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난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부자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이 컸던 것 같다. 그런데도 커서 부자로 살고 싶다는 욕심도 거의 없었다.
부자가 될 작정이었다면 90년대 초반에 사범대를 진학할 리가 없었을 거다. 어떤 대학의 어떤 학과도 진학 가능할 성적이었으니 부모님의 욕심대로 다른 분야로 진출했었을 거니까.
중학교 때 내 방에 붙여 놓을 정도로 애정하던 시구절이 있었다. 난 이 시구절을 학교수업시간에 종종 인용했다.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하늘의 융단>이라는 시다.
원문은 이러하다.
<Aedh Wishes for the Cloths of Heaven>
Had I the heavens' embroidered cloths,
Enwrought with golden and silver light,
The blue and the dim and the dark cloths
Of night and light and the half light,
I would spread the cloths under your feet:
But I, being poor, have only my dreams;
I have spread my dreams under your feet;
Tread softly because you tread on my dreams.
<하늘의 융단>
금빛 은빛 무늬로 수놓은
하늘의 융단이,
밤과 낮과 어스름의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이 내게 있다면,
그대의 발밑에 깔아드리련만
나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기에
그대 발밑에 내 꿈을 깔았으니
사뿐히 걸으소서, 그대 밟는 것 내 꿈이오니.
이런 시를 가슴에 품다니...
일단 더 가난한 친구들도 있었으니 불평할 건 아니었지만(중학교 때 도시락 못 싸오던 친구의 도시락까지 챙겨갔던 적도 있었다. 점심, 저녁까지 학교에서 먹어야 해서 4개를 싸서 다녔다. 물론 고생은 어머니가 하셨지만) 난 가난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불평보다 그저 변하지 않는 본질을 잡으려 했다.
돈은 없을 수 있어도 꿈은 내 것일 수 있으니까...
행복은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에 깃든다. 가난이 막을 수 없는 행복의 꿈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나의 꿈을 응원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지금의 아내와의 만남도 처음에는 찬성하지 않으셨다. 최소 부부교사라도 해야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을 거라는 이유였다. 그때도 난 꿈을 선택했다. 그저 사랑으로 결혼해서 사랑하며 함께 하는 꿈... 그 꿈에 경제적인 풍요로움은 우선적인 고려사항으로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나중에 2세가 생기면 피아노는 아내가, 영어는 내가 가르치면 된다고 말씀드렸던 기억도 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예측대로 우리는 아이들을 입시 학원에 보내지 않았고, 아파트에 살고 있지도 않고, 차를 소유해 본 적도 없다. 가족 숫자대로 자전거를 네 대까지 소유한 적은 있었다.
주위 선생님들은 돈을 많이 모았겠다며 부러워했지만, 난 그저 형편에 맞는 선택을 한 것뿐이다. 물론 학원은 돈이 넘쳐나도 보내지 않았겠지만...
아이들에게도 그런 분수와 형편을 자연스럽게 가르쳤다. 지금 생각하면 가슴 아프지만 아이들이 어렸을 때 놀이공원에 가서 세뇌시킨 것 중의 하나가, 놀이공원에서 파는 풍선은 그저 구경만 하는 거라는 것.
그런데 큰딸은 남들 가진 거 다 가지려 하지 않고 사교육도 안 받았던 덕분에 여유 있게 살았다고 원망 아닌 감사의 마음을 내게 전했다. 자신이 다니는 대학 주변에 코로나 재난지원금 못 받았던 상위 12%가 대부분인 느낌이었고, 쓰는 규모가 다르다는 얘기도 했지만, 굳이 그들과 생활수준을 맞추려 애쓰지 않는다. 과외로 생활비 벌면서도 행복해하고 있다.
엄마 요리가 맛없는 덕분에 아이들은 학교 급식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뭘 해도 집에서 먹는 것보다 맛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다 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가진 것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걸 더 잘 배운 것 같다.
부모로서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자녀에게 많이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많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결핍과 부족함에서 오히려 더 큰 감사를 배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줄 수 있는 만큼만 주면 되는 거였고, 아이에 대한 진심이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렵다. 사랑할수록 주는 것보다 안 주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주고 싶어도 줄 수 없는 상황 자체가 그렇게 원망스러운 불만이 되지는 않았다.
