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

by 청블리쌤


좋아서 쓰는 글과 의무적으로 쓰는 글이 있다.

난 의무적으로 쓰는 글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어쩌다 실수로 책을 한 번 내면서, 월간지에서 의뢰받은 원고 마감을 몇 번 겪어보긴 해서 그게 어떤 느낌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기는 하다.


강연을 하는 것도 마감을 앞둔 글쓰기와 비슷하다. 실제 강연원고를 제출하기도 하지만, 강연을 위해 PPT 자료를 만드는 것 자체가 마감 글을 쓰는 흐름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마감이 영감"이라는 말을 난 신봉하지 않았다. 걱정과 불안지수가 높은 방어적 염세주의자인 난, 그래서 학창 시절 철저한 시험 대비 덕분에 성적은 좋았지만, 뭐든 빨리 해치우고 끝내려는 강박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뭐든 빨리 서둘러서 마감 전에 끝내려는 평소의 모습은 부지런함이나 성실함이라기보다 그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는 극단적인 노력이다.


9월에 있을 교사 대상 “글쓰기와 행복교육” 강연을 앞두고 이젠 글쓰기처럼 강연 내용을 구상하고 채워가야 하는데... 보통의 강연 준비보다 이번에는 준비가 많이 늦은 편이다.


한두 달이라도 더 늦게 시작해야 조금이라도 더 발전되고 성장한 나의 삶을 담아낼 수 있을 거라는 게 나의 핑계였다. 실제로 강연 의뢰를 받은 이후 글쓰기 관련 책들을 많이 읽으면서 이전보다는 시각과 관점이 넓어지고 준비할 거리가 늘었던 건 사실이긴 하다.


그런데 마감이 다가올수록 즐거움으로, 쓰고 싶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무조건 해내야 한다는 부담이 자발적 기쁨과 즐거움을 어느 정도는 희생시키는 느낌이다.


이전 강연에서는 미리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한 후 추가하고 수정하는 단계를 여유 있게 했었는데, 이번엔 무게감이 상당하다. 강연 대상이 평일 퇴근 후 저녁 3시간 이상을 기꺼이 투자하시는 열정과 열의가 넘치시는 선생님들이시고, 이미 많은 연구와 탐구를 통해 교육적 가치 실현 등에 전문가들이시기 때문이다. 아직도 내가 어떻게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는지부터가 애당초 이해가 되지 않을 지경이다.


작가 입장에서는 독자를 선택할 수는 없다. 불특정 다수를 향한 자신의 글이 어떻게 가닿을지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건 당연한 일일 것 같다. 그리고 마감을 위한 글쓰기는 의뢰받을 때의 기획의도와도 맞아야 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다 쓸 수가 없고, 하고 싶은 말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하는 과정이라서 더 어려울 것 같다.


책 제목이 일단 글쓰기와 관련 있는 것 같아서 집어 들었는데, 작가들의 쓰기에 대한 솔직한 심경을 생생하게 담은 글이었다.


어떤 분야든 프로는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에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숙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일이라고 매 순간 그 일을 무조건 좋아하긴 힘든 데다가, 그게 특히 창작 분야라면 자신이 마음먹은 타이밍에 맞춰 원하는 창작물이 제때 나올 것이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에 더 어렵다.


그런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가 이 책의 작가들을 글로 만나니 마음속에 약간의 연민에 가까운 공감의 마음도 생겨났다.


한 편으로는 내 마음대로 쓰고 싶을 때 글을 쓰는 아마추어인 나로서는 글쓰기를 생업으로 하지 않음이 얼마나 다행인지를 확인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특히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전고은 작가의 글이 많이 와닿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감은 임박했는데, 아무 생각이 없어서 화면만 보다가 하품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다. 이제 슬프거나 화가 나서 우는 횟수보다 하품을 해서 우는 횟수가 더 많아졌다.



