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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08. 2023

당신의 마음에 영화를 처방해 드립니다 – 전우영

존경하는 선배를 뵈었다. 늘 존재 자체로 내게 큰 힘과 힐링이 되어주시는 분이다. 나이가 들수록 겸손과는 거리가 멀어진다는 통념을 깨주셨던 분이기도 하다. 

그분처럼 겸손해지려 노력했지만 

Not even close!(택도 없다)


얼마 전 귀한 만남에 식사와 디저트까지 얻어먹은 풀 패키지 은혜 세트에 조금이라도 보답을 하려고 책 한 권을 선물해 드렸다. 요즘에는 주소를 몰라도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고 카톡이나 문자로 전달하면 선물 받으시는 분이 직접 주소를 입력할 수 있어서 너무 편리하다. 


그런데 선배님은 답례로 내게 책 선물을 또 하셨다. 

선배님은 나의 취향을 제대로 파악하고 계셨다.

이 책의 부제처럼 붙은 문구가 이랬다.

<영화를 사랑한 심리학, 심리학이 새겨진 영화>


평생 사랑에 빠져있는 영화와 심리학을 한 번에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책장을 넘기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책에서 소개한 영화와 드라마 46편 중, 내가 이미 본 것만 40편이어서 매우 뿌듯했다.

확실히 이미 봤던 영화에 대한 글을 읽으니 더 몰입이 되고 문장 하나하나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혹 안 봤던 영화라도 작품에 대해 설명해 주면서도 결말이나 디테일은 각자 감상의 몫으로 남기는 느낌이 있어서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일상생활과 접목하여 설명하는 건, 심리학 교양서의 전형적인 틀이겠지만, 영화나 드라마라는 또 다른 삶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 새로우면서도 친근했다. 

작가의 전문성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이론서에 갇힌 학문이 아니라 강의실 밖 세상으로 확장하여 전공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공감할 수 있게 수업하듯 글을 쓸 수 있다니. 책 내용의 유익함을 넘어서 나의 전문성을 돌아볼 기회도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이 이렇게 실감 날 수가 없었다. 

교사의 교재연구는 텍스트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치열한 삶으로 살아내어 얻은 따뜻한 시각으로 학문 이상의 것을 전달해야 하며, 눈높이에 맞추되 나만의 전문과목에 대한 체계성과 깊이로 우려내어 쉽게 이해가 되면서도 그 이상의 깨달음과 감성과 감동을 담아내는 수업모형을 꿈꿔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소개된 영화나 드라마는 이 책의 기획의도와 상관없이 삶의 깊이를 더해 줄 좋은 작품들이므로 이번 기회에 함께 감상해도 좋을 것 같다.


51개의 심리학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 스토리에 녹아들어 제시되고 있는데...

난 그중 두 부분만 발췌하여 내 생각을 더해보려 한다.





1 왜 내 인생에만 비가 내리는 걸까?

초점주의 오류 : Midnight in Paris


현재보다 르네상스 시대가 더 매력적인 이유

도대체 왜 현재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초점주의 오류

현재의 삶에는 수많은 사건이 발생한다. 사랑하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이런 일들은 우리 인생 스토리의 축을 이루는 중심사건이다. 하지만 현재의 삶에는 중심사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주변 사건들이 더 많다. 중심사건을 완성하기 위해서, 또는 삶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수행하고 겪어야 하는 일들이 현재에 널려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중심사건은 수많은 주변 사건들을 수반한다. 예식장 잡고, 청첩장 돌리고, 신혼여행 예약하고, 이 바쁜 와중에도 연말 정산 마감일은 하루도 봐주지 않고 다가오고, 음식물 쓰레기는 악취를 내뿜기 전에 내다 버려야만 한다. 결정적으로 결혼식 날 비가 내린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재의 중심 사건만 고스란히 즐길 수 없다. 현재가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시절이 되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조금 떨어져서 삶을 지켜보면 주변 사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의 사건, 혹은 다른 사람이 경험한 사건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중심사건에만 주목하고 주변 사건의 영향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교의 사회심리학자인 티머시 윌슨 Timothy Wilson 등의 연구자들은 이를 초점주의 (focalism) 오류라고 명명했다.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는 예쁜 신랑, 신부와 아름다운 결혼식만 보인다. 당사자들이 결혼 과정에서 처리해야 했던 귀찮고 짜증 나는 수많은 주변 사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하객들은 당사자들이 실제로 느낀 행복감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과장된 예측을 하는 경향이 있다.

 

왜 내 인생만 우중충한 걸까?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NS)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들은 다 저렇게 행복하게 사는데,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우중충하지?' 사회적 관계망서비스에 올라온 사진들은 모두 환하다. 해외여행에서부터 유명 음식점 사진까지 승리의 브이를 하며 활짝 웃고 있는 사람들. 자신이 바로 인생의 승자라고 외치는 것 같다. 그들의 인생은 단순명료하고 행복해 보인다. 오늘 하루도 시시콜콜한 일상과 씨름하고 있는 내 인생만 복잡하고 골치 아픈 듯하다. 왜 내 인생만 이렇게 복잡하고 힘들까?

타인의 삶에서 우리가 주로 보게 되는 것은 중심사건들이다. 주변 사건들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나 아주 가까운 친구 몇 명에 불과하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우리는 타인의 중심사건들만 보고 상대방이 얼마나 행복할지 추정한다. 그런데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는 타인의 삶에서 중심사건만 보는 초점주의 오류를 극대화하는 역할을 한다.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에 올라온 사진들은 인생의 중심사건 중에서도 좋은 것들만 고르고 고른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특정부분만을 선택하고 편집해서 올린 것이다. 심지어는 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는 해외여행 사진 속에서 승리의 브이를 하고 있는 사람의 인생에도 주변 사건들은 넘쳐난다. 하지만 사소하고 구질구질한 주변 사건들은 사진까지 찍어서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는다. 덕분에 우리는 타인이 공개한 중심사건에 대한 사진 몇 장만으로 그들의 삶이 내 삶보다 엄청나게 더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빠지는 것이다.

