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시간 낭비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학생들에게

by 청블리쌤

언젠가 전교권 학생 한 명이 내게 학교에서 예체능과목과 비교과 활동들이 너무 시간 낭비 같아서 자퇴 후 검정고시로 대학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민을 말한 적이 있다.

난 대놓고 얘기했다.

“내가 훗날 너가 지원한 회사의 CEO라면 너 같은 놈 안 뽑는다. 효율만 생각하며 계산하는 사람은 사회조직에서도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며 절대 손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니까.”

사실 수능 시험만 대비한다면 고등학교의 과정 중에 낭비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학교 수업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니, 수업 내용 중에 원하는 내용만 골라서 들을 수도 없고, 특히 자신이 우수한 학생이라면 학교 수업의 수준에 불만이 많을 것이다.

수시의 경우라도 학생부교과전형이라면 내신산출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은 낭비다. 정시파이터에겐 거의 모든 것이 낭비다. 지필고사 준비는 물론, 과정형 수행평가, 세특을 위한 활동 모두가 낭비다. 심지어 학생들과 어울리는 것도 낭비다. 게다가 학교라는 공동체생활에서는 원하는 친구들만 골라서 만날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게 사회다.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다.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범위를 선택할 수도 없고, 하고 싶은 일만 골라서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시스템에 갇혀서 입도 다문 채 강압적 복종에 익숙해지라는 의미는 아니다. 꼰대 문화에도 저항해야 하고, 불합리한 것에 맞설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이 원하는 일들을 주도적으로 선택하며 소신을 펼치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낭비 없는 무균실 같은 온실에서 그런 역량이 키워지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경우를 우리는 맞닥뜨린다. 그런 부정적 자극을 최소화해야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내 통제권 밖이다. 고통이나 아픔이 없기를 바라기보다 그 고통과 아픔을 이겨낼 힘을 키우는 게 더 현명하다. 그런데 그러려면 굳은살이 필요하다. 가장 어려운 것이 인간관계다. 상처를 두려워하면 깊은 관계를 얻을 수 없다. 실은 우리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까운 사람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때로는 연기도 해야 한다. 싫어하는 사람에 대해 일일이 솔직하게 반응하다 보면 서로 보이지 않는 칼로 서로를 찌르며 다니는 통제불능의 사회에 살게 될 것이다. 그 연기란 것은 위선이 아니라 상대 존중이다.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상처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을 지키는 예의로 그어진 선 같은 것이다.

가까운 친구도 적절한 거리 조절에 실패하면 상처를 받거나, 관계가 깨어진다. 어느 정도가 적절한 선인지는 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다. 스스로 겪어가면서 아픔을 느끼면서 조절해야 한다.

예전에는 생기부 종합의견란에 인성 부분을 항목별로 적기도 했다. 그 항목 중에 갈등관리도 있었다. 갈등이 없는 건 이상적인 상황인 것 같지만, 서로 더 가까워질 수 없는 드라이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 학생이 갈등이 없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갈등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였다.

이것을 낭비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학교는 시험 준비만 하는 곳이 아니다. 입시만 강조하다 보니 그 외의 것은 존재감이 덜 느껴질 뿐이지, 여전히 학교생활의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리고 정말 우수한 학생들은 시간 낭비 같은 그 상황에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기도 한다. 이미 터득한 학생일수록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혹 누군가는 내게 꼰대 같은 소리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꼰대의 집합소다. 상대방의 말을 내가 어떻게 통제할 수 없다. 나를 존중해 주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 주기를 강요할 수도 없다. 어차피 넘어서야 할 벽이다. 역시 오랜 시간을 둔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효율성이라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정한 상황과 시간에서 내 마음대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수능을 대비하는 데는 학교생활을 안 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면 더 효율적이라는 환상을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재수생의 경우 굳이 수업을 듣지 않고 수능 대비가 됨에도 종합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냥 학원을 가면 되기 때문이다. 낭비 같은 수업을 듣게 되더라도 별 고민 없이, 의지력을 발휘하지 않고 그냥 아침에 일어나지기 때문이다.

