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나 N수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나의 재수 체험기
재수가 어려운 이유와 독학재수학원 선택의 이유에 대해 글을 시작했는데 나의 재수 체험기에서 재수 과정의 의미까지 글이 이어질 줄은 몰랐다. 재수생들에게 희망과 응원의 글이 되기를 바라며...
재수는 말 그대로 실패를 전제로 한다. 또 다른 기회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는 건 비장한 각오만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이내 일상에 묻히며 열정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때쯤 실패의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자신의 마음을 잠식하기 시작한다. 한 번 실패했는데 두 번 실패하는 것이 너무 현실적인 전망이 될 때면 이내 슬럼프가 찾아온다.
서울대를 떨어졌거나 전문대를 떨어졌어도 여전히 재수생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애매한 경계에 있다. 안정적인 자리를 얻지 못한 그 불안함의 경계는 뭐든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기분이나 공부 집중도의 기복에 따라서 불안함의 영역에 스스로를 가둬버리기도 한다. 어쨌거나 한 번 더 한다는 객관적인 사실 자체가 무조건적인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닐 것이니 불안함은 필연이다.
원서를 쓸 때 고3 현역 때 같은 담대함을 기대할 수 없다. 현역 때는 안 되면 재수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미 한 번 실패를 한 후에, 또 다른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기에는 재수 기간의 심적 고통이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선택으로 이끌기도 한다.
담대함은 마음을 굳게 먹는 의지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건 기대한 것 이상의 실력을 갖추는 것만으로 커버할 수 있다. 그러니까 100 정도 노력으로 가능한 대학이라면, 110이나 120 정도의 내공을 갖추어 확률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재수생의 가장 어려운 문제는...
더 이상 학교를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3 때의 모든 수업과 교육활동이 수능대비에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때로는 시간낭비라고 느껴지는 일들을 겪었기 때문에, 재수라는 시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을 관리하며 시간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을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게 할 수도 있다.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진학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고등학교 때가 좋았다는 말이다. 자신들에게 굴레처럼 씌어진 속박이나 구속이 알고 보니 자신들을 보호하는 장치였다는 것을 학교를 벗어나서야 겨우 보게 되는 것이다. 혹 잊어버리거나 실수하는 것도 고등학교에서 일일이 다 챙겨주기도 한다. 대학에는 고등학생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무제한급의 자유가 주어진다. 그제야 학생들은 깨닫게 된다. 그 자유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수업을 안 듣는 것도 자유고, 일정 시간까지는 결석할 권리가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은 간과하기 쉽다. 그런 책임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고등학교 때는 참 편안했다는 걸 느끼게 된다. 늦잠을 자지 못하도록 출결이 공식적으로 기록되고, 수업이나 자습을 빼먹으면 벌점을 받거나 선생님의 잔소리에 시달리기도 한다. 때로는 원하지도 않은 상담을 받으면서 성적으로 압박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면 잔소리도, 압박도 갑자기 사라진다.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대학생이 느끼는 게 그 정도라면, 재수생들의 당혹감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재수생들이 재수학원에 다니는 것은 수업이 필요해서이기도 하지만, 고등학교때까지 불편하게 느꼈던 그 속박을 자발적으로 받고 싶기 때문이다.
수업을 듣지 않고 도전하려는 이들을 위해서는 독학재수학원이 성행 중이다.
독학재수학원도 수업을 패키지로 묶어서 제시하기도 하고, 선생님들이 상주하면서 질문을 받아주기도 하고, 학습상담이나 진로 상담을 해주기도 한다. 등교가 아닌 등원시간을 체크하고, 퇴원시간도 체크한다. 무단 지각, 조퇴, 결과, 결석도 관리하고 부모님께 알려준다. 휴대폰을 관리해 주기도 하며, 심지어 자습 도중 자는 것을 깨워주기도 한다. 학교처럼 규정을 만들어서 벌점이 쌓이면 강제로 퇴원조치를 한다.
물론 어느 정도까지 철저하게 관리를 해주는지, 학생들은 어느 선에서 학교 교칙 어기듯이 눈을 피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할지 알 길은 없지만... 이 모든 시스템이 학교의 시스템과 닮아 있다. 차이가 있다면 그 시스템 안에 학생을 넣어주는 대가로 비용지불을 받는다는 것이다.
집에서 하루 종일 공부할 수는 없으니 스카(스터디카페)나 독서실을 다니는 건 당연할 수 있지만, 학원이나 독학재수학원이 인기가 있는 이유는...