 

현실에는 현실의 비가 내린다

길, 아드리아나, 그리고 고갱이 열망하는 시대는 그들의 기억 속에 오직 중심사건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들이 흠모하는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라는 중심사건만 있기 때문에 그 시절이 황금시대로 보이는 것이다. 골치 아픈 주변 사건들로 넘쳐나는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시절이 과거에 있었다고 착각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옛날이 좋았다"라고 말하게 되는 것도 중심사건만 주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부모님 세대만 해도 꿈과 낭만이 있었는데,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하루하루 팍팍하기만 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현재를 아름다운 시절로 살 방법은 없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 길은 새로운 사랑을 만난다. 그녀와 함께 길을 걸으려고 하는 순간,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도 없는데, 사랑이라는 중심사건이 시작되려는 순간에 비라는 번거로운 주변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사랑의 시작을 망칠지도 모르는 비. 하지만 비가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길에게 그녀가 말한다. 젖어도 상관없다고, 파리는 비가 내릴 때 가장 아름답다고 현실에는 현실의 비가 내린다. 그래서 현실은 늘 완벽하게 만족스러울 수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의 비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더 나아가 즐길 수 있다면, 가끔은 비 덕분에 우리는 인생의 더 아름다운 장면을 목격하게 될지도 모른다.




초점주의 오류로 인해 과거의 중심사건만 기억하게 된다면 현실에서도 중심사건만 바라보면 될 것 아닌지. 가변적인 주변 상황에 기대지 말고 가장 본질적인 것에 시선이 머물게 하는 것이다. 


공부가 안 될 때 주변의 환경을 어찌하려 하지 말고, 그저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내공이 더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집중력 방해하는 것들을 없애려는 노력은 부질없다. 빌런을 제거하려는 불가능한 시도 또한 의미 없다. 빌런을 제거하면 더 강력한 빌런이 그 자리를 채운다. 빌런과의 관계를 인정하고 그저 자신의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도록 애쓰는 거다. 


나를 힘들게 하는 이들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집중하면 될 것 아닌가? 큰 불행보다 작아 보이는 행복, 그 소소한 행복에 취하도록 하면 될 것 아닌가?


이제는 식상해져버린 <도깨비>의 그 유명한 대사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모든 환경과 조건을 나의 행복의 이유로 만들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지냈기 때문에 모두가 그 대사에 뜨겁게 반응한 건 아닐까?


어쩔 수 없는 환경과 찬란한 과거의 시간보다 초라해 보여도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선택하게 될 것이 아닌가? 어차피 다른 가능성은 없지 않은가?




17 운명적인 사랑의 유통기한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 Romeo and Juliet


현실판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어르신들 중에는 가끔 자신의 자녀가 당신들의 마음에 너무 안 드는 사람을 데려와서 결혼하겠다고 하는 통에 화를 참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다. 마치 연속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자식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소위 마마보이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자식들의 경우에는 부모가 화를 심하게 내면, 자신의 뜻을 수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자아가 강하고 주관이 뚜렷한 자식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부모의 바람과는 반대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하나뿐인 자식이 정말 결혼을 말리고 싶은 상대와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겠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통계를 믿고 행동하는 게 좋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대부분의 연인관계는 2년 내에 종말을 고하게 된다. 따라서 상대에 사로잡힌 자식을 야단침으로써 각성시켜 자식이 자기 감정에 대해 오판하도록 만드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행동이다. 관계를 인정하되, 결혼은 몇 년 후에 하도록 설득하는 것도 방법이다. 그렇게 되면 둘은 아마도 2년 내에 서로 알아서 헤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나머지 반쪽의 짝이라는 증거

만약 심리학자의 말만 믿고 2년 동안 기다렸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헤어지기는커녕 더 사랑을 키워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귄 지 2년이 넘었는데도 사랑이 식지 않는다면, 이것은 두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고, 두 사람이 하나의 팀으로 잘 기능한다는 증거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궁합이 잘 맞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 2년 전에 한 부모의 판단이 오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팀으로 잘 맞는 짝을 찾아낸 자식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말이다. 오래전 근무하던 학교에서 사소한 이유로 사랑에 빠진 '뷰티 앤 더 비스트' 커플이 있었는데 뷰티 쪽의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로 '로미오와 줄리엣' 커플이 된 사례가 있었다. 반대가 커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더 단단해졌다.

교칙으로 스킨십을 통제하려 하면 오히려 더 스릴 있는 스킨십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한 제자가 수능이 없다면 다시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길래, 내가 이랬다. 

그러면 재미가 없을 거라고. 마땅히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째고 노는 것이 재미있는 거지, 그냥 쭉 놀아도 되는데 노는 건 오히려 무료하고 심심할 거라고.


그런 상황을 늘 대하고 있던 난... 

큰 딸이 고등학교 2학년 때 남자친구와 카페에 들어서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을 때, 나를 발견하고 얼어붙어 있던 딸을 불러 남친과 맛있는 거 사 먹으라고 카드를 주었다. 주말에 집에 있으면 데이트 안 나가냐고 부추겼고, 남친과 약속을 잡아 학습 컨설팅도 해주었다. 이미 시작된 관계는 말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행복할 수 있는 커플을 어른들의 강력한 반대의 영향력으로 굳이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만들 이유는 없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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