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지원 학생들은 수능최저등급이 있어서 수능이 면제받지 않았음에도 수시원서접수 후 완전히 긴장이 풀려버리기도 한다. 최저등급 없는 대학을 지원했더라도 합격여부가 확실하지 않으면 최저 있는 다른 수시전형이나 혹 아직 포기하기 이른 정시지원을 위해서라도 수능을 놓을 수가 없음에도 치열한 스퍼트를 하지 못한다.
그동안 열심히 달려왔을수록 수시원서접수를 했다는 것이 합격을 완전히 보장해 주지 않는데도 막연한 안도감이 고3 신분으로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지 않는 인지부조화를 해결하기 위한 유의미한 합리화가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능최저등급은 탐구영역의 경우 두 과목 중 한 과목만 반영하는 경우가 많고, 국영수 모든 과목을 정시 기준에 준해서 다 잘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일해지기 쉽다.
문과 학생들은 주로 미적분을 선택하는 이과학생들에 비해 표준점수에서 불리한데다가 공통과목인 수1, 수2는 문이과 공통문항이라서 문턱이 예전 문과수학에 비해 많이 높여진 이유로 수학으로 최저등급을 맞추기가 어려워졌고, 이과학생이라도 수학을 버리고 국어, 영어, 탐구 등에서 2합이나 3합 최저를 맞추는 전략을 쓰기 때문에 생각보다 여유가 없다. 탐구영역으로 최저를 맞추겠다는 생각도 위험할 수 있는 게, 모집단이 적기 때문에 작은 변수에도 큰 영향을 받게 되고, 한 개의 실수로 등급이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리가 많이 작용한다. 모의고사에서 이미 그런 등급을 맞아본 학생들은 더 안심한다. 심지어 모든 시험을 통틀어 가장 높은 등급만 조합을 하는 식으로라도 위로를 얻는다.
그러나 모의고사는 수능성적과는 다르다. 물론 더 잘 나올 수도 있지만, 보통은 수능보다 잘 나오지 못하는 건 갑자기 끼어든 N수생의 영향도 있지만, 스스로의 안일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절실함으로 끝까지 스퍼트를 해도 장담하지 못하는데도 막연한 희망을 품으면서 여유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수능이 다가올수록 심적 부담이 커지기 때문에 치열하게 마주하기를 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근데 이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몸이 잘 따르지 않기는 하다.
큰 딸이 고3 때 6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수학 백분위 98%를 맞았다. 고3 부장을 오래 하신 친한 선배 선생님께 정시 파이터지만 논술로 지원하는 게 어떨지 여쭈었다. 선생님은 수시를 내면 절실함이 사라질 수 있고, 98%면 안정적인 1등급이므로 그냥 정시만 바라보라고 조언하셨다.
난 그 조언을 무시하고, 원래 계획대로 논술지원을 해두었다. 어차피 논술준비도 안 했으니 수능 대박 나서 논술보러 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결과적으로는 수능이 6모에 크게 못 미치는 성적이었고, 결과적으로는 백업처럼 혹시나 해서 지원했던 논술 전형으로 합격했다.
물론 논술은 수시라고 보기에는 정시의 연장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만... 정시 파이터인데 어쨌거나 수시로 합격한 것이다. 물론 끝까지 수능공부를 한 덕분에 꽤 높은 수능최저등급을 맞추었기 때문에 얻은 기회이기도 했다.
선배 선생님의 조언은 맞는 말이었다. 논술을 전혀 준비하도 않았는데 수시지원을 하면서 수능에 집중하는 데 방해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건 전문성을 갖춘 합리적인 조언이었다.
그런데 입시는 합리성과 타당성을 넘어서기도 한다.
수능대박이라는 말 자체에도 그런 의외성이 담겨 있다.
수능대박은 내가 평소보다 잘 쳤는데, 다른 애들은 상대적으로 잘 못 쳤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특히 자신 있는 분야가 나올 경우에 해당된다. 몇 년 전 국어 독서분야에 어려운 물리지문이 나왔을 때 물리에 관심 많았던 학생이 대박나기도 했다. 물리는 이과조차도 되면하는 경우가 많아서 상대평가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고, 기대 이상의 대학에 진학하기도 했다. 물리 지문이 나올지, 수능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는 없었던, 수능 직전에 내가 그 학생에게 수능대박의 정의를 얘기해 주고, 끝까지 최선을 다할 이유가 있다고 말해주었는데 예언처럼 들어맞은 사례다.
수능대박도 너무 당연하지만 끝까지 수능에 최선을 다할 경우에만 일어나는 일이기도 하다.