내가 혼자 집에서 재수를 해 봐서 안다. 학원 오가는 시간도 절약되고, 원하지 않는 수업을 듣지 않아도 되고, 별 목적 없이 재수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시간을 허비할 일도 없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는 것부터 매 순간이 다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나의 의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매 순간 의지력을 발휘해야 하고, 매 순간 결단해도 뜻대로 안되어 좌절하기도 한다. 혼자서 몸을 일으켜 책상에 자신을 앉혀놓는데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를 다 써버리면 앉아서도 집중이 잘 안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아침에 일어나면 굳이 학교 가는 것처럼 샤워 후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런 의식적인 노력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

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는 모른다. 얼마나 의지력과 노력이 세이브되고 있는지를... 물론 방학이 되어보면 다들 체험을 한다. 학교 가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았어도, 공부를 목적으로 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쉬운 길이었다는걸...

그래서 이번 방학 때 9시부터 시작하는 보충수업 신청할 때 망설이는 애들이 많았다. 평소보다는 늦은 시간이었지만, 방학이기 때문에 일어날 자신이 없다면서...

그런데 그런 효율성만의 문제는 아니다. 낭비는 정말 필요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로 인한 낭비로 그 사람과의 관계가 더 가까워진다. 공부 관점에서의 낭비 같은 휴식과 놀이와 뭔가에 대한 몰입이 살아가는 이유와 행복을 알려주기도 하고, 자신의 진로를 발견하게 해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계성이다. 그때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친구들을 만날 유일한 기회를 포기해서는 안 되는 거다. 난 딸들에게 공부할까 친구 만날까 망설일 때 그냥 친구 만나러 가라고 한다. 공부는 나중에도 할 수 있지만, 친구와 어울리는 건, 그것도 여고생으로서 그 시기에 어울리는 건, 지금 고3이라도 지금 아니면 못하는 일이니까... 그 이후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많은 학생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지 않고, 혹 주어지더라도 지금만큼 즐거울 리는 없을 거라고.

그리고 누군가와 친해진다는 것은 쓸데 없는 낭비 같은 말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거다. 효율성과 쓸모만 따지고 꼭 필요한 말한 하는 관계는 그냥 비즈니스적인 관계에 머물 뿐이다.

내 제자 중 하나는 고 1 때 학생들과 대화도 안 되고 그래서 전학까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다. 아침 일찍, 그리고 야자 마치고까지도 학생이 원하면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그 학생은 2학년 때 친구들이 많아졌고, 심지어 친구 갈등문제로 내게 상담까지 했다. 고3 때는 연애까지 했다. 그리고 고려대 의대를 진학했다. 연애 등 낭비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서울대 의대를 갈 수도 있을 거라는 얘기도 들렸지만, 난 그게 그 제자에게 맞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런 낭비를 안 했다고 더 좋은 데 갈 수 있었을 거라는 계산은 현실과 꼭 일치하지는 않을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 외에 인간관계를 배우고 연애도 하면서 감성도 깊어지며 삶을 배웠다.

학교 선생님들은 교과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을 가르치는 멘토이기도 하다.

물론 절대로 저 선생님처럼 되면 안 되겠다는 걸 몸소 보여주시는 분들을 학교 선생님으로 만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삶을 배운다. 적어도 그런 길을 가지는 않을 것이니...

학교라는 좁은 공간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다. 자세히 보면 군중이 아니라 각기 자기만의 우주 같은 세계가 있는 하나하나의 영혼이다. 그 친구들을 만나고, 선생님들을 만나고, 선후배를 만나면서... 그 만남으로도 삶을 배운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더 좋겠지만 나쁜 사람을 만나도 다른 의미로 배우는 게 있다.

그러니 낭비라는 건 없다. 당장은 못 느끼지만 어떤 삶의 과정에서도 의미 없는 일은 없다. 자신이 의미 부여를 하지 않는 것뿐이다.

우리는 사소한 일에도 의미 부여를 하면서 자아를 확장하며 배우고 성장한다.

그리고 늘 내일이라는 두 번째 기회가 있다. 그래서 오늘의 실패도 두렵지 않을 수 있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냐에 따라 더 성장한 상태로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는 관계성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 관계에서 인간적인 상처를 받아서 회복이 안 될 경우라면, 학생의 기질이나 일의 경중에 따라서는 전학이나 자퇴의 선택을 말릴 수 없었던 적도 있긴 했다.

중요한 건 그럴 경우라도 자신의 행복을 위해 남거나 혹은 떠나기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복이라는 것이 도피나, 편안한 삶의 추구를 의미하지 않는다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행복이라면...

그리고 우린 선택할 때까지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선택을 한 후라면 절대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보면 안 된다. 선택 후에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이제부터 증명하면 된다. 원래부터 정답이 있던 게 아니라 이제부터 정답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후회는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의 핑계라고 본다면, 그 후회는 선택이 달랐더라도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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