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고생의 흔한 협박(?) 편지

by 청블리쌤


벌써 20년쯤 지난 일이다. 우리 집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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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먼저 보고 내게 편지를 전해 주었다. 호기심으로 편지를 열어보았는데 안에 이런 사진이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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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악..

사진 속에 비스듬히 넘어가는 게 나였다. 그리고 한 여인(?)이 나에게 격렬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듯 보인다.

맥락 없이 저 사진 컷만 본다면 별별 상상을 다 할 수 있을 문제의 장면이다.

이 사진이 와이프에게 배달이 된 거였다.

내가 처음으로 부임한 여고에서 고3 아이들과 하루 소풍을 간 날의 일이었다.

지금은 각자의 폰으로 셀카를 찍고 바로 사진을 확인할 수 있지만 옛날에는 필름 카메라로 어떤 사진이 찍혔는지 현상하기 전에는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학생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사진 찍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아이들이 나하고 사진을 찍으려고 줄까지 섰었다. 아이들을 위해 포즈를 취해주며 난 서서히 지쳐가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사진 찍자는 아이들을 거부한 기억은 없다.

지금은 선생님과 함께 찍는 것보다, 셀카 각이 안 나올 때 선생님한테 찍어달라는 일이 더 흔해졌다.

위의 학생도 다른 아이들처럼 나와 사진을 찍자고 하면서 내 옆에 섰다. 그리고 난 그 이후의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예고 없이 그 학생이 나를 옆으로 쓰러뜨리는 포즈를 취했고, 사진에서 보다시피 난 모자만 겨우 움켜쥔 채 무방비상태로 뒤로 넘어가고 있다. 이런 상황이 예측되었다면 저렇게 허무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에 저렇게 오해할 만한 설정샷이 나올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고 아예 사진이 찍혔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저 갑작스러운 학생의 동작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어서 놀랐을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즉흥적으로 한 게 아니라 아이들끼리 미리 계획하고 준비했던 이벤트였다고..


위 학생은 내게 특별한 인연이었다. 군미필 상태로 대학졸업 및 임용 합격 후 바로 교직에 나가서 대학원 마칠 때까지 군대가 유예되었다. 난 그 당시 우리 지역에서 유일한 군미필 교사였다. 그리고 결혼 후 구청에서 공익근무를 하면서 방학 때는 봉사활동 학생 인솔 및 지도를 맡았다. 그때 봉사활동 중 만난 학생이었다. 복직 후 여고로 발령을 받고 운명처럼 마주친 것이었다. 이미 저 학생으로 인해 난 특공대 출신이라는 흔한 거짓말도 못해보고 공익근무를 했음이 처음부터 다 뽀록났다. 아이들은 정말 날 특공대라고 불렀다. "우리동네 특공대" ㅋㅋ

명랑하고 활발한 학생이어서 격없이 잘 지냈었고, 저 당시 난 교직경력 5년 차 교사로 매우(?) 젊었었다. 첫 애가 태어난지 9개월이 되어가는 시점이었던 것 같다. 전국민을 들썩이게 했던 2002 한일 월드컵이 시작되기 3일 전이었다.

그 당시에는 유도 연습 같은 그런 장난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웃어넘겼다. 그런데 아내에게 이런 사진과 편지를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아내는 통 크게 웃어넘기면서 재미있어 했다.

덕분에 내게도 그 아이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이 된 것 같다.

소풍 당일 아이들은 갓난 아기인 딸을 보고 싶다고 우리집 앞까지 와서 내가 데리고 나와서 보여주었던 기억도 난다.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기억 같지만 벌써 아득한 저 멀리에 있어 좀 슬프다.

**아 잘 지내고 있는 거지?

혹 이 글을 우연히라도 보고 허락 없이 글을 올렸다고 기분 나쁘면 부디 바로 연락해라ㅋㅋ




혹 궁금하실 분들을 위한 위의 사건과 관련된 편지 내용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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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9개월 된 큰 딸을 본 소감(선생님을 안 닮아서 아이가 정말 이쁘다는), 그렇게 딸을 보고 나서야 나의 칼퇴근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학교 학생들이 나를 만난 것을 destiny로 감사한다는 오그라드는 아부성 멘트, 그리고 다른 공모(?) 학생들의 정겨운 편지까지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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