정시 파이터의 경우는 수시보다 좀 더 절실할 수는 있다. 탐구 한 과목만 건져도 수능 최저는 맞출 여지가 있지만, 정시는 탐구 한 과목만 망해도 재수할 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9월 모의고사, 10월 모의고사 성적에 심리적인 영향을 받는다. 잘 나오면 안심하게 되고 잘 안 나오면 자신감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의고사 성적과 자신의 노력을 분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평소 풀어보는 모의고사의 성적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보면 되는 거다. 모의고사든 혼자 푸는 봉투 모의고사든 그 어떤 것도 수능성적은 아니니까...
제일 후회할 경우는 조금만 더 공부했으면 풀 수 있을 것 같은 수능 문제를 만날 때다.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제일 큰 법이다. 아예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고 노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 건 후회의 목록에 포함되지 않는다.
정시파이터 중 당장은 성적으로 드러나지 않아도 정답에 비슷한 경계에 있는 학생이라면 더 열심히 할 이유가 있다. 아예 못 푸는 것이 아니라 이후 조금의 채움만으로 정답의 임계점을 넘어설 수 있기 때문에 당장 성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더 큰 희망과 잠재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이런 사례도 자주 보는데, 단 한 번도 모의고사로 증명하지 않았던 포텐이 터지는 건 요행이라기보다 대부분 이런 유형의 학생들이다.
수능 시험은 수학 주관식 문제를 제외하고는 결국 정답에 다가가는 확률을 높이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하다. 완벽하게 아는 학생도, 비슷하게 알고 찍어서 맞힌 학생도 결과는 똑같다.
한국사 만점 받는 학생에게 쓸데없는 낭비를 했다고 이야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게 수능의 맹점과 한계지만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끝까지 하나라도 더 알아두고, 이제까지 쌓아둔 지식의 체계의 맥락을 연결하며 응용하는 연습을 하고, 실전감각을 발휘하는 사소한 노력도 충분히 유의미한 것이다.
실전감각에는 포기가 포함된다. 어떤 문제유형을 포기할지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자신의 강점을 확실하게 발휘하는 기회가 된다. 국어나 영어 지문을 읽을 때도 모든 부분을 세밀하게 읽고 문제 보고 또 읽을 시간이 되지 않으니 전략적으로 읽어서 답을 찾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물론 독해력을 극강으로 만들어 전략 필요 없이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런 가정법적인 생각은 수능 직전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상이다.
영어의 경우 90점만 넘으면 절대평가 1등급이 가능하니, 빈칸추론만 붙잡고 약점을 보완하려는 노력보다 더 수월한 유형의 문제를 확실하게 다 맞히고, 빈칸추론 문제 중 한두 문제라도 정답에 다가가는 확률을 높이는 것이 관건이다. 물론 번호 순서대로 문제를 풀 이유도 없다.
어떤 과목이든 아니다 싶으면 건너뛰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수능이 다가오면서 평소 공부할 때부터 들여야 할 습관이다.
물론 2022학년도 국어 독서지문은 3개가 연속으로 극강 난이도여서 건너뛰다가 멘붕이 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럼에도 오기를 부리면서 씨름할 이유는 없다. 확실한 문제를 확보하고 남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씨름하면 될 일이다.
멘탈관리에서 중요한 것은 일상감각을 갖는 것이다. 디데이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심장은 더 요동친다. 그러나 어제와 오늘은 그냥 일상 중의 하나다. 여전히 공부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 물론 수능이 다가올수록 강점에 더 집중하면서도 균형 잡힌 시간 안배가 필요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벤트 같은 특별함을 느낄 이유는 없다. 의미를 부여하면 끝이 없다. 수능 전 마지막 48일, 47일...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다 보면 특별한 설렘을 넘어선 긴장감과 불안도 함께 느끼게 된다.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수능조차 이벤트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하루일 뿐이라고... 그저 평소처럼 몸을 일으켜 일상 같은 하루를 지내면 되는 거라고... 말처럼 쉽지 않으니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그리고 수능 직전까지의 긴장과 불안함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수능 시작 순간부터는 그저 몰입만 하게 되어 긴장이나 불안감을 느낄 겨를조차 없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결국 우리는 어떤 영역에서도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며, 할 수 없는 영역을 겸허하게 인정하며 경계를 확실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수능 직전 개인 소지품을 다 정리하고 앉아서 더 이상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를 더 할 수 없는 1교시 시험이 시작되기 전의 긴 대기 시간에 종교에 관계없이 기도를 하곤 한다. 그때야말로 그 영역의 경계를 확실하게 인지하는 시간이다. 이제까지 공부했던 그것만으로 수능이라는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났다는 것.
그런 삶의 교훈을 아이들은 수능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러니 애초에 성공과 실패를 규정할 수 없는 소중한 기회와 삶의 여정인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