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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03. 2023

이상적인 부모와 자녀의 대화

<대행사>라는 드라마(ep.16)에서 본 대화...


아빠 나 용서해 줘.

- 뭘?

아빠가 바라는 대로 가 아니라 나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거.

- 그게 무슨 용서할 일이냐? 응원할 일이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딸이나, 딸이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걸 응원하는 아빠나... 둘 다 감동이다.

정말 이루기 어려운 미션임을 그 입장이 되어보지 않으면 짐작할 수 없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깊은 상담을 하다보면 의외로 자신에게 투영된 부모의 기대 때문에 상처받는 경우가 너무 많다.

어른의 시각에서 분명히 절대 아이들의 선택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는 게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심지어 바람직한 선택이 아닌 것도 아이들 스스로 선택의 결과를 체험하며 선택의 무게에 대해 실감하게 하는 것이 애초에 경험하지 못하게 막아서는 것보다 더 큰 성장을 이루기도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는 객관화시켜 그런 조언까지 하기도 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이에 대해서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도 진로를 정할 때, 결혼할 때 아버지의 반대를 겪어야 했다. 평소에 순종적이었으며 거의 무증상 사춘기를 지냈던 난, 정작 삶의 가장 중요한 선택에서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영어 교사에 대한 꿈을 아버지는 인정하지 않으셨다. 90년대 초반까지도 남자가 교사한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어른들이 많았다. 경제적 형편이나 지위적인 면에서 더 올라서야 한다는 성취지향적인 생각이 강했던 탓이다.


내게 투영된 아버지의 꿈은 법대였다. 이왕이면 서울법대라면서 이루지도 못할 꿈을 아버지는 혼자 꾸고 계셨다. 일부러 성적을 떨어뜨린 건 아니지만, 서울법대 성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의 서울대 영어교육과 지원을 말릴 수 없었다. 서울대라는 명예가 있었기 때문에 영어 교사의 꿈도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셨다.


그러고는 입시에 실패했다. 대학입시에 실패한 것 외에도 스카이대 합격하면 고등학교에서 약속했던 4년 장학금의 계약도 날린 데다가... 내가 하고 싶은 영어교사의 꿈을 한 번 더 주장할 명분을 얻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도 덤으로 얻게 되었다.


재수의 기간은 평소 실력이나 평소에 얼마나 성적이 잘 나오는 지로 안심할 수 없는 과정이다.

서울대 법대는 아니어도 영어교육과에 다시 도전할 성적이었고, 연고대는 더 확실했지만... 나의 소심함으로, 또 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해서 지거국 경북대 영어교육과를 지원을 선택했다. 아버지를 설득했던 명분은 경북대에서 가장 입결이 높은 학과라는 것이었다.


원서를 쓰고 나서 들키지 않으려고 아침에 세수할 때마다 울었던 기억이 난다. 수도권에서 살다가 고3 9월에 갑자기 경상북도로 이사하게 된 계획하지 않았던 변수로 인해, 스카이대학 외에 그전에는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대학을 지원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후 학력고사 성적이 결과적으로 서울대 영어교육과에도 합격할 성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질없는 미련이 담긴 자책, 그 이상은 아니었다.


난 집 가까운 지방대를 진학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온전한 독립을 이루지도 못했다. 매주 아버지가 시무하시는 교회에 와야 했다. 단 한 주도 빠짐없이...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첫 애가 생기기 전까지도 아내와 함께 매주 들어가야 했다.


그 당시 지거국 입결이 높았던 것이 먼저인지, 아니면 우수한 학생들이 그냥 지거국에 남기로 해서 입결이 올라가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많은 학생들이 가정 형편 때문에 또 부모님의 반대로 인해 인서울을 하지 않는 일이 무척 흔했다.


가정 형편 때문에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맞는 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시골교회 목회하시는 아버지가 늘 그렇게 말씀하셨고 난 그게 절대 넘어설 수 없는 현실의 벽이라고 생각했었다.

4년 전액 장학금을 받고도, 4년 내내 과외를 하면서 내 생활비는 물론 가정에 보탬이 되는 생활을 계속 이어갔다. 가정 형편이 어렵다는 이유로 과외로 받은 보수를 전부 드리고 용돈을 받아썼다. 그 용돈으로는 원하는 책을 마음껏 사보지도 못할 금액이었다. 그래서 집에 얘기하지 않고 추가로 과외를 한 건 더 하면서 책을 사 보고, 집에 얘기하지 않는 용돈을 만들어 생활했다.


재수하고 대학 선택할 때 지방대를 진학하는 것이 나의 소심함 때문이었는지, 아버지의 개입이 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거나 난 내가 간절히 원하는 영어교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 내게는 서울대냐 경북대냐의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경북대를 선택하면서 난 대구시민이 되었고, 나이가 더 들어가서도 집으로부터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도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었다.


