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청블리쌤 Feb 28. 2023

기독교 관점의 행복교육(자녀교육)

사춘기, 중고등학생 기준 작성

학부모, 교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할 때 주제가 바뀌어도 공통적으로 담는 메시지가 있다. “행복교육”이다.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복음적 관점의 행복>

우선 행복의 재정의가 필요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행복인 것인가? 숫자로 표시되는 정량적인 성취가 행복의 조건이라면, 지금 세상의 시스템은 틀려 보이지 않는다. 경쟁을 오히려 더 부추겨야 하고 모두가 더 빨리 속도를 내야 한다. 가산을 탕진해서라도 사교육에 투자하는 현상이 이상해 보이지 않아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난 늘 반전 같은 얘기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이야기한다. 자격을 갖추지 못했고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모습 그대로” 사랑스럽고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강사인 나 자신도 명예, 인지도, 능력, 전문성, 그런 옷을 입고 있지 않다고... 그런데도 입소문으로 자꾸 강의에 초대받는 이유는... 메시지에 위로와 힐링이 담겨 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복음으로 물들어 있는 듯하다. 오히려 나의 전문성이나 잘남이 없으니 그 부족한 자리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라 믿는다. 

<부족한 곳에서 더 커지는 은혜>

난 애초에 도저히 강연뿐 아니라 학생들 앞에 설 수 없는 자다. 그러나 나의 부족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족함에 대한 솔직한 반응과 그 출발점에 대한 인식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부족함이 채워지고 더 큰 능력을 힘입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립 얀시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제시된 메시지는 아래의 문장에 명확하게 제시된다.


There is nothing we can do to make God love us more. 

(하나님이 우리를 더 많이 사랑하시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There is nothing we can do to make God love us less.

(하나님이 우리를 덜 사랑하시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우리의 행위로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를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은혜에 잠기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잠시라도 자신을 돌아보면 정말 부족함 투성이인 모습에 감히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은혜다. 내 힘으로 뭔가를 이뤄낸 사람들, 적어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은혜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탕자 비유의 초점 : 은혜의 부재>

탕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의 의도는 탕자형에 초점이 있다. 탕자형은 가출한 적도, 재산을 탕진한 적도 없었으며, 늘 아버지 곁에서 주어진 일을 나름 잘 해냈다. 그러니 탕자 동생이 돌아와서 잔치를 벌이는 모습에 질투를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탕자형에게는 은혜가 없었다. 자신의 권리와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마음에 진심도 진정한 사랑도 없었고, 자발적인 순종의 모습도 아니었다. 애초에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우리의 죄성은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죄와 부족함으로 인해 좌절하게 되어있다. 중요한 것은 괜찮은 척하는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걸 회개라고 하며, 그곳이 복음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탕자형은 율법을 잘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탕자형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받을 유산과 자신의 권리를 위한 비자발적인 행위에 머물렀을 것이기 때문에 그의 삶 속에 행복과 축복과 은혜가 없었을 것이다.

탕자형은 바리새인을 상징한다. 기득권을 주장하며,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며, 그 우월감으로 율법을 어기는 자들을 비난하고 경멸하는 태도를 지닌 이들이었다. 그러니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불편했을 것이고, 예수님의 죄인들을 향한 관용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 건, 겉으로 멀쩡해 보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누가 봐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부족한 자들이었다. 

바리새인 시몬이 예수님을 집에 초대했을 때 집주인의 의무인 발 씻을 물도 내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적어도 예수님을 초대하기는 했다는 안일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인 마리아는 거의 전 재산을 털어 준비한 향유옥합을 깨어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렸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과 그 부족함으로 인한 갈급함으로 예수님께 나아와서 죄사함과 은혜의 감격을 누렸다. 빈손으로 나아와야 채워질 수 있는 은혜다. 

탕자도 그러했다. 자신이 자초한 고난의 과정에서 돌이켜 아버지를 찾았다. 과정은 훌륭하지 않았지만, 자발적인 돌이킴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행위의 값으로만 따진다면 탕자형의 태도가 맞을지도 모르고, 그건 세상의 보편적 이치이기도 하다. 

<내 모습 이대로 사랑 후 성장> 

세상은 결론과 성취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의 상품가치를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맞지만, 그렇다면 결과로 증명될 때까지는 아이들은 무가치한 존재인 것인가?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감격스러운 이유는 나의 매력점수가 넘쳐 당연히 사랑받을만해서 사랑이 이뤄진 것이 아니라 “내 모습 그대로” 누군가 나를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각자는 현재의 완성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작품이다.

