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수능은 끝났지만, 아직 해방 모드에 들어가지 못했다.
정시파이터를 인증하듯 수시로 논술 두 군데를 내 두었다. 논술로 승부 거는 것이 아니라 부디 논술을 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보험가입이었다.
큰딸도 6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수학 98%를 찍으면서 오히려 논술을 내면 절실함이 사라질 것이니 그냥 정시에만 올인하라는 입시전문가 선배 선생님의 조언을 무시하고 네 군데나 논술 원서를 냈었다. 물론 논술을 준비한 적도 없고, 대책이 있던 것은 아니었으니 논술을 응시할 일이 없을 정도의 수능 대박을 소원하는 마음만 담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과논술은 서술형 수능 수학, 과학 시험과 같아서 특별한 준비 없이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수능 응시 후 눈물을 휘날리며 나왔던 큰딸은, 무력감과 의욕상실의 상태에 있었지만 기분전환 겸 서울로 놀러 가자는 아빠의 꾀임에 순순히 넘어갔다. 수능 응시 후 3일 만에 논술을 응시하게 되어 시간도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논술 기출도 제대로 써보지도 않고 그저 처음으로 논술 문제를 제대로 풀어 본 것이 실전이었다.
늘 시험에 대한 예의를 다할 것을 강조했던 아빠의 가르침에 몸으로 반응하여, 딸은 배고픔과 졸음을 이겨내며 역량껏 최선을 다해 논술을 치고 환한 표정으로 시험장을 나서서 서울에서 신나게 놀다 왔다.
딸에게 그다음 주 논술은 준비 없이는 응시하지 말자고 하니, 그냥 안 하겠다고 포기를 선언했다. 이미 서울에 한 번 와 봤고, 따로 공부를 하기도 귀찮고, 합격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해서 냈던 다른 대학은 정시로도 갈 수 있는 상황이어서 굳이 논술에 응시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큰딸의 논술 추가 합격 소식이었다.
그리고 둘째 딸도 고등학교 시절을 언니와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둘째는 언니와 달리 문과라서 준비 없이 논술을 응시하기는 어려울 거라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원서를 냈다. 사탐 쌍윤(생활과 윤리, 윤리와 사상)을 선택해서, 도표 분석 등을 평가하는 성균관대 등의 대학은 원서 낼 것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문학에 상대적 강점이 있는 걸 고려해서 논술을 지원했다.
고3 10월 모의고사에서 정점을 찍고, 부디 논술응시하는 일이 없기를 바라며 수능을 응시했는데, 결국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수능 후 일주일 넘게 논술기출문제를 써보는 등의 준비를 조금은 했다. 하루 종일 논술 준비할 수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딸에게 실컷 아이들과 놀고 조금씩만 하라고 권했지만, 딸은 그렇게 놀면서도 시험이라는 부담을 떨치지는 못한 느낌이었다.
큰딸은 시험 하루 전, 게스트하우스를 데려가서 숙박을 하고, 시험응시까지 내가 동행했었는데...
둘째는 언니한테 가서 하룻밤 자고 언니와 함께 가겠다고 혹 내가 상처받을까 조심스럽게 내가 의사를 전달했다. 언니 때 아빠가 같이 가줬는데 같이 안 가도 섭섭하지 않겠냐고 하니까 전혀 섭섭하지 않으며, 아빠가 같이 가면 왠지 비장한 느낌으로 시험을 잘 봐야겠다는 부담감이 있을 것 같아서 편한 마음으로 다녀오겠다는 것이었다.
난 큰딸의 의견을 묻고는 둘째딸의 선택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빠의 도움을 더 이상 절실히 바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한편으로 슬프기도 했지만, 스스로 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둘째도, 그런 동생을 책임지고 챙기겠다는 첫째도 다 컸다 싶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문득 첫째가 논술시험장에 입실하여 대기하는 동안 캠퍼스의 가을을 담아 즉석에서 블로그 포스팅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침 둘째 수능날은 첫째가 논술을 응시하던 날짜가 똑같았다. 3년의 간격만 있을 뿐이었다.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1710089123
큰딸의 합격 가능성을 높게 두지 않았기 때문에 숙박 등 불편한 일을 겪고도, 아침에 택시가 주차장에 세워둔 것처럼 정체되어, 도착해서 아침까지 먹이겠다는 생각이 얼마나 경험 없는 순진한 생각인지를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그래서 하마터면 응시를 못할 뻔한 위기의 상황을 겪으면서도 우리는 여유 있게 웃을 수 있었다. 그저 치열한 경쟁의 장소에서 삶에 대한 자세를 배우고, 혹 반수를 할 때 실제적인 도움이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결과를 떠난 딸의 성장에 큰 무게를 두었는데...
