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 걱정에서 벗어나 아이들을 ‘다정한 무관심’으로 대하는 엄마라는 윤리의 준칙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다정한 무관심'이라는 말 자체에 개념 설명까지 이미 다 되어 있다.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다.
아래의 구절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부모는 관객'이라는 관점이 특히 열성 부모에게는 낯선 말로 느껴지겠지만...
"응, 난 당사자가 아니잖아. 자기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걸 구경하는 재미로 부모 노릇 하는 거지, 애 낳아서 내가 나서서 성공시키려는 거면 애를 왜 낳아?
그 정성을 가지고 차라리 내가 직접 성공하거나 코치 같은 직업을 가져서 제자를 기르지."
(중략)
"그럼, 재는 나중에 뭐 해먹고 살지?"
"그걸 왜 우리가 걱정해? 본인이 걱정할 때까지 기다려야지. 우리가 먼저 걱정하면 자기가 걱정을 왜 하겠어? 인간은 편하게 살려고 태어난 존재잖아. 스스로 불편해질 때까지 내버려 두자."
-박혜윤 <부모는 관객이다>(책소유, 2020)
항공기 출발 전 유사시에 산소마스크를 쓰는 안내를 한다. 놀랍게도 산소마스크는 아이가 아니라 엄마 먼저 써야 한다니 너무 이기적인 행동 아닌가?
아니 오히려 엄마에게 힘이 있어야, 그 힘이 충전이 되어야 아이를 돌볼 수 있는 거다.
오히려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은 치열하게 건강하도록 애써야 한다.
얼마 전 태풍으로 인해 포항 아파트 주차장에서 비극적인 사고가 있었을 때, 물에 잠긴 지하주차장 에어포켓에서 14시간 동안 버텼던 한 아빠는 아이들 때문에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부모의 사랑은 희생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부모가 살아있고, 도울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누가 먼저 행복해야 하는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부모가 먼저 행복해야 한다.
친구나 후배의 자녀교육 컨설팅을 해줄 기회가 많다. 아이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그들에게 난 자신만의 취미를 찾을 것을 권한다. 아이에게만 집중하지 말고 자신과 자신의 행복을 먼저 찾으라는 말이다. 어차피 사춘기를 관통하는 아이는 본인들이 도움이 필요하기 전의 도움을 짜증 내며 거부하게 되어 있다. 오히려 거리를 먼저 두면 역설적으로 아이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 먼저 다가온다.
수능장에 들어간 자녀에게 하루 종일 수능장 교문 밖에서 하루 종일 서서 기도하며 정성을 쏟겠다는 말은 오히려 아이에게 부담이 된다. 부모 편하라고 하는 말이다. 기도는 골방에서 몰래 해도 된다.
아이에게 대놓고 아빠는, 엄마는 재미있게 놀고 있을 테니 너의 길을 가라는 단호함이 아이들을 더 편안하게 해줄 수 있다.
난 딸들에게, 학교의 학생들에게 늘 이런 결론이 이르는 글을 써주거나 말을 한다.
성취와 좌절의 그 어떤 순간에도 변함없이 널 응원하고 지지한다.
과정을 즐기고 누리며, 결국 마지막 걸음이 내디딘 그곳이 도달점이면 된다.
모든 선택을 존중하고 그 결과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길.
의미 없는 경험은 없으니 무슨 일을 겪든 넌 성장할 거다. 실연의 아픔으로도…
이 모든 과정에서 뭐든 '행복할 만큼만'…
그러면 '어쩌다 보니' 뭔가 이루어져 있을 거라고..
어차피 성공과 행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추구한다고 의식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