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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06. 2023

번개 하듯 9년 전 제자들을 만나다

새 학년 첫날의 일기 같은 글에 장문의 댓글이 달렸다. 9년 전 대구여고 제자의 글이었다. 

댓글이 너무 감동이 되어 이미 완성해서 올린 블로그에 추가로 글을 덧붙였다.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3032770768


제자에게 이런 댓글을 달아주었다.


너의 댓글로 내가 다시 젊어진 상상을 잠시 했단다.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날 기억해 주고 이렇게 정겨운 댓글까지 달아주는 제자가 있다는 게 내겐 너무 큰 선물 같은 감사함이란다. 너희들 이름을 빠짐없이 다 외웠던 건 팩트지만, 세월과 망각의 흐름에 저항하지 못해 바로 너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해서 너무 미안하구나ㅠㅠ 너의 블로그에 가서 떠오르는 고1 학생의 이미지를 얼핏얼핏 보이는 너의 모습과 비교하면서 확신을 얻고 싶었지만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네. 지금 가장 후회하는 게 그때 들고 외웠던 사진 대장을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 나도 미안한 마음에 변명을 구구절절하고 있네.


대구를 떠나서 더 성장하고 다채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 같구나. 방황이 아니라 너에게 가장 맞는 길을 찾아가는 중이겠지. 그래도 학기도 꽉꽉 채우고, 집에서 먼 곳에서의 인턴 같은 일도 고등학교 야자하던 스케줄에 비할 것이 없다며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하기까지 하네. 이렇게 감성적이고 많은 서사를 담은 댓글은 처음인 것 같아. 몇 번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내 개학일기 같은 거에도 반응해 줘서 너무 고맙고... 무엇보다 영어간식을 먹고 자랐다는 말에 울컥했단다. 아직도 난 대구여고에서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어 교사 대상 강연할 때마다 대구여고 이야기는 절대 빠지지 않는단다. 학교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그곳을 채웠던 너희들에 대한 그리움인 거겠지. 너무 행복한 나날이었는데 현실일 수 없어서 안타까운 손에 잡히지 않은 그 무엇...

임용 준비하는 동창들이 내 글을 읽고 있다는 소식도 놀랍구나. 그 소식을 전해줘서 정말 가슴 벅차다. 너가 내 블로그 독자라는 사실도...

그리고 대댓글 뒷부분에 응원의 마음으로 식사나, 차를 한 번 사줄 수 있으니 연락하라고 내 번호도 남겨두었다. 부담되어 연락 안 해면 그저 까인 걸로 알 테니 마음 쓰지 말라고 해놓고는...

바로 연락도 없고, 내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는지 소심한 마음에 연락하라는 뒷부분을 지웠는데...

연락이 왔다. 인턴으로 일하는 데서 야근까지 하고 너무 바빠서 이제 연락한다면서, 약속시간과 장소를 잡았다.

그리고 약속시간이 가까워오자 다른 제자에게 연락이 왔다. 그 전에도 카톡으로 몇 번 연락을 하며 근황을 전하던 제자였는데 합류해도 되냐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환영이라고 하며 초대했다. 

약속된 장소에 한 시간쯤 일찍 나가서 일을 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 시간 15분쯤 전에 멀리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바로 알아 보고는 눈물이 날 뻔했다. 순간 예전의 그때로 돌아간 듯한 착각까지 할뻔 했다.

너희들은 세월의 흐름을 비껴간 거냐고... 그대로냐 하니까.. 나에게도 그대로라고 하면서 덕담을 주고받았는데, 제자 한 명이 우리에게 그대로라면 칭찬인지 모르겠다고 농담을 던졌다.

나중에 합류한 제자는 동아리도 함께 한 학생이었고, 졸업 후에도 연락을 했었던 터라 바로 알아보았고, 처음에 만나기로 한 제자는 얼굴 보는 순간 생생하게 고1 때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댓글에서 구구절절 미안하다고 한 말 취소한다고 했다.

특히 처음 연락한 제자는 오히려 졸업하고 나서 더 말을 많이 하고 친해진 것 같은 이상한 상황이었다. 

9년의 시간, 함께 공유하지 못한 과정은 건너뛰고 현재에서의 공통적인 연결고리인 고1 때와 고3 졸업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대화를 나눴다. 함께 했던 친구들과 선생님들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을 정비했다.

한참 이야기를 하면서도 난 꿈 꾸는 것 같다고 했다. 마치 기억 속의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난 듯한 느낌이라서...


그렇게 우린 적지 않은 세월의 흐름을 넘어서고 있었다. 제자들은 그 세월의 흐름으로도 인성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와 최선과 진심을 다하는 열의도 내 기억 속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연락했던 제자와는 졸업 전에도 이야기를 길게 나눠본 기억은 없어서 그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제자의 고1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야기하니까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난 모든 학생들의 이름을 다 외우고, 평소에 수업할 때나 생활하는 모습을 관심 있게 잘 지켜보고 우리 반이 아니라도 언제든 상담해 줄 준비가 늘 되어 있었지만, 내 성격이 수업할 때는 외향적인 것처럼 준비해서 무대에 오르듯 수업을 하지만, 본디 내성적이고 소심해서... 내가 먼저 다가서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오랜 시간 후에도 이렇게 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은 제자와의 만남에서 그 때 내가 먼저 다가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 마음도 들었다. 그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게 지금 만나는 학생들을 더 세밀하게 살펴봐야겠다.


