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공개적 수업비판, 그 아픈 기억

by 청블리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안다.


난 젊을 때 오히려 꼰대같이 정의감에 불타서 더 융통성이 없었던 것 같다.


지난날의 기억을 훑어보았다. 기억하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없게 하는 것이 “기록”의 단점이었다.


난 기억 속의 인기(?)에 가려진 나의 부족한 실체를 마주하였다. 그래서 그동안 들쳐 볼 수 있음에도 피하고 있었다.



첫 여고 부임 후, 난 엄청난 부담감이 들었다. 그 당시 여고생들은 천상의 존재인 줄로만 알아서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 이후 여학생반 담임(남녀공학 포함)을 21년 연속으로 하고 있어서 어느 정도 여학생의 심리 파악도 자연스럽게 되고 있지만, 시작부터 자연스러웠던 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자마자 고3 담임을 하게 되어서 아이들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그래서 아이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던 것 같다. 고3이라서 일상조차 힘겨운 아이들은 우리반이 아니라도 상담을 해 주고, 이메일 답장도 해주었다. 입시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고, 그저 새로 배우는 중이라서 아이들의 말에 대한 경청과 반응뿐이었음에도 아이들이 내게 많이 기댔다.


(고3 담임 처음 하시면서 부담 가지시는 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린다. 첫 고3 담임은 일단 패키지여행이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다른 선생님과 보조를 맞추면서 안내하는 대로 같이 움직이면 된다고... 물론 경험이 쌓이고 전문성이 쌓이면 혼자서의 여행도 가능하겠지만, 처음부터 주변을 잘 살피지 않고 독단적으로 하다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그리고 아이들의 모든 것을 다 책임질 수 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고. 실제로 그렇지도 않으니까. 그저 아이들에게 자기 모습 그대로 진심이기만 하면 된다고. 고3 담임이든, 고1 담임이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최선을 다하며 진심을 다할 수밖에 없는 거니까 크게 다를 게 없으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시라고.)


의외로 첫 고3을 하면서 우리반 입시 실적은 대박이었다. 그러니 증명된 셈이다. 담임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 있지만, 담임의 역량만으로 아이들의 입시가 결정되지는 않는다는 것... 그러면서도 그때는 재수하는 아이들은 나 때문인 것만 같았다.


게다가 고3 담임을 처음 하면서 고3 수업도 처음이었던 거다. 이건 지금 나로서는 용서가 잘 안되는 부분이다. 나름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다 하긴 했다. 모의고사 칠 때마다 바로 단어 정리해서 모의고사 끝나자마자 인쇄해서 전교생에게 배부하고 모의고사 풀이도 해주고 그랬었다. 그런 열심만 있으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런 열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학생들이 내 수업을 그저 참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진심을 발견하는 어떤 아이들은 팬심(?)으로,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괴로움으로 참다못해 듣기도 했을 것이다.


난 그때 이후로 인간으로서나 교사로서 계속 성장했고, 사대부고를 거쳐서 교육특구의 중심지 여고에서, 수업으로 살아남았다.


교육특구 여고의 아이들은 정규수업 시간 외에도 특보, 게릴라특강, 점심시간 인문학 특강, 영어멘토링 코칭에 몰려들었다. 특보 신청 인원이 60명이 넘어서 시청각실에서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고, 인문학특강은 200명이 넘어서 분반을 해서 진행하기도 했다. 한 번은 특보 신청이 40명쯤 되었는데 내가 탈락시킬 수 없어서, 오후에 왕복 1시간 반쯤 되는 외부 행사 마치고 학교로 다시 들어오는 학생들만 수업신청을 받겠다고 했는데 신청한 학생 전원 다 들어와서 2시간 내내 모두 몰입해서 수업들었던 감격스러운 기억도 있다.


(내가 이 대목에서 이렇게까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펼치는 이유는 아래의 상처받은 사연에 미리 방어벽을 치는 찌질함으로 인한 것이니 이해해 주시길...)


학생들의 열심에 맞춰 수업준비를 하면서 나도 많이 성장했다.


그걸 느낄수록 이전의 학생들에게는 특히 더 미안했다. 특히 처음 1, 2년 차 고3 담임과 교과교사로 만났던 그때 학생들에게... 그렇지만 모든 게 진심이었고 최선이었음을 이미 그때도 이해했겠지만, 부디 너그러이 이해해 주길...


