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고생의 흔한 아날로그 감성 1

by 청블리쌤

기다림을 점점 잃어가는 현세대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아날로그 감성의 추억이 떠올랐다. 30대 초반, 첫 여고에서 겪은 잊지 못할 일이다.

난 운전으로 출퇴근을 한 적이 없다. 운전 면허도 몇 년전에 겨우 땄다. 아직 면허를 쓸 일도 없다. 차를 가져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두 학교는 지하철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거리지만, 이전에는 거의 자전거로 출퇴근을 했다.


30대 초반 첫 여고에서 자전거와 얽힌 추억이 많다.

봄이 되어 꽃이 피면 내 자전거는 꽃마차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어디선가 꽃을 꺾어 와서는 자전거 앞 뒤에 꽃으로 장식을 해주었다. 난 학생들의 정성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그 꽃마차(?)를 타고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듬뿍 받으며 퇴근을 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에 벅찬 감동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리고 어느 해 생일에(그때는 김영란법 적용되기 훨씬 전이었으니 오해없으시길) 반 아이들이 내가 타는 자전거가 많이 낡았다면서 자전거를 교실에다 숨겨놓고 있다가 내가 교실로 들어올 때 노래를 불러주면서 내게 선물을 전해주기도 했다. 내겐 과분한 선물이었다. 담임 선생님의 차를 새로 뽑아주다니...


자전거를 선물받은 그해.. 하루는 자전거에 이런 포스트잇 메모가 붙어 있었다.


누군지 모를 학생이 붙인 메모였다. 그저 감성이 풍부한 학생 한 명의 장난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수업 시간에 배운 시가를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 실제로 자전거에 꽃이 꽂혀 있던 걸로 기억한다. 뭔가 아찔했다. 그 의도를 확실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붙었던 세 번째 메시지... 이젠 나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샬롬이라는 인사까지...



그리고 붙었던 메모는 조금 오싹하기까지 했다. 스토킹 당하는 느낌? 이 아이는 나를 지켜보고 있구나. 좋은 마음이든, 아니든... 누군지도 모르는 이런 메시지를 받는 기분이 묘했다. 분명 나에 대한 칭찬이고 학생으로서의 감사가 담긴 마음이며, 진심이 담긴 것 같긴 했다.


어떤 일이 여러 번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은근히 기다리게 되는 듯. 메모가 붙어 있지 않으면 좀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오늘은 뭔가가 붙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메모는 아마 너무 과로해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고, 내 홈페이지에 익명의 학생이 쓴 부정적인 방명록으로 받은 충격 등으로 너무 소심해지고 조심스러워져서 그전에 쏟았던 열정만큼 힘들었던 시기를 한참 겪고 있을 때 붙었던 것 같다ㅠㅠ

눈물나도록 고마웠던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였다. 이번엔 누구인지 밝혔는가 했는데, secret admirer 그러니까 "몰래 짝사랑하는 이"라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힌트만 적혀있을 뿐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악의를 가지고 장난치는 건 아니라는 확신이 들긴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 남겨진... 아마도 마지막 메모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순서와 날짜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위의 마지막 메모 전, 내 생일 때 이 학생은 이번에는 내 자전거가 아니라 교무실 내 자리에 암호같은 포스트잇을 몰래 붙였다. 저녁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도에 표시된 곳으로 되도록 빨리 오라는 메시지였다. 좀 오싹하고 무서운 느낌까지 들었는데... 마침 날 찾아온 졸업생 제자와 함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으로 올라 갔다.


그런데 옥상으로 통하는 인적 없는 꼭대기 층 테이블 위에 바나나우유가 피라미드처럼 쌓여 있었던 거다. 내가 바나나우유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아이들 사이에 퍼지고 있던 때라서(궁금하면 아래 링크) 내가 좋아하는 걸 선물로 준비했던 거였다. 내 생일날ㅠㅠ

그리고 이런 메모가 바나나우유피라미드 위에 붙어 있었다.

오그라드는 멘트였지만, 아마 이 학생은 자신이 상상할 수 있었던 최고의 멘트를 진심을 다해 전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함께 온 졸업생 제자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피라미드처럼 쌓인 실물을 보고 선물로 받은 것이니 나눠주지 말고 혼자 다 드셔야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음 날인가 자전거에 이런 메모가 붙어 있었다.

난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데... 왜 이런 나에게ㅠㅠ

난 학생들을 조건없이 사랑하고 전교생 중 누구 한 명이라도 내게 소중하지 않은 아이가 없다는 마음으로 내 사랑의 크기에 자만하고 있었는데, 이 학생은 날 겸손하게 만들어버렸다. 내가 쏟는 사랑은 내가 아이들에게 받는 사랑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것이라는 걸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 학생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만 않았을 뿐, 그런 마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내게 전달하고 있었다.


부끄럽지만 난 이 학생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으로 국어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전교생의 중간고사 주관식 답란을 보며 필적을 대조해 보기도 했다. 이거다 하면서 일치하는 학생은 없었지만, 비슷해 보이는 필체가 있어서 확신도 없으면서 엉뚱한 학생들 앞에서 자꾸 의식하게되는 민망했던 기억도 난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추궁하듯 묻거나 더 이상 알아내려 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내지 않으려는 학생의 선택을 존중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공개된 장소에서 이렇게 포스트잇을 붙이려면 분명 누군가 목격자가 있었을텐데, 그러면 소문도 자연스럽게 날 수도 있었을텐데 거의 완벽하게 비밀스럽게 일을 진행했다는 것.. 경이롭기까지 했다.

(안들키고 진행할 수 있었던 비밀은 다음 포스팅에서 공개)


그리고 졸업식이 되어 이대로 얼굴없는 학생과의 추억이라고 마음을 정리할 때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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