"As Good As It Gets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라는 영화에 나오는 사랑고백에 난 복음의 은혜를 느끼고 전율했다.

“You make me want to be a better man.(당신은 내가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해줘요) ” 

고백한 남자는 나이로나, 인성으로나, 강박증이 있는 정신상태로나 한 여인의 사랑을 온전히 받기에 역부족인 존재였다. 이 남자의 고백에는 자신의 부족함은 인정하지만, 그래서 자격이 없다는 것도 알지만, 상대 여인의 사랑과 그 은혜에 의지하여 더 노력하고 애쓰며 성장하겠다는 결단이 담겨 있다. 

즉, '성장 후 사랑'이 아니라 '사랑 후 성장'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잘 지키고 행위나 종교의식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사랑을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도 안 되게 형편없는 내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하시니까... 그 사랑과 은혜에 감격하여 성장을 이뤄가는 것이다. 물론 몇 번의 결단과 노력만으로 성장을 온전히 이룰 수는 없다. 그러나 방향성이 중요하다. 넘어져도 주님이 변함없이 내 편이 되어주시며 사랑해 주신다는 안정감이 회개라는 기회를 통해 다시 은혜를 누리도록 해 준다.

<자녀의 상처와 부모의 역할> 

자녀들이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것만큼 보답도 하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은 생각이 있을 것이지만, 세상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이미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리에서 상처투성이인 상태인데, 부모가 또 비수를 꽂을 이유는 없다. 그럴 때 아이들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조차 혼란스러워한다. 그러고 그 무거운 짐을 아이들 혼자 지려고 하는 게 더 큰 문제다. 

그러니 기다림의 끝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있는 모습 그대로 그들을 받아주고 믿어주고 속이 문드러지는 것을 티를 내지 않으면서 아이들 편이 되어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응원과 사랑과 격려의 마음을 “이번에는 1등 할 거라 믿는다”, “다음에 성적이 무조건 오를 거야”, “재수하면 무조건 처음 대학보다는 잘 가는 거지?”, “학원비 많이 들었다. 너도 열심히 할 거니까 성적이 꼭 오를 거다”... 이런 식으로 표현해서도 곤란하다. 아이들도 사랑의 마음은 알면서도 인정 중독이 될 수 있고, 조건적 사랑이라는 인식에 불안해할 수도 있다.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해야 사랑받는 자녀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오개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성적이 잘 나왔을 때도 성적 자체를 너무 강조해서 칭찬하고, 의도하지 않았어도 기대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은근한 압박이 전해지면 아이는 자발적 배움의 즐거움을 담보로 하여 결과에만 매달리며 괴로워하게 된다. 그저 결과에 관계없이 "애썼다"는 말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나님도 우리의 행위값으로 사랑을 철회하겠다고 하지 않으신다. 그게 우리에게 안일함을 가져다주기보다 감사와 감격 속에서 자발적인 순종과 더 큰 사랑을 가져다준다.

<자유의지와 자발적 순종>

애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강압이 아니라 자발적인 순종에 가치를 두셨기 때문일 것이다. 배를 누르면 “I love you”를 외치는 인형의 고백에 설레고 감격할 사람은 없다. 설렘의 이유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자발적으로 고백을 하기 때문이다.

게임 중독을 해결하는 방법은 학교 정규과목에 편성하여 중간기말고사를 치면서 관리하는 것이라 한다. 게임이 그들에게 즐거운 이유는 자발적이고 자기주도적인 선택이기 때문이다.

자발적 순종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 스스로의 진정한 성장을 위한 하나님의 기다림과 배려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한 불순종의 가능성을 고려하면 하나님은 정말 큰 위험을 감수하신 것이다. 강제로 복종하게 하셨다면, 우리도 끝까지 은혜와 감격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부모가 되어 알게 된 하나님의 마음> 

아이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늠이 된다. 나도 부모가 되면서 하나님의 애틋한 마음과 우리를 향하신 낭비에 가까운 넘치는 사랑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의 불순종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지도 느끼게 되었고,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는 그 깊은 사랑을 삶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율법의 역할과 복음의 교육적 함의>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하늘소망을 품지만, 그것만 품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세는 그저 버텨야 하는 무의미한 과정이 될 것이니까. 하늘소망은 지금 이 순간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즐거움과 기쁨도 허락하셨다. 

완벽한 율법은 출발 조건이 아니라 도달점이다. 그리고 율법은 우리의 죄와 부족함을 깨닫게 해주고, 위험한 곳으로 나가지 않게 해주는 보호장치다.