난 그래서 대구시민인데 서울말 비슷한 말투를 쓴다. 일상 대화에서는 억양까지는 흉내 내지 못하는 어설픈 대구말을 섞어 쓰지만, 수업할 때나 강의할 때는 고3 때까지 쓰던 경기도 말투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친했던 과 선배의 동생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아버지의 강력한 반대에 또 부딪혔다.

어느 정도 만남이 지속되고 나서 혼자 예비 장인어른과 장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선배가 태워주는 차에 아내와 동행해서 인사를 드리려 했다. 아버지는 밖에 나와보시지도 않고 돌려보내셨다. 사전에 허락 없이 불쑥 찾아온 예의 없음에 대한 반응도 있었겠지만, 그전부터 만남을 반대하셨기 때문에 결혼으로 이어지는 문턱을 넘지 못하게 막으시는 느낌이었다. 사람을 보고 반대하시는 건 아니었다. 아내는 피아노 전공을 해서 피아노학원 강사로 일하고 있었지만 부부교사는 되어야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살 수 있다는 현실적인 조건만 내세우셨다. 난 사랑을 택하겠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아버지는 낭만적인 건 오래가지 않으며 현실을 마주하면 후회할 거라고 말씀하셨다.


집안으로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아내를 생각하니 그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헤아릴 수 없어 괴로움으로 잠 못 이루고.. 다음날 새벽 기도가 끝난 시간부터(새벽기도는 아버지가 인도하시니까) 교회에 가서 1시간 반 이상 울면서 기도했다. 그 아픔과 상처를 치유해달라는 것이 주된 기도 내용이었다. 부모님은 새벽에 내가 방에 없는 걸 보고 혹시 소심한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 급걱정이 되셨다고 했다.

그리고 3일 후 아버지가 전화하셨다. 널 믿으니 원하는 대로 하라고...


그러고 5번째 계절을 맞이할 때쯤 26세의 어린 나이에 우리는 결혼을 했고 그때도 지금도 딸들도 함께 여전히 행복하다.




아버지는 처음에 반대하셨던 두 가지 선택을 결국 받아들이셨다. 난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에 대해 아버지께 미안한 마음이 없었고 용서를 구할 생각도 없었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전격 응원하실 마음도 없으셨지만... 시간이 지나서는 응원의 마음을 전하셨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는 그때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다 비워내고 내 선택이 맞았다는 걸 인정하셨다.

교사가 된 초반에는 평교사 신분에 머물지 말고 교수를 하거나, 교장, 교감으로 승진하라는 기대와 압박이 계속되었지만, 난 꿋꿋이 평교사에 머물렀다.

아버지는 한참 후에야 포기하셨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진심으로 전하는 교육적 영향력을 이제는 인정하신다. 물론 IMF가 터지기 훨씬 전인 90년대 초반에는 고려조건이 아니었던 정년이 보장된 안정적인 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선택의 옳고 그름보다, 선택에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진심과 최선을 다해 삶으로 증명해냈고 교사로서도 남편과 아빠로서도 과분할 정도로 행복했고 또 행복하다.

그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너무 감사한 일뿐이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아버지의 반대는 내 삶의 여정에 사소한 것이었다. 내 삶은 내가 결정하고 책임도 내가 지는 거였다. 결국 내 주체적으로 삶의 경로를 정했고, 부모님의 지지나 응원을 받는지 아니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딸을 키우면서 입장이 바뀌었었다. 절대 허용할 수 없을 것 같은 영역까지 딸의 선택을 존중하려 했던 건, 아버지의 반대를 겪은 상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일 수도 있었다. 물론 큰딸이 베이스 기타 전공하겠다고 고집부렸던 고1 때는 호되게 야단치며 반대하기는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딸의 열심과 진심을 봤기 때문에 결국에는 예담학교 방과후형 위탁교육을 허락해 주었고... 딸은 한 학기 반 만에 스스로 그 진로를 접고 공대생이 되었다. 그마저 나의 기대대로 된 건 아니었지만...


둘째 딸도 실용댄스를 고민할 때 독립을 이뤄서 하는 건 말리지 않겠지만, 그전에는 절대 투자해 줄 수 없다고 확실히 뜻을 전달했다. 전공을 하지는 않지만 그에 못지않은 부캐로서의 꿈을 이어가도록 학원을 보내주면서 선택을 존중하고 있다.


여전히 전적으로 아이들을 응원해 주기는 어렵다. 어차피 아이 뜻대로 할 것을, 망설이지 바로 응원하는 마음을 보이지 않았던 것에 대한 아쉬움도 있지만...


어쩌면 반대가 있기 때문에 그 꿈이, 그 길이 정말 절실한지, 정말 그 길을 가야 하는지 돌아볼 테스트의 과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변명 같은 생각도 든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흔한 말을 일반화시킬 수 없지만, 부모의 뜻을 강요할 수 없다는 진리를 제대로 담은 말이라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의 이 대화를 들으면서 가슴이 찡했다.


나는 멋있게 저런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망설임 속에서도, 무언의 어색함 속에서도... 아빠의 응원의 마음이 딸들에게 가닿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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