그러나 무슨 일이든 이면이 있는 거다. 특히 화려함으로 포장된 그 이면에는...


교육특구 시절에도 모두가 내 수업을 다 좋아한 건 아니었고, 정말 싫어하던 학생도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좋았다고 외치는 그 순간에도 그런 학생들의 존재가 나를 가슴 아프게 했는데...


예전 나의 수업에 대해서는 불편하고 싫은 느낌이 당연히 더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게 소위 말하는 인기와 호감에 가려졌던 거다. 그래서 난 그 정도 열심이면 되는 줄 알았다. 물론 경험치가 쌓여야 나무가 아닌 숲을 조감하면서 가르치며 아이들에게 더 맞출 수 있었겠지만, 나의 수업을 좋다고 하는 아이들의 반응에 나의 부족함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인기는 실체가 없는 거품이다. 거품일 뿐 아니라 현실과 그 이면을 가리는 연막이기도 하다.


나의 소심한 성격상 먼저 내게 다가오는 아이들에게 반응은 하지만, 내성적인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게 힘들었다. 좀 더 노력이 필요했어야 하는 부분이다. 자기표현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조용한 생각에도 귀를 기울일 기회를 많이 갖지 못한 것 같아 가슴 아프다.


어떤 학생은 졸업하고 친구와 함께 학교를 찾아서 나와 처음으로 대화를 하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는 용기가 나지 않았었다고.


결국 소수 아이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일반화하여 인기라고 규정할 이유는 없던 것이다. 좀 더 세심했어야 하는 소중한 가치와 아픔을 겪는 아이들의 세밀한 필요를 놓치지 않았어야 했다.


첫 여고에서의 2년 차일 때...

우리학교뿐 아니라 그 누구도 제한 없이 볼 수 있는 내 개인 홈페이지 공개 방명록에 이런 글이 남겨졌다.


방심하고 안일해 있던 나를 깨우는 확성기소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중 일부만 인용한다.



1

저요..솔직히 선생님 수업 하나도 못알아 듣겠어요!

... 저희를 시험하시는 겁니까? 제발 진도 빨리 빼는데 연연하지말고 하나라도 알아듣게 차근차근 가르쳐주세요... 계속 이러케 수업하다간 언젠간 열받아서 책 찢어버릴날이 올수도 있습니다........!!!!!!!!!!!!!



2

저는 선생님한테 안좋은 감정은 없습니다.


저만 그런게 아니라 디게 높은 상층인 애들만을 제외하곤 중하위권은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그럴까요? 첫째... 선생님은 빨리 한다기 보단 뻥뻥 뛰어서 합니다.


둘째... 단어 설명!! 선생님은 그 영어 단어를 확실하게 말해 주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이해하기 쉬우라고 설명하시는 모양인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들어 [두려움]이란 단어가 있다 칩시다 선생님은 두려움 이렇게 안가르치시고 [쟤가 나에게 겁을주는 그런 느낌]이런 식으로 가르치십니다. 단어 밑에다가 재가 나에게 겁을 주는 그런 느낌이라고 써야 합니까?


... 어쩌다 제대로된 단어를 가르켜 주시면 밑에 적는데 적다가 밑에 세네줄은 놓칩니다. ㅡㅡ;; 이거 중요합니다. 많은 애들이 가슴아파하는 부분입니다. 심한 애들의 책을 보면 문장 윗줄만 새카맣습니다.


선생님의 설명은 기억이 오리 가지 않을 뿐더러 진도도 많이 나가고 단어 설명역시..... 즉 독학을 해야합니다. 다행히 선생님의 프린트가 있어서 단어 정리엔 좋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이 무지하게 잘가르킨다고 생각하시는데 ....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선생님은 잘 가르키시는 게 아니라 인기가 많을 뿐이지 인기와 잘가르친다는 거와 혼돈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생님의 진도를 못 맞출 뿐더러 ... 중간중간 선생님이 인기 유지를 위해 몇명애들에게 농담따먹기 하시는데 ....수업에 도움이 될까요? 제가 감히 선생님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선생님 이런식으로 수업방식 유지 하신다면 선생님 늙은 쭈그렁 할배되면 그때 인기가 식으면..... 그때도 잘가리킨다 소리 들리면 제가 칼물고 앞으로 쓰러지겠습니다. ㅡㅡ+


그리고 익명으로 쓴건 선생님께 혼날까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을 불구하고 선생님의 잘못을 꼬집는다는건 대단하지 않습니까!!!!!!!!! 흥분해서 많이 썼는데 감정 상하시지 말고 더욱더 좋은 선생님이 되세요~






그 당시 완전 충격이었다. 모든 아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내용이었다. 고3, 1학기말이어서 사실 진도를 느리게 나갈 상황도 아니었지만...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렇게까지 글을 올렸겠냐 싶은 게...