이번에도 그때와 동일한 마음이다. 딸에게 그저 언니랑 맛있는 거 많이 먹고 즐거운 경험을 하고 돌아오라고,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최선만 다하고 오라고만 말해주었다.
아빠의 영향력이 가득한 그늘에서 벗어나 주도적으로 자신의 삶의 여정을 설계하고 부딪혀보는 경험 자체가 이미 문턱을 넘어선 성장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뜨거운 열정과 간절함이 가득한 대학논술의 경험이 이후 부푼 꿈을 품으며 현실적인 동기를 부여받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서연고 성서한 중경외시> 라인의 대학이 아닌 인서울 대학은 지거국(지방거점국립대)진학을 대체할 수 없다는 아빠의 기준을 이미 받아들인 딸은 논술의 가능성이 아니라면 정시로 진학하게 될 대학이 아쉬워서 어떻게든 수능은 한 번 더 응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딸의 공감능력과 감성, 가르침에 대한 소질 등을 생각하여 사범대나 교대로 진학했으면 하는 바람에 대해 딸은 학교 안에 계속 머물 생각이 없다며, 그 이상의 넓고 큰 세상 속에 살기를 기대한다고 분명히 자신의 뜻을 밝혔다.
큰딸은 그럴 거면 사대나 교대를 가면 되겠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정말 머물기 싫은 마음이 클수록 반수의 의지와 수능 대비 노력을 더 키우는 동기유발이 될 것이니까...
전혀 기대 없이 논술을 응시하러 그 먼 길을 갔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우린 결과에 연연하지 않기로 했으니 걱정도 불안함도 없다.
수능을 한 번 더 응시하는 것도 정말 큰 부담인 것은 틀림없다. 메이저 의대 진학을 위해 수학 96점에서 100점 맞으려면, 그 4점을 올리기 위해서 1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찍어서 맞혀도 무효가 되지 않는 수능 시스템에서 그 투입 대비 노력을 생각하면, 특히 문과로서 여전히 이과와 수학에서 진검승부를 계속해야 하는 내년의 수능도 장밋빛 전망을 할 수는 없지만... 오기를 갖는 것도, 도전의 의지를 다지는 것도, 아니면 그저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도 모두 본인의 의지에 따른 선택일 것이니 늘 그래왔던 것처럼 존중해 주며, 그저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 어떤 상황에서도 응원과 지지를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내 뜻대로 강요할 것이었으면, 인서울이 아니라 무조건 사대나 교대를 보낼 것이겠지만...
딸은 어떻게든 놀러 가는 서울이 아니라 일상으로서의 서울을 꿈꾸고 있고,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그 꿈을 이룰 생각인 거다. 인서울이 딸에게는 자신의 꿈을 구체화하는 무대라면 이번 수능시험의 좌절은 단지 그 시작점을 한 해, 혹은 (대학졸업 후) 여러 해 유보시킨 것뿐이다.
딸은 언젠가 편지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서울로 대학 가면 누구보다 기뻐해 주실 거고 대구에 남아도 효도했다고 해주실 거니까 부담 없이 더 노력하게 되는 것 같아요.
딸의 편지에 비추어 보면 수능 후 딸의 눈물에 기뻐할 일은 없었고, 일단은 효도했다고 할 상황이지만... 딸이 자아를 실현하면서 성장을 이뤄가며 행복해할 일에 누구보다 기뻐해 줄 순간을 기대하며 응원하고 싶다. 결국 그것이 심리적 독립에 이어 물리적 독립의 순간이라 하더라도... 큰딸처럼 자주 볼 수 없는 상황이 시작되더라도... 그게 부모의 숙명이자 궁극적 행복인 것이니까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