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급형(?) 글쓰기 비결
평생을 존경해 온 선배님, 그리고 오래도록 편안하게 잘 소통이 잘 이뤄졌던 후배와 자리를 함께 했다. 선배님께서 학기 시작한다는 격려의 의미로 저녁식사를 사주시고는 서열 2위인 내게 기회도 주지 않으시고 디저트까지 쏘셨다. 뵐 때마다 늘 밥값 먼저 계산하기 신공에 막혀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다. 이번에 식사를 사주시겠다는 것도, 계산을 하시겠다는 것도 그저 기쁜 마음으로 받기로 했다. 어차피 일어날 일이면 그냥 받아들이고 깊은 감사를 아낌없이 표현하는 것이 더 현명한 일일 거라 생각했다.
서로의 안부와 근황을 나누고는... 어쩌다 보니 이야기의 주제가 “글쓰기”로 넘어왔다. 거의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던 나는 무슨 전문가가 된 듯 흥분해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나이가 더 들어서인지 귀가 자꾸 닫히고 입이 자꾸 열리는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말을 시작하기 전의 신중함은 사라지고 말 다하고 나서 후회감만 늘어간다.
선배님도 블로그에 글쓰기를 하시다가 브런치 글쓰기를 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듣자마자 내가 말할 수 있는 무대가 펼쳐졌다고 생각했던 거다.
글쓰기의 가장 큰 적은 완벽주의라고 생각한다. 선배님은 리서치와 소논문 수준의 글을 체계를 갖추어 완성의 단계까지 고민하며 말 그대로 고통에 가까운 작업을 하고 계셨다. 거기다 망설이며 아직 올리지 못한 글도 많은 듯했고, 글쓰기에 쏟은 정성과 노력만큼 퇴고에도 전력을 다하고 계셨다.
그래서 난 그런 깊은 글도 계속 쓰시되, 나와 같은 글쓰기 방식을 추천해 드렸다. 즉, 저렴한 글쓰기, 박리다매형 보급형 글쓰기였다. 말하듯 편하게, 중고등학생도 알아들을 정도로 쉽게, 가급적 오탈자는 없도록 하되, 마치 작가와 에디터와 독자를 겸직하는 부담이 아닐 정도로 작업하고, 발행클릭을 망설이지 않고 편하게 그냥 질러버릴 것도 권해드렸다.
그리고 내가 아는 얘기만 쓰는 걸로.. 사실적 글쓰기는 정보를 더 찾아보고 신중해야 하지만, 그 외의 이야기들은 내가 체험한 나만의 이야기를 내 한계 내에서 과도한 욕심 없이 써 내려가는 것이다.
후배가 물었다. 글쓰기 하면 뭐가 좋냐고.
글을 쓰면서 객관화가 되어 힐링과 치유의 효과도 있고, 성장의 기회가 된다고. 성장해서 글을 쓰기도 하지만 글을 쓰면서 성장을 하기도 한다고. 때론 글을 다 쓰고나서는 시작할 때 생각하지도 못했던 결말을 확인하면서 놀라기도 한다고. 쓸 거리가 있어야 글을 쓰게 되지만, 때로는 글을 쓰기 위해 쓸 거리를 만들게 된다고. 그게 독서나 영상매체 감상이나 만남이나 뭐든 직간접 체험을 망설이지 않게 된다고...
선배님이 말씀하셨다. 난 좀 성실해서 꾸준하게 쓸 수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말씀드렸다.
키워드는 “유쾌한 강제성”이라고. 강제성은 자신과 독자와의 암묵적 약속이고... 그 대신 유쾌한 정도에서 멈춰야 했다고... 경계를 넘어서서 불쾌한 느낌으로 가면 블로그나 브런치 활동을 지속할 수 없는 장벽이 생긴다고...
선배님은 책을 다 읽고 분석하고 전체의 체계를 잡아 완결된 형태의 리뷰를 쓰시는 스타일이시지만, 난 그저 한 구절 인용해서 나의 느낌을 단편적으로 쓰는 게으름을 선택한다고.. 그러면 유쾌한 경계를 넘어서지 않아도 된다고...
난 글쓰기 전문가이신 선배님 앞에서 감히 주름 잡는 이야기를 했지만, 선배님께 필요한 용기는 그 전문성을 살리는 것보다 나 같은 수준으로 다운그레이드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감히 후배로서 조언을 드렸다.
또 나처럼 부족함이 많은 후배의 이야기라면 더 와닿으실 것 같아서 likability를 언급하면서,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많은 공감과 응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니 오히려 전문성의 짐을 좀 내려두셔도 될 계기가 될 거라 생각했다.
예전에 옆자리에서 고3 동학년을 하면서 많이 기대고 많이 배웠는데, 그럼에도 아낌없이 베푸시고도 더 베푸실 기회를 찾으시고, 후배에게도 배우려고 하시는 겸손하신 태도에도 늘 깊은 감화를 받았는데... 그때 이후 시간이 흘렀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이셨다.
나는 수준을 업그레이드하고, 선배님은 좀 더 다운그레이드 하셔서 접점을 찾아 더 공감할 기회를 기대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