다른 이들과 비교하면 늘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현실이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넘치는 은혜를 선물처럼 누리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족함과 연약함의 크기만큼 더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음을 생각하면, 매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당신이 가진 것 중에 받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오소 기니스, <소명>
두 딸은 아토피로 고생을 했다. 큰 딸이 어린 시절 심한 아토피를 겪으면서, 저녁마다 발을 씻을 때 온 집안에 비명소리 같은 울부짖음이 가득한 적이 많았다. 가려워서 긁으면 진물이 나고, 그 피부가 굳어져서 피부가 갈라진 상태로 물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마트에 가면 아이들이 과자 코너를 부러운 듯 바라보며 아토피 다 나으면 과자 먹을 수 있냐고 묻던 가슴 아픈 기억도 떠오른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가 가려움에 지치고 힘들어서 울고 있으니까 그걸 보고 있던 큰애가 함께 우는 거였다. 그 아픔이 어떤 건지 자신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고 기도할 수 있던 건 아픔과 상처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둘째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눈 밑에 진물을 달고 살았다. 팬더 같은 눈을 하면서 언제 나을지 모르는 그런 날들을 잘 이겨냈다.
큰딸은 고3 때까지도 아토피가 너무 심해져서 가려움을 긁기로 해결하면 어떤 결과가 따를지 잘 아니까 두 발을 세게 탁탁 두드리며 가려움을 이겨냈다. 진물이 나고 힘들 때도 스테로이드를 쓰면 좋아지는데 병원을 절대로 가려 하지 않았다. 스테로이드 쓰고 좋아지는가 싶으면 바로 더 심해지는 걸 이미 충분히 겪었기 때문이었다.
큰딸이 대학을 진학하여 집을 떠나 수원에서 생활하던 비가 오는 어느 날, 맨발로 샌들을 신고 길거리를 다니다가 감격스럽게 서서 발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아토피가 다 나아서, 더 이상 갈라진 발이 아니어서 쓰라리거나 따갑거나 아프지 않은 상태로 정말 맨발로 빗물을 그대로 다 발로 맞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신기함을 그 순간 감격스럽게 누렸다고 한다.
남들에게는 특별할 것 없는 그 평범한 순간에 넘치는 감격과 감사를 내게 이야기할 때 나도 감동과 감사의 마음으로 벅차올랐다.
12년 전 썼던 육아일기가 떠올랐다.
<2006년에 썼던 육아일기의 일부>
딸의 아픔을 보면서도 느낄 거다. 감사를 잊고 지낼 때마다 떠오르게 하시는 확성기의 음성으로, 그보다 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있는 걸 보게 하시면서... 아이를 더한 아픔으로 바라보면서 아이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더 기도하게 하시고 가진 것에 대한 감사를 넘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임을...
그리고 그 은혜가 내게 족할 때, 그때 딸의 그 아픔을 거두시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족한 은혜로 인해 여전히 감사할 수 있기를...
이 글을 포스팅하자... 남동생이 댓글을 남겼다. 너무 가족사로 치우치는 느낌이 있지만...
글에서 표현한 나의 기억을 뒷받침하여 객관성을 확보해 주는 내용이므로... 동생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아래 복사했다. 6살 차이가 나서 어린 시절에 아기 대하듯 귀여워해 주기만 했지 형 역할에 너무 부족했던 것 같아 늘 미안했는데, 이렇게 스스로 보고 배우며 행복하게 성장해왔다는 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형의 그런 취향 덕분에, 나도 덩달아 초등학생 주제에 예이츠의 시를 외웠고, 다른 아이들이 소방차 노래 부를 때 라이오넬 리치와 데비 깁슨을 들었었지.
그런 취향이 비슷한 결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걸 보면.. 내 취향을 만들어준 건 형이었네. (딱히 날 위해 그런 건 아닌 거 같지만) 고마워 ㅋ
나도 그때는 몰랐는데 지나고 보니 가난이었던 그런 지점들이, 요새 문득문득 떠오르더군. 근데 가난으로 인해 불행하다고 느낀 적은 없는 것 같아.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았는데.. 가난으로 불행하다고 느끼기엔, 다른 재밌는 게 너무 많았거든.
책만은 누구보다 부자였기에 하루 종일 집에서 책 보는 것도 좋았고, (딱히 경제적인 차이를 느낄 일이 없었던)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는 것도 재밌었고..
가난이 무서운 건, 가난 그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파생되는 무력감과 패배감, 그리고 가족 간의 불화.. 같은 부정적인 영향들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 집은 그런 것, 별로 없었던 것 같아.. ㅋ
형을 보면서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울지, 많이 배워.
특히 흔들림 없이 옳은 방향으로 아이를 키워가는 부분.
형의 방식 참조하면서 우리 아이도 잘 키워볼께.
아침부터 '너무 공감되는' 좋은 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