되었다.

"**아 너의 편지글처럼... 어른이 된 지금, 이 때 일이 아련히 추억의 앨범 속에 고스란히 꽂혀 있는 거니?"

* 이 학생은 졸업 후 교대에 진학했고 지금은 학생들의 큰 사랑을 받는 훌륭한 선생님이 되어 있을 거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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