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의 수능을 겪으며

by 청블리쌤

수능을 앞두고 재작년 반 아이들에게, 수능격려 문자를 보냈다. 그저 몇 마디 격려의 메시지였을 뿐인데 많은 아이들이 감사와 그리움을 담아 반가운 답문을 보내왔다.


긴장감과 불안함은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수능 전에는 언론이든 어디든 수능 주의 사항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난다. 오히려 불안함을 자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억지로 억누를 이유는 없다. 잘 간직했다가 수능 시작되는 순간부터 몰입의 에너지로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다.




딸 친구들이 수능을 앞두고 서로 이런 덕담을 했다고 한다.

"푼 거 다 맞고, 찍은 거 다 맞으면 좋겠다."

가만 생각해 보니 그러면 수능 만점인 거다ㅋㅋ




수능 전날 함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딸에게 이렇게 조언을 해주었다.

예전에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던 시절에 비해 넌 분명 많이 성장하고 발전했다.

그런 너의 노력과 애씀을 알고 있으니 수능 전날까지 무사히 온 것만으로 장하고 뿌듯하다. 그동안 모의고사 때마다 좌절하며 힘들어하다가 10월 모의고사에서 너의 가능성을 봤고, 그게 오히려 지켜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될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수능성적은 아닌 거다. 더 잘 나올 수도 있고 물론 잘 안 나올 수도 있겠지.

그저 너가 풀 수 없는 문제에 속상해하지 말고, 풀 수 있는 문제에만 집중해보렴.

수능 끝나면 해방감이 드는 건 맞는 얘기지만, 그렇다고 이후의 너의 삶에 긴장감 없는 편안한 날들만 이어진다는 의미는 아닐 거다. 결과에 관계없이 넌 성장했고, 최선을 다해 애써왔고 그 여정을 마무리하는 이 순간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성취고 성공이다. 또 이미 과정 중에 너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니 내일 결과와 관계없이 이후에도 어떤식으로든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거다.

수능은 유일한 기회가 아니라 가장 좋은 기회 중 하나일 뿐이란다. 너의 인생에서 거의 처음으로 맞게 되는...

아빠는 이제 무대 위에서의 시간만 남겨 둔 너에게, 그 여정을 완성한 너에게 박수를 보낸다.

여기까지 왔으니 아쉬움이나 후회는 떠올리지 말고, 내일 무대는 그저 보너스로 주어진 축복이라고 생각하자.

부담이 된다는 건 잘하고 싶다는 거고, 희망의 다른 이름인 거다.

그리고 혹 다른 이들의 기대에 대해서도 너무 민감하지 마라. 수능 전 격려의 메시지와 실물로 응원하는 많은 분들께 보답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결과에 관계없이 너에게 지지와 응원을 해준 것이니 그저 그 관계에 감사하면 된다.

그동안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 간 것도 너무 잘한 일이다. 수능 끝나고 결과와 상관없이 움츠려들지 말고, 즐겁게 지내고 행복을 놓치지 않기를 바란다.




같이 근무하는 영어과 선배 선생님께서 수능 전날 딸에게 수능응원선물을 전하러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선뜻 딸을 수능장까지 태워주시겠다고 제안을 해주셨다.


그동안 차 없이도 큰 불편함이 없이 살아왔지만 딸의 수능을 앞두고는 걱정이 앞섰다. 수능장까지 거리가 멀고 아침에 제때 택시를 잡을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불안했는데 그런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신 거였다. 출근 시간이 늦춰져서 그렇게 일찍 나서실 필요도 없으셨고, 수험생 수송이라는 막중한 책임에 함께 긴장하셔야 할 상황임에도 굳이 그 힘든 일을 자원하신 게 너무 놀랍고 감동이었다.


그러고는 수능 당일 아침 약속했던 시간 전에 집 앞에 차를 대기해놓으시고 와 있다고 문자를 주셨다. 걱정할까 봐 보내는 안심 문자이니 서둘러서 나오지 말라는 따뜻한 배려의 말씀까지 잊지 않으셨다.


덕분에 딸은 푸근하게 좀 더 자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고 출발할 수 있었다. 선배님은 편안하게 운전을 해주셨고 운전하시면서도 따뜻한 격려의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시험장 학교 정문 앞에서 내려주시고는 거의 두 시간이나 때 이른 출근을 하셨다.


눈물 나도록 고마웠는데 정작 선배님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고 그저 작은 기쁨이라고 말씀해 주시기까지 하셨다. 난 선배님께는 작은 기쁨이실지 몰라도 제게는 평생 감사할 일일 것이라고 말씀드렸다.

이번 일이 아니라도 난 선생님께 겸손함과 진심을 전하는 섬김에 대해 늘 배우고 있다. 참 감사한 인연이다.




딸이 아직 잠들어 있는 수능 날 아침 일찍 전 날 챙겨 놓은 딸의 가방을 한 번 더 점검해 보았다. 그러다 가방 안쪽 구석에서 전자알람시계를 발견했다. 전원이 꺼져 있어 별문제는 없었겠지만, 하마터면 의도하지 않게 금지물품을 가방에 담아 갈 뻔했다. 소지품을 챙길 때는 혹시 모르니 가방을 뒤집어 탈탈 털어봐야 할 것 같다.