복음은 시작점이 되어 우리 믿음의 분량대로 성장해가면서 성화를 이루게 된다. 완성된 값을 측정하여 미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복음의 출발점에서부터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며 과정 중에 즐거워할 수 있다. 부족함으로 시작했지만 끊임없는 성장의 과정에서 온전히 기뻐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공부도 그렇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는 그 지점부터 진정한 배움과 성장의 기쁨이 시작된다.

남들과 비교해서도 안된다. 주님의 은혜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시스템에 가깝다. 주님과 사랑과 구원은 비교우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개별적이고 인격적이다.

'토끼와 거북이' 우화에서 그런 비슷한 모형을 볼 수 있다.

토끼는 경주의 능력은 뛰어났지만 상대평가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었다. 교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고, 거북이한테 이기기만 하면 되는 거여서 경주 도중에 낮잠을 잔 거다.

거북이가 경주를 응할 때 애초에 토끼를 이길 생각은 없었을 것이니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시스템의 관점이었을 것이다. 승부에만 초점이 있었다면 응하지 않았을 경주였던 것인데, 거북이에게는 그저 경주를 완주하려는 자신만의 목표가 있었을 뿐 토끼의 속도는 애초에 경쟁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토끼의 속도에 부담을 가지거나 압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고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그 자체가 목표를 이뤄가는 보상이 되었을 것이며 완성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즐거웠을 것이다. 그리고 즐겁게 자기 성장만 이뤘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경주에도 이겼던 것이다. 거북이는 승패에 관계없이 과정 자체에 이미 모든 행복을 다 느꼈다. 그런데 경주에 이기는 것은 덤으로 보너스처럼 주어진 기쁨이었을 것이다.

<출발점의 중요성>

아이들을 교육할 때도 아이들 자신의 부족함이나 연약함이 드러나는 시작점을 알려주고 그곳으로 돌아갈 용기도 주어야 한다. 세상에서, 학원에서 결론만 정해놓고 아이들을 따라올 테면 따라오라는 식으로 몰아가는 것에 흔들릴 필요는 없다. 그 과정에서 억지로라도 그 길을 가지 않으면 영영 낙오되고,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고, 부모님의 실망과 근심거리가 될 거라는 억압된 심정에서 아이들을 해방시켜주어야 한다. 

내가 강연에서 행복교육뿐 아니라 자기주도학습이나 수업이나 학습코칭에서도 변함없이 강조하는 것이 그 출발점이다. 각자의 출발점은 모두 다르고 그 속도도 다름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본으로 돌아가라!" 이 말은 복음적으로 볼 때 "회개하라"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부족함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학원 숙제 분량, 선행 진도, 학원에 머무는 시간 등으로 자신을 증명하려고 하는 것은 행위나 종교의식 등으로 구원을 받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이들 마음속에 감격과 은혜가 있으려면 오히려 조급함과 불안함을 넘어서 그 단순함의 원칙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그게 더 어렵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행복교육을 외치는 것도 어렵다. 인간의 본성은 뭔가 더 있어야 하고, 더 눈에 보여야 하고, 더 복잡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직전 고등학교에서 영어멘토링 학습코칭할 때 사교육에 빠지진 않았지만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불안감 때문에 무작정 친구들처럼 모의고사 문제집만 풀려고 했던 한 학생에게 당장 중단하고 기본으로 돌아가서 내가 제시하는 기본단어, 문법, 구문에 집중하라고 했었다. 그 학생은 “회개하라”라는 명령에 복종하듯, 바로 나의 인도를 따랐다. 내가 제시하는 단어를 학습하며 멘토링학습코칭을 받았고, 수업에 몰입하며 결과에 관계없이 그 과정을 즐거워하며 행복해했다. 1등급이 목표는 아니었는데, 그 과정을 누리다가 그저 덤으로 얻는 보너스처럼 1등급을 결과로 얻고 기뻐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복음의 눈으로 바라본 행복교육과 자녀교육>

결론을 정해 놓은 과정은 즐거울 수가 없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늘 충분치 않다는 압박과 좌절감이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초라한 출발점도 괜찮다고 진심으로 격려하면서 출발점을 정해주었다면, 역량껏 가는 데까지만 가면 되는 거다. 그러면 사소한 성장과 성취조차 감격스럽게 반응할 수 있다. 아니라면 결과를 증명할 때까지 늘 부족하다는 심경으로 대다수의 시간을 고통 속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난 아이들을 그런 현실로부터 지켜주고 싶다. 그래서 최전방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학부모, 교사 강연 초대가 있으면 스케줄이 겹치지 않는 범위에서 무조건 출동한다. 물론 학생들을 직접 만날 기회라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마치 복음을 전하듯, 행복교육을 전하려는 몸부림 중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행복걸음이 되길, 과정을 즐기고 누리며, 결국 마지막 걸음이 내디딘 그곳이 도달점이 되길... 마치 구원받은 자로서 매일 성화를 이뤄가듯, 감격과 은혜 안에 거하길...