지금의 나라면 그때의 나보다 학생들 편을 더 들고 싶다. 객관적으로 난 충분히 부족한 영어교사였으니까...


그러나 인기가 많다는 것과 잘 가르친다는 것과는 별개라는 사실은 완전 뼈 때리는 말이었다. 팬덤이 아닌 학생들만이 객관화해서 할 수 있는 말이니 오히려 더 합리적일 수 있었다. 물론 쭈그렁 할배 되어서 인기 식고 나서도 잘 가르친다는 말 들으면 칼 물고 앞으로 쓰러지겠다는 말은 과하긴 했지만.


정말 상처를 많이 받았지만 지금 읽어보니 실제로 그러겠다는 것은 아니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귀여운(?) 요청 정도로 봐도 될 뻔했다.


물론 저 글에 다른 학생들의 반박 글이 줄을 이었다. “칼 물고 앞으로 쓰러질 날이 오겠네요” 등의 직설적인 공격도 있었다.


익명의 글이었고, 결국 누구인지 알지 못했지만, 한 가지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이후 익명의 이메일로 연락을 해와서 소통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게는 가장 가슴 아픈 사건이었지만 아픈 만큼 큰 삶의 깨우침을 얻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진심을 다해도 모든 학생들이 다 나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 교사는 늘 이 정도로 충분하다고 멈출 지점은 없다는 사실... 학생들의 아픔에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는 의도적인 노력을 아주 많이 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홈페이지 업데이트도 중단하고(그 전에는 매일 영어강의 등을 올렸었다) 고3 2학기 학생지도에 올인 하면서 자숙할 시간을 가졌다.




<공개적으로 내 홈페이지 방명록에 수업비판을 남겼던 학생들의 이메일에 답변한 내용의 일부...>


>표시는 학생 글


>선생님께서 저희 글을 점점 갈수록 오해하시는 것 같아서 멜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글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에 걸쳐 거의 마음의 정리를 하고 있단다. 물론 최근에 누군가 글을 또 올려서 내가 답변하는 과정에서 기분이 나빴을지 모르겠지만...



>참고로 저라는 학생은 여러명입니다.


글을 쓴 건 혼자일지 모르겠지만, 그건 다수의 생각임을 알고 있었지.



>첫째. 저희가 익명으로 쓴 이유는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한 두려움이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런 일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거지. 그건 인정한단다.



>그 글을 올리고 나서 약간의 비판글은 예상했지만 이렇게 까지 심할꺼라는 예상은 못 했습니다.


내가 그 글을 보았을 때 바로 지워 버리려는 생각을 했었단다. 그렇지만 좋은 글만 두고 비판의 글은 지운다는 건.. 양심이 용납하지 않았지. 그리고 거기에 답변을 할 수는 없는 처지였단다. 그때 몹시 아팠던 때였거든.


그리고 그런 다른 학생들의 답변들을 나도 예상하지 못했었단다.



>저희는 재수없게도 ..ㅡㅡ;; 딱 걸리고 만거지요..


재수 없게 걸린 건 아니겠지. 남들이 다 와서 보는 곳에다 올렸으니. 나한테 그냥 쪽지라도 써서 올려놓았으면 더 좋을 뻔했을 것 같구나.



>저희도 알고 싶습니다. 정말로 그 글을 읽고 충격에 쓰러 지셨나요??


꼭 그렇진 않단다. 쓰러진 날 저녁에 그글을 보았지. 그리고 그 다음날 학교에 못갔지만, 그건 그 글이 아니었더라도 못 갈 몸의 상태였을 거란다.(이것도 내가 그 소문을 듣고 몇몇 반에서 해명을 했단다.)


그러나... 정신적충격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지. 글을 쓴 학생에 대한 분노보다, 스스로에 대한 자책감.. 내가 학생들에게 이런 존재밖에 되질 않는구나하는.. 내 교사 생활 자체에 대한 회의가 막 들었단다. 이렇게 내가 애들 인생을 망치고 있는 것인가하면서...