선생님 차에서 내려 교문 앞에서 나와 아내는 딸의 손을 잡고 기도했다. 그리고 당당하게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는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수능 결과가 어떻든 이제 완전한 심리적인 독립을 이루는 순간인 것 같았고, 이제 딸은 아빠에게 전적으로 기대기보다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며 자신의 인생을 책임져가는 여정을 시작할 때가 온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딸과 함께 겪었던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모의고사 볼 때마다 좌절하며 희망이 있냐고 물으며 울던 그 모습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이 순간까지 무사히 오게 된 것이 그래서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난 놀이공원으로 출근을 했다. 학교에서 현장체험을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실은 11월 4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국가애도기간으로 연기되어 다시 정해진 일정이었다.

놀이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친 졸업한 제자가 내게 이랬다.

“선생님 왜 여기 계세요? 딸은 수능을 치르고 있는데 아빠는 놀이공원에 와 있다니”

나의 즐거움을 위한 자발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학생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긴 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체험활동 떠나기 전 반 학생들에게 미션을 주었다. 담임선생님과 인증샷 한 컷 찍기!

아이들이 좋아할 리 없었지만 강행했다. 그 대신 나와 놀이기구를 함께 타려 하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러면 그 후유증으로 다음 날 학교에서 날 못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요즘 아이들은 선생님이 옆에 있어도 사진 찍자는 말을 잘 하지 않는데...

지나치다가 날 본 반 애들은 지금 아니면 사진 찍을 기회가 없을 것처럼 들이대며 나와 사진을 찍었다. 맥락을 모르고 그 장면을 보면 내가 마치 인기 선생님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일종의 "체험활동 가서 인싸 교사인 척하기" 비법이었다.


다음 날 인증샷을 보여주는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나눠주었다. 담임 선생님의 터무니없는 미션에 반응을 보여준 고마운 마음을 담았다.




어떤 학생들은 날 연행하듯 끌고 가서 놀이기구를 태우기도 했다.

10여 년 전 고3 학생들 체험활동 왔을 때 대기줄이 없어서 한 바퀴 돌고 나서 한 바퀴 더 가겠다는 안내 방송이 나오자마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내가 큰 소리로 안 된다고 세워 달라고 하면서 겨우 내렸던 악몽도 떠올랐다.


이후 많은 아이들이 나를 이끌고 함께 타려고 하는 걸, 난 나이 초과라 안 된다며 겨우 빠져나오기도 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서 미안했다. 나의 괴로움이 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즐거운 추억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다 감당하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가 들고 허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그 놀이공원은 딸들이 어렸을 때 살던 집 근처에 있어서 산책 삼아서라도 자주 갔고 이사를 간 후에도 자주 다니던 곳이었다. 아이들 순회지도 하면서도 곳곳에 서려 있는 딸들과의 추억을 마주했다. 어린이 놀이기구에 타서 까르르 웃으며 즐거워하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래서 어느새 세월이 흘러 큰딸은 타지에서 독립하여 대학생활을 하고 있고, 둘째 딸도 수능을 치고 있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지만 희미해져가는 추억은 현실을 이길 수 없었다.




그저 모든 순간이 축복이었고 은혜였다. 딸이 마주하는 그 현실과 그 삶의 무게도, 추억 속에 얼핏 기억나는 매 순간의 즐거움과 행복, 그리고 아픔까지도 겪어낸 삶 이후에 주어진 또 다른 삶의 단계이자 기회라는 생각에 감사함이 넘쳐 올랐다.


수능결과와 상관없이 딸은 그렇게 성장을 이뤄낸 것이었다.


딸이 친구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저 모의고사 치는 하루를 닮았을 뿐인데 이 하루의 시험으로 대학이 결정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그렇게 큰 삶의 무게를 느껴야 하는 시험이었는지 실감이 안 난다고...


그래서 내가 이랬다.

수능 시험 한 번으로 성장을 이룬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과정을 통해 성장을 이뤄온 거고 그 성장을 보고서처럼 담아낸 것일 뿐이라고. 잘 담기지 않은 것 같은 아쉬움은 같은 보고서를 한 번 더 써도 되지만, 다른 다양한 방법으로도 이뤄갈 수 있으니... 결과에만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수능 마친 딸을 보자마자 그냥 애썼다고 안아 주었다.




딸과 집에 와서 가채점을 시작하기 전 저녁을 먼저 먹였다. 결과가 좋아도 업 되어서 못 먹을 수 있고, 안 좋으면 기분 나빠서 음식을 거부할 수 있으니 그냥 먹고 보자고...


결과에만 너무 연연하지 말라고 해놓고서... 난 가채점 결과와 예상등급컷 등을 분석해서 밤늦게 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직업병인지 모르겠지만 딸이 느끼는 마음과 심경의 실체를 분명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시험 결과를 품고 있지만, 남은 기간에 부디 학교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와 그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함께 모여 즐거움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중요한 인생의 관문을 통과했을 뿐 삶은 계속되고 성장은 계속되는 것이니, 즐거워할 자격도 따지지 말고 그냥 매 순간 진심을 다하며 힘을 다해 행복하라고...


아빠는 이후의 모든 선택을 최대한 존중할 것이며, 원하는 어떤 타이밍에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대기할 것이며, 응원과 지지를 멈추지 않을 것이니 당당하게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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