웃픈 이야기였다. 자연스럽게 하고 싶을 때 내가 하고픈 이야기를 쓰는 것이 자발적 즐거움이라면 마감을 앞둔 형식에 맞춘 창작은 눈물 나게 하는 하품이 필요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아침에 정서를 선동하지 않는 솔직한 연주라고 생각하는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차를 마시고 책을 골라서 읽는 의식을 거행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실은 이 의식들을 치르는 가장 큰 이유는 스마트폰을 보지 않기 위해서다. 아침에 일어나 습관적으로 보는 폰으로부터 흡수되는 무차별적인 정보의 과잉은 뇌를 멍청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고,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다. 내 사고의 근육이 없어진 것이 무차별적인 인스턴트 정보의 폭식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무엇을 하기 위해 움직일 때도 있지만, 하지 않기 위해 움직일 때도 많다. 나이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후자가 많아지는 것 같아 찝찝하다. 원래도 많이 가진 것도 아니었던 자유를 더 잃어가는 것 같아서.

어릴 때는 해야 할 것이 많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하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 같이 많아지는 건 억울하다.



우리는 늘 스마트폰과 싸워야 한다. 해야 할 것에 대한 노력이 아닌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투쟁까지 짊어지고 있다는 작가의 고백이 현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우리에게 오히려 큰 위로를 주는 듯하다.


작가는 글쓰기와 연인 같은 밀당을 하고 있었다. 미련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밀고 당기면서 결국은 다른 대안도 없지만 글쓰기를 너무 사랑하여 놓아줄 수 없는 애틋함까지 느껴진다. 예술가의 고뇌를 이렇게까지 친근하게 공감하며 읽은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작아지게 만드는 존재는 결국 피하게 된다. 연인이든 친구든 부모든 그렇다면 본질을 바꿔야 한다. 글과 영화에 대한 거대 판타지를 없애야만 내가 살 수 있다. 계속 사랑을 하려면 사랑에 대한 판타지를 인정하고 없애야만 하는 것처럼 어떤 존재나 가치도 절대적으로 아름다울 수 없다. 기존에 나를 동기화하던 가치관이 효력이 다하였다면 폐기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세우고 나아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을 거라면 과감히 모든 것을 관두고 다른 일을 찾아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는 조금은 더 비범한 줄 착각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슬프게도 그저 평범한 나는 둘 중 하나도 못하고 멈춰 서있다. 결국은 포기할 것을 포기하지 못해 나를 포기하고 사는 내가 정말 의미 없이 낭만적이고, 모순적이다. 결과만 볼 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지만, 이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아직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할 시간이 혹은 미련을 버릴 시간이 그때까지는 가짜라도 쓰고 싶다. 가짜인지 진짜인지도 써봐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는 내가 가장 믿는 것이 글이기 때문이다. 도달할 수 없을지라도 그곳을 향해 사는 것 말고는 현재로서는 다른 방법을 모르겠다.



그리고 얼마 전 소개했던 작가인 이다혜 작가의 글이 있어서 반가웠다.

대비 효율로 따지면 비효율의 끝판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더 읽어야 했다. 영화를 더 봐야 했다.

이렇게 글쓰기를 배우면 글을 쓰고 싶다는 기분 같은 것은 들어설 틈이 없다. 자기 시간을 여유롭게 쓰는 작가도 어디엔가 있겠지만 나는 본 적이 없다. 게다가 기자는 시계를 보며 글을 쓴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마감이 원고를 쓴다'는 유의 농담도 있는데, 마감 직전까지 원고가 없었는데 마감 때가 되니 '어라? 신문이나 잡지가 나왔네?'라는 뜻이다. 초치기 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책이 나와야 한다. 매주 그렇게 마감을 했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법한 마감에 대한 슬픈 사연이다. 결국 일어날 일이지만, 때가 되면 다 하게 되어 있지만 그렇게 하게 되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은 긴장과 압박감을 견뎌야 하는 걸까... 당연한 듯 받아보는 활자로 된 매체에 대한 경외감을 품을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블로그에 허랑방탕한 글을 잔뜩 썼기 때문에 글이 주는 재미를 알았지 싶다. 쓰고 싶어서 쓰는 글, 닉네임으로 쓰는 글. 가격을 따지지 않아도 되는 글. 그 덕에 '잘 써야 한다'에서 '쓰고 싶다'는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글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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