>아무튼 익명의 힘을 빌려서 그런 글을 홈피에 올린거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니.. 내 마음도 좀 나아지는구나.



>어떤 글을 보니깐 선생님은 메일이나 자신을 찾아 오는게 낫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하시는데요..저희가 한두명도 아니고 선생님께 우루루 몰려가서 선생님의 수업이 맘에 안들어요 이러면 선생님께서 해결책을 딱 정해 주기가 곤란하자나요?


어떤 방법으로 내게 너희들 뜻을 전했더라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을 거란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공식적으로 수업에 대한 입장을 밝힌 거구. 그리고 나도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어휘의 우리말뜻을 좀 더 명확하게 하려고 하고(그게 옳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란다. 타협하는 거지), 필기 시간을 좀 더 주고(실은 그러면 나도 좀 편하긴 하단다. 중간중간 쉴 여유가 있으니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단다. 그 이유는.. 수업시간에 내가 얘기했던 그런 이유에서지. 수능이라는 현실이 바뀌지 않으면 내수업도 바꿀 수 없는 거구. 다른 쌤들이 천천히 나가시니까 혼자 급해서 그러고 있는 거구. 요즘 또 각반마다 <고3혁명>이라는 책을 소개하며 얘기하고 있지만, 영어는 수업만 의존해서는 망한다는 거.. 혼자 해야 하는 것인데..



>저희가 그걸 이해 한다고 해서 선생님의 수업이 싫어 졌다가 다시 좋아질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 그런게 현실이라는 거란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현실이 마음에 안든다고 도피하거나 부정해 버릴 수는 없다는 것이지. 그리고 내 수업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거란다. 학생들이 교사를 선택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의 책임이기도 하지.



>그리고 메일이 아닌 선생님 홈페이지에 글을 쓴건 메일은 그냥 지우거나 그러실수 있지만 홈페이지는 그래도 몇명 아이들이 봤기 때문에 선생님이 약간은 찔려서라도 수업방법을 약간은 바꾸지 않을까해서 홈페이지에 쓰게 된것입니다.


찔린다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겠구나. 이 생각은 했지.. 이상적인 생각으로 소신있게 해도, 모두가 그 방식을 마음에 들어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 내가 경력이 얼마안되어서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지도 모르겠구나.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불운한 일이지만.


수업에 대한 기대를 많이 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단다. 그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해서 미안할 따름이고.



>인기와 잘가르친다는 것에 착각하여 계속해서 수업을 진행한다면 저희가 칼물고 앞으로 쓰러지겠다는 거지 앞으로 선생님이 당장 그런 수업을 안 바꾼다면 그렇게 하겠다라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건(인기와 잘 가르친다는 것 착각하는 것) 정말 새로운 개념이었단다. 과연 내가 그랬는지 생각 많이 했단다. 해명을 했지만, 인기가 많다고 생각하지도, 잘가르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단다.


그리고 수업이 마음에 안들고 뭐 이런 수업이 다 있냐고 생각한다면, 내 수업방식하고 안맞든지, 아님 내가 부족해서 그런거겠지.


그리고 내가 수업을 못바꾼다면.. 내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주렴. 나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뜻대로 안될때가 많단다.



>그리고 이젠 선생님의 수업이 좋습니다. 익숙해서 그런걸까요..


받아 들여야 할 지 모르겠구나. 기억하렴. 더 좋은 문제집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더 좋은 수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면 같은 문제집과 같은 수업을 듣는 애들이 똑 같이 좋은 점수가 나와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거 아니겠니. 문제집을 풀때나 수업을 들을 때나 그걸 공부하는 자신의 태도와 자세가 더 중요한 거란다. 수업이 부족하고 안좋다고 느끼면 그만큼 자신의 노력을 더 기울이면 되는 거구... 선생님을 교체하거나 학교를 옮길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


(뻔한 조언 대신 이렇게 말해줬어야 했다 - 그건 내 수업과 관계 없이 너희들의 실력이 더 늘어서 그런 거란다.)



>생각 없이 그런 글을 쓰게 된건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맘이 아프셨지요?? 정말 눈물나게 사과드립니다.


맘이 많이 아팠단다. 흑흑...