자율성을 가지면서 자기절제를 이루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지금 현세대를 비판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는 스마트폰이다. 현재 공부하는데 가장 천적이자 주적은 스마트폰이라는 사실은 학생뿐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는 어른들도 공감하는 사실이다.
그런데 굳이 휴대폰 관리나 출석관리를 해준다는 이유로 비싼 돈을 지불할 이유가 있는가? 벌점이 쌓이면 강제로 퇴원시킨다는데 다른 데 가면 그만 아닌가? 학교 다닐 때 기록되는 출결과는 어차피 그 무게감도 다르다.
휴대폰과 맞짱을 떠서 이길 수는 없다. 그리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가지 않아도 되는 독서실에 꾸준히 다닐 이유도 없고, 굳이 지금 안 해도 되는 공부를 할 이유도 없다. 매 순간의 유혹과 게으름과 싸워야 한다. 더 자신이 없을수록 스파르타식 기숙학원을 가기도 한다.
적어도 눈으로 확인하는 성과는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입시학원의 속성과 다르지 않다. 당장 실력을 눈으로 보고 싶은 것처럼, 당장 매일 아침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서, 휴대폰과의 전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환경에 있으면 공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 필요한 건, 자발적으로 스스로 이겨내는 자기 절제의 훈련이다.
어떤 일이든 시작은 초라하고, 이후에도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자주 좌절하게 되는 것은 디폴트값으로 포함된다. 중요한 건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져도 일어서는 회복탄력성을 몸에 새기는 일이다.
재수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얘기를 자주해준다.
혹 재수를 해서 원래 가려던 대학과 별 차이 없이 진학하더라도 시간낭비는 절대 아니다. 재수 전과 후의 너의 모습을 달라졌을 것이니... 그렇게 숱한 좌절감이 가슴에 새겨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스스로 절제하는 훈련을 수료했으니, 그만큼 더 성장하고 준비되어 진학하게 되는 것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라.
재수생의 또 다른 문제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쉽게 빠진다는 것이다. 함께 생활하는 학교친구가 주변에 없고, 나의 사소한 변화에 대해 언급해 줄 선생님들도 주변에 계시지 않다. 지금 자신이 겪는 어려움은 자신만 그런 건 아니고, 긴 과정 중에 극복할 수 있는 사소한 어려움이라는 것을 객관화시켜서 이야기해 줄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의미다.
그러면 혼자서 각본을 쓰게 된다. 기질에 관계없이 이미 실패를 한 번 이상 겪은 N수생들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작성하기도 한다. 우리 삶의 굴곡과 기복은 늘 있게 마련이고, 바닥 치면 그다음부터는 올라가기 시작하는데, 혼자만의 비관적인 생각에 매몰되면 바닥을 인지하지 못한다. 분명 바닥치고 올라가야 할 시점임에도 더 추락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공부가 잘될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는데, 고3 시기별로 그런 패턴이 있는데, 혼자 있으면 그걸 잘 인정하지 못한다.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재수기간이니 현역 때보다는 무조건 더 좋아져야 한다고 스스로 최면을 건다.
그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늘 공부가 잘될 수 없으며, 체력과 시간과 노력의 한계가 있음을 받아들어야 한다. 현역 때에 비해 자신이 슈퍼맨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추락할 때는 그냥 몸을 맡기고 내려가면 된다. 곧 올라올 것이니 그 굴곡과 흐름에 몸을 맡기며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하고 응원해야 한다.
재수생의 삶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키워드가 더 중요하다.
때로는 "그래서 내가 이러니 재수했지"라는 자기비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라떼 이야기라서 미안하지만...
나도 재수라는 걸 선택한 적이 없지만, 운명처럼 하게 되었었다. 서울대를 떨어졌다는 건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재수생이고, 오히려 재수해서 그 이상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책임의 무게가 더 괴로웠다. 더구나 경기도 소도시인 비평준화 고등학교에서 나를 스카웃하면서 내걸었던 스카이 진학 시 대학등록금을 다 대주겠다는 계약을 대학낙방으로 스스로 걷어차 버린 난, 집안의 가난과도 싸워야 했다. 늘 대학진학해도 등록금을 대 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너무 무겁게 다가왔다. 더구나 절호의 기회를 오로지 나의 부족함으로 날려버린 후 그 죄책감에서도, 대학 진학 이후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불안감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3 때 경상북도 농촌으로 이사를 한 상태여서 대구의 재수학원은 거리도 집안의 경제능력도 내 편이 아니었다. 결국 난 집에서 나홀로 재수를 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부모님과 집에서 함께 지내면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재수생의 삶은 고단했다.