그 학생은 고1 때 나에게 받았던 학습지와 정성껏 필기한 걸 아직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게 어떤 마음일까 상상이 되었다. 내게 배운 걸 소중하게 간직하고 잊지 않으려는 의지가 담긴 것 같아서 내가 정말 중요한 선생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는 감동이었다. 그 학생은 아마 다른 선생님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진심을 다하고 예의를 갖추었을 것이다.

영어교사 연수를 할 때 대구여고에 꼭 갈 것을 권장하곤 한다. 영어를 특히 잘하는 교육특구 여고라서, 영어교사라면 늘 긴장감 속에서, 좋은 학원수업과 인강을 많이 접해서, 바로 좋은 수업을 분별할 능력을 갖춘 학생들이어서 늘 표정으로, 수업 반응으로 베타테스터처럼 모니터링을 실시간으로 해주니 공부를 더 열심히 안 할 수가 없고 영어교사로서 실력이 안 늘 수가 없다고... 그러니 영어교사로서의 삶은 대구여고 전과 후로 나뉠 거라고...


교사가 학생을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학생들은 교사가 세팅해 준 무대에서 본인들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고, 오히려 학생들이 교사를 더 성장시키기도 한다. 나를 가장 많이 성장시킨 학생들이 4년간의 대구여고 학생들이었고, 오늘 제자들은 그 대구여고 학생들을 대표해서 내게 와서 사실 여부를 확인시켜준 것 같았다.


나중에 합류한 제자도 다른 제자와 졸업 이후에도 해외여행도 같이 가고 계속 연락하고 만나는 사이라고, 그래서 함께 오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편입하고, 취업해서 지내는 근황을 듣고 뿌듯해졌다. 그 제자가 생각하는 최종 목표 달성은 아닐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기에 이룰 수 있는 것에 대해 뿌듯해하고, 성장하는 과정으로 생각하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결론을 정하지 않은 매 순간 과정의 행복을 누릴 것을 인생 선배로서 당부하기도 했다.


제자들이 나의 말투나, 입 가리고 말하고 웃는 모습이 기억 속 그대로라고 신기해했다. 내 말 한마디에 모두 격하게 웃고 반응해 줘서, 요즘 들어 말이 부쩍 많아진 나로서는 수업하듯이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고1 때 내 수업 때 몰입했던 것처럼 잘 들어주었다. 그때의 행복감이 다시 떠올랐다. 내 말 한마디도 그냥 흘러나가지 않은 듯한 감격스러운 수업의 분위기...


얼마 전 공공기업에 취업해서 날 만나러 온 제자와도 친한 사이였고 그 학년 학생들은 대구여고에서도 나와 인연이 더 있을 뻔했던 특별한 교감이 이뤄진 학생들이었다. 학년부장님이 2학년 함께 올라가자는 것도 내가 거부했고, 3학년 함께 하자고 할 때는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하면서 함께 하지 못한 것을 서로 아쉬워했었던 학년이었다. 


난 또다시 제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때 당시에도 행복했고, 이후에는 그때 수업 준비하면서 성장한 것과 그 반응으로 보여준 성취의 기억으로 생긴 자신감으로, 강연 나갈 때나 수업할 때 대구여고에서 통한 수업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있다고 하니까... 정말 그랬다고 증언이라도 해줄 것처럼 반응을 보여줘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둘 다 바쁜 일정이 있어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했지만...

한 제자의 말처럼, 대구여고 시절의 학생들이나 선생님들은 늘 연락하며 지내지 않아도 세월의 공백을 뛰어넘어서도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말을 했다. 그렇게 서로에게 진심을 다하던 아이들이어서 그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졌다. 9년의 공백을 넘어서 이렇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나중에 합류한 제자는 내일 해외출장을 앞두고 찾아왔다고 했고, 처음 연락한 제자는 다음 주 인턴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는 바쁜 일정 중에도 일부러 시간을 냈다. 더구나 난 그들에게 담임도 아닌 1학년 영어교과 담당이었을 뿐이었는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날 찾아준 제자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다음을 기약하고 아쉽게 돌아섰다. 이후의 만남이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에게 진심을 다했던 추억은 허상이 아닌 실재였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현실에서 인연이 이어지는 것과 관계없이 제자들의 행복을 응원하고 싶다.




이 글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임용 준비하는 제자에게... 

끝까지 힘내서 꼭 꿈을 이루길 응원한다. 너무 힘들 때면 비밀댓글로 내게 찡찡거려도 된다.

지금도 물론 열심히 하고 있겠지만, 너만의 꿈이 아닌 너를 만나서 행복해질 학생들을 위해서 조금만 더 힘내렴. 

지금의 간절함과 성장통까지도 이후 진심으로 학생들을 교육할 때 발휘될 소중하고 의미 있는 자산과 사명이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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