마음 한 편에는... 내가 너희들에게 기대를 많이 하고 사랑이 많으니까.. 이런 아픔을 겪는다고 생각했지. 무관심했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쓸 바가 아니잖니.


그리고 이건 좀 치사한 얘기지만... 어떤 느낌까지 들었냐면. .배신감 같은 거 있잖니. 전에 너너테스트 하는 것도 그냥 쉽게 생각했겠지만.. 재시를 치려면.. 한반에 10명 정도 14반니까 140명.. 반마다 두시간 정도 들었으니까 거의 일주일에 300명의 학생들의 재시를 감당해야 했단다. 그것도 쉬는 시간, 점심시간 등에... 많이 힘들었고.. 모의고사 다음날 프린트 나가는 것도 완성될 때까지는 시간과의 다툼이기 때문에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단다. 그리고 진도도 빠르게 나가기 때문에 교재연구도 많이 해야하고, 수업시간 프린트를 만들려면 그보다 앞서서 내용정리하고 그래야 했단다. 물론 학교에서 다른 일도 많았지만... 내 약한 체력 이상의 짐을 스스로 지고 있다는 거 느끼고는 중단하기 시작했는데. 이번에 쓰러지고 나서는.. 그러는 차에 그 글을 봤으니.. 내가 그동안 잘했다는 자랑이 아니라..


(그래도 이것 저것 열심히 한) 그건 내 수업으로 커버할 수 없는 부족함을 어떻게든 채우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이었지. 그런데 이런 것도 다 소용없구나.. 하는 생각에 의욕이고 뭐고 다 잃었었단다.


지금은 의욕만 앞서고, 몸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서.. 예전처럼 그렇게 프린트 챙겨주지 못할 것 같구나. 미안하다.



>그럼 선생님 저희 이번 얼마 남지 않은 수능때까지 열시미 할려고 합니다.


그래.. 열심히 하렴. 후회하지 않게...



>격려 해주시고요(격려 받기 좀 머하지만...) ^^;;


너희들이 누구건, 나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든.. 중요하지 않단다. 항상 너희들 편이고, 너희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단다.



>그럼 저흰 선생님께서 용서 해주시리라 믿고 이만 쓰겠습니다.


용서? 그걸 용서라고 할 수 있다면.. 난 이미 했단다. 나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 들이는 과정만 남았을 뿐이란다.



부디 이번에 반박하는 글들로 해서.. 상처받거나 그러지 마렴.


원래 살다보면, 자기 의견과 맞지 않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란다. 너희들이 자유롭게 내 수업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밝혔다면, 다른 학생들도 거기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거니까...


내 권리만큼 다른 이들의 권리도 있는 거구.


다음부터 그런 기회가 있을 때는 익명으로 하더라도 감정은 좀 가라앉히고 글을 쓰도록 하렴. 물론 감정이있어서 그런 글이 나오니까, 힘든 건 알지만. 감정을 그대로 여과없이 쓰게 되면 당연히 감정이 앞선 글을 받게 되어 있단다.


그냥 토론 한 번 했다고 생각하자.



이렇게 너희들하고 이멜을 통해서라도 대화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구나. 마음이 좀 놓이고. 이젠 남아 있는 날 동안 너희들 자신의 꿈을 위해 그저 전진하렴. 힘내라..





아이들이 나를 의도적으로 아프게 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생각보다 일이 커져서 본인들도 많이 놀랐던 것 같고,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도 해서 바닥 같은 느낌에서는 좀 벗어난 것 같았다. 물론 끝까지 익명을 유지한 것도 이해가 되어서, 나도 더 이상 누구인지 궁금해하지도 누군가를 의심하려 하지도 않았다.


나의 답변 내용을 보니 나의 정당성과 자존심을 지키려는 힘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걸 느꼈다. 지금보다 더 꼰대 같은 느낌?


좀 더 너그럽게 아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며, 무엇보다 아이들의 답답함과 아픔을 좀 더 가슴 속 깊이 이해해주고 공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건 지금의 나의 모습으로만 가능한 일이고, 그당시에는 나름대로 진심을 다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나는 공식적인 교원평가와 상관없이 개인적으로 익명으로 매 학기 수업평가 및 건의사항을 받으며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수업을 개선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 노력으로 모든 아이들이 만족할 수업이 될 수는 없었겠지만 조금씩이라도 나도 교사로서 성장할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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