아이들이 의아해하며 이렇게 묻는다. 이렇게 행복하고 편안해도 되나요? 

나의 대답... 그래도 된다. 그저 누리렴.

내 영향을 받은 큰 딸의 고3 좌우명인 “행복할 만큼만”처럼...

아이들은 부족함 각성의 순간, 가난한 마음으로만 배움의 의지가 생긴다. 그래서 부모는 해줄 수 있는데도 참고 기다리며 잔소리 안 하는 가장 어려운 미션을 이뤄야 한다. 사실 그게 뭔가를 해주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넘어지는 것은 아픔이긴 하지만 아이들의 특권이기도 하다. 넘어져야 일어날 수 있다는 역설이다. 처음부터 과녁을 맞히는 것은 오히려 불안하다. 영문도 모르고 운 좋게 얻은 것은 그다음에 빼앗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영점조정의 시행착오 과정은 정확한 음을 내기 위한 삑사리이며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다. 처음부터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사교육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인데, 알고 보니 사교육의 울타리 안에서 이미 넘어져 있었고, 울타리에 가려서 보지 못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되면 더 가슴 아픈 일이 될 것이다. 

사춘기 자녀를 향한 부모의 기다림을 잘 표현한 말이 있다.

다정한 무관심 - 무정한 무관심과는 다르다. 

부모는 관객이다 - 관객은 거리를 두어도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실패하면서도 스스로 일어날 수 있게 기다려주어야 한다. 부모의 인내가 아이의 더 큰 성장을 가져오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 대신 늘 기도하면서 아이가 손을 내밀 때 언제든 손을 잡아줄 준비가 되어 있으면 된다. 한시라도 빨리 부모가 먼저 손을 내밀수록 실수를 덜 하고 더 안정적인 길로 갈 수 있음에도 그냥 기다리면서 지켜보는 건 정말 고통스럽다. 그러나 다정한 애정이 담겨 있다는 건, 기다려주면서 언제든 달려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방임이나 방치와는 구별된다. 그게 더 큰 사랑일 수 있음을 인정하며 죄책감 없이 부모만의 즐거운 일에 집중해도 좋을 것 같다. 그래야 아이들도 마음 편하게 자신의 일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런 응원의 메시지를 전한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메시지처럼...


성취와 좌절의 그 어떤 순간에도 변함없이 널 응원하고 지지한다.

과정을 즐기고 누리며, 결국 마지막 걸음이 내디딘 그곳이 도달점이면 된다.

모든 선택을 존중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길.

의미 없는 경험은 없으니 무슨 일을 겪든 성장할 거다. 실연의 아픔으로도… 

행복할 만큼만… 그러다 보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행복해하며 성공을 이뤄갈 거다.


행복과 성공의 본질은 의도적으로 추구하지 않는 데 있다. 추구하지 않은 과정의 끝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탕자 아버지의 기다림이 다시 떠오른다.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으면 아직 상거가 먼데, 맨발로 달려 나가듯 맞이했겠는가. 그럴 거면 고생할 거 알면서 못 나가게 막았어야 했는 거 아닌가? 아니다. 강압이 아닌 자발적 순종이 더 중요하고, 자발적 성장을 이루도록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부모로서의 권리를 내려놓은 더 힘든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게 우리가 누리는 축복 아닌가. 하나님의 인내하심과 기다림이 없었다면 우린 살아남을 수조차 있었겠는가? 우리에게 임하는 은혜의 감격, 변화, 성화는 그 사랑에서 시작된다. 

우리 아이들이 은혜를 누리게 하기 위해 집에서 일부러 쫓아낼 수는 없지만, 탕자형처럼 영혼 없이, 행복 없이 살기를 바라는가? 

혹은 아이들의 걱정과 행복의 몫까지도 부모가 대신 지려 하는 건 아닌가?

어른의 즉각적인 개입보다 기도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구하며 애정과 인내로 조금만 더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삶이 아닐지?

결과에 얽매여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 사랑받는 회복된 자존감으로 한걸음 한 걸음이 행복하며, 결국에 하나님의 궁극적 인도하심을 놀라움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설렘, 그 모든 은혜의 과정이 '복음으로 물든 자녀교육'이 아닐지?

작가의 이전글 보급형(?) 글쓰기 비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