학교를 다니지 않으니 아침에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것부터 힘들었다. 보통 공부하는 곳과 휴식하는 곳을 분리하는 것이 좋은데 난 그저 집에만 머물러야 해서 공부와 휴식의 명확한 경계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다행히 교회사택이 교회와 붙어 있어서 난 교회 기도실 등의 공간을 평일에 이용할 수는 있었다. 집과 교회를 오가면서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건 거의 유일한 축복이었다. 보통은 그당시 고3이었던 여동생이 학교에서 여분으로 챙겨온 모의고사 문제지를 들고 시험장에 가듯이 교회 기도실에 가서 모의고사 시험을 혼자 시간을 재면서 푸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하고 옷부터 갈아입었다. 공간은 같아도 공부모드로 바꾼다는 나름의 의식 같은 것이었다. 이 얘기를 한 고등학교에서 해주었더니 한 학생이 방학 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교복으로 갈아입고 공부를 시작해서 습관을 이어갔다고 해서 흐뭇한 적이 있다.
휴식시간에는 기타를 들고 교회에 가서 CCM을 부르면서 비참한 나의 신세를 울분처럼 쏟아내기도 했다. 재수의 시간은 그동안 내가 가졌던 전교 1등의 명예와, 혹 학교에서 받을 수 있었던 장학금과 주변의 기대와 응원 등을 한 번에 다 날려버리고 바닥으로 추락한 광야 같은 시간이었다. 그 당시는 고통이었지만, 그나마 내가 겸손한 배움의 자세를 원점부터 점검할 수 있던 기회였고, 내 힘만으로 모든 걸 성취할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이면서 복음의 메시지를 머리가 아닌 인격적으로 반응하게 된 소중한 시간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재수생의 소심함을 넘어설 수 없어서 서울대 영어교육과 합격할 수 있었던 학력고사 성적으로 서울대 아닌 경북대 영어교육과에 진학을 하게 되어 표면적으로는 실패가 분명했지만, 분명 나의 삶의 긍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무엇보다 학교나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서, 가족들 외에 친구도 주변에 없었던 그 상황에(친구가 있었다면 동네 초등학생들이었다. 교회 놀이터에 자주 놀러 왔던 초등학생들과 놀아주다 보니 어떤 아이는 개교기념일이라고 아침부터 놀자고 집의 초인종을 눌렀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른다. 놀아주는 입장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게 해준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입시에 대한 정보를 공유할 사람도 없이 1년 동안 깜깜한 터널을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실패에 머물지 않고 또 기회를 가질 수 있음에 감사했다. 남들만큼 재수할 분위기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그런 상대적 박탈감 따위로 기회를 망칠 수 없다는 절실함이 내게 있었던 것 같다.
후반기에는 갱지 1,000장을 사서 앞뒤로 수학문제를 풀거나 공부 메모를 하면서 학력고사 때까지 1,000장을 다 쓰겠다는 목표로 한 장 한 장 바를 정자로 그어가면서 결국 학력고사 전에 끝냈던 성취의 기억도 성적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애썼다. 모든 시간을 거의 나 혼자 관리할 수 있었고,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이 헤맬 수도 있고, 슬럼프 등의 늪 같은 시간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느낌으로 힘겨웠던 때도 많았지만... 분명 난 성장하고 있었고, 그 아픔을 나의 온 세포에 새겨서, 감사하게도 이후 만나는 학생들을 위한 공감으로 쓸 수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단언할 수 있을 것 같다.
내게 의미 없는 시간과 경험은 없었다고. 오히려 좋아 보이지 않던 그 순간에 오히려 난 더 성장하고 있었다고.
그러니 내 딸을 비롯한 재수생과 N수생들에게 이렇게 희망을 말해주고 싶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고, 결국에 시스템이 아닌 자신의 자율성과 주도성을 서서히 발휘하며, 자기 절제를 몸에 새겨가면서 평생 자산을 모으는 소중한 과정일 거라는 사실...
그래서 어떤 대학의 출발선에 서게 되더라도 더 준비되어 그 과정을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니 가시적인 성취로 성공과 실패를 규정하지 말고 그냥 하는 데까지만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사실...
실패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안한 길로 타협하지 굳이 이 길을 선택하려 마음먹은 용기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는 사실...
그러나 그 길은 꽃길은 아닐 것이며, 매 순간 굳이 공부하지 않아야 할 이유와,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합리화와 싸워야 할 것이며, 희망과 불안함이 공존하는 롤러코스터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그래서 어떤 날은 하루에도 열두 번 후회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신에게 문제가 있거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고, 선택이 잘못된 것도 아닐 것이니 그저 멈추지만 않으면 될 거라고...
그렇게 마음으로 응원하며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