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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09. 2023

Just call me 청블리!


내 별명은 청블리다. 시작은 학생이었지만 지금은 자칭에 가깝다. 아이들은 청블리에 담긴 러블리한 이미지와 느낌을 싹 빼고 의미 생각하지 않고 체념한 듯 날 청블리쌤이라고 불러준다.


처음 별명이 시작되었던 대구여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내신시험대비 한글파일을 만들어 전교생에게 배포할 때, 저작권 등을 생각해서 문서에 암호를 설정했다. 시험자료 배부할 때도 동시에 알려주고 배부해야 나중에 공정성 민원이나 불만이 없기 때문에, 아침에 전체 방송으로 파일 다운받는 방법을 알려주고, 파일에 암호가 걸려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방송을 마무리했다. 


암호명은 한글로 "청블리"입니다. 


교실에 있던 모두가 빵 터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인 입으로 "청블리"라고 외치는 급이 다른 뻔뻔함의 클라스에 학생들도, 담임교사들도 어이가 없어서 웃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누구나 한 번 이상은 "청블리"를 입력하며 되뇌었을 거다. 그 별명은 후배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전수되었다. 옜다, 이제 너희도 불러라.. 당해봐라ㅋㅋ 이런 심정으로 고통분담을 하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굳이 안 만들어줘도 되는 파일을 친절하게 만들어준 거고, 싫으면 암호 입력 안 하고 파일을 안 열면 되는 선택권은 있었다고 합리화하고 마음 편하게 있기에는 지금 생각하니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교사로서 할 짓이 아니었다ㅠㅠ


그때의 뻔뻔함으로 지금은 눈치도 안 보고 욕하든 말든 그냥 내 이름처럼 소개하며 다닌다. 





영화 Dead Poets Society에서 키팅 선생님은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이런 요구를 한다.


Now, in this class, you can call me either Mr. Keating or if you're slightly more daring, Oh Captain, my Captain.

자 이제 이 수업에서 여러분들은 나를 키팅선생님이락 부르거나, 좀 더 대담하다면 “오 선장님, 나의 선장님”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Oh Captain, my Captain>은 월트 휘트먼이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시 제목이며, 시에서 링컨을 선장에 빗대어 부르던 호칭이기도 하다. 키팅 선생님은 자신을 그런 위대한 존재에 빗대어 불러주기를 바랐고, 영시를 인용하면서 자신의 과목인 영어(그 나라 학생들 입장에서는 국어) 선생님으로서의 전문성도 포함된 의도였을 것이다.


나도 이번에 새로 만나는 중3 수업 첫 시간에 난 그 정도의 임팩트도 아니고, 감동도 없는 억지스러움을 아이들에게 강요했다. 내 이름으로 부르지 말고, 청블리쌤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청블리쌤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부르면 내가 못알아 들을 수도 있다고ㅋㅋ


아이들은 나의 말도 안 되는 뻔뻔함에 “저 쌤 왜 저래?”라는 표정과 납득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마스크 안에 숨기고 있었지만 난 다 느껴졌다.

어딜 봐서 러블리의 느낌이냐고 따지려는 듯한, 그렇지만 첫 시간부터 엄격하게 군기 잡는 내게 굳이 대들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의 생각을 대변했다. 다 이해한다고. 도저히 납득되지 않을 거라고. 일단 비주얼로 붙은 별명이라고 우길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비주얼로 밀어붙였다가는 주제도 모르는 꼰대교사로 낙인찍힐 것이니까. 

그러고도 그냥 뻔뻔하게 강요했다. Just call me 청블리쌤!!!


나의 목표는 이미 설정되어 있었다. ‘청블리키즈’ 양산이다. 나의 진심과 최선으로 아이들의 성장과 달라진 실력을 기대하는 것이지, 팬덤을 형성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팬덤도 교육효과를 극대화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는 한다. 선생님에 대한 호감이 과목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고, 무한 신뢰를 가지고 열심을 다하다 보면, 그 무한 신뢰는 스스로에 대한 신뢰와 확신과 자신감으로 전이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두렵고 떨리기도 한다. 자칫 맹목적인 신뢰로 아이들 자신의 추제적 생각이 마비될까 하는,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교주와 비슷한 존재가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물론 내 부질없는 걱정으로 끝나 다행이지만 어쨌든 늘 주의하려 애쓴다.

그래서 유독 나의 모든 사소한 부분까지 무조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재수하는 한 제자에게 내 말을 비판적 사고로 듣고, 필터링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면 재수하는 동안 상담해 줄 수 없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 제자가 이제껏 선생님 말씀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고 반응하길래, 그래서, 그러니까 위험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얼마 전 거의 청블리키즈 원조인 대구여고 제자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다른 친구들이 연예인 덕질할 때 자기는 청블리쌤 덕질했는데... 그러다 보니 공기업밖에 못 갔다고...

이게 비판적 사고로 하는 말인지 9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팬심을 가지고 있다고 인증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그런 태세 전환을 반겼다. 


문득 작년의 심정이 궁금해서 포스팅한 글을 찾아보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아이들을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다행이다...

블로그를 하니까 이런 것도 좋다. 내 삶의 log라서 삶과 그때의 기억과 느낌을 추적할 수가 있다. 

참고로 blog는 weblog의 약자로 ‘online journal’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인터넷상에서 정기적으로 쓰는 일기나 간행물 등을 말한다. 




<나는 왜 청블리가 되었는가? 이 학생들은 왜 졸업 후에도 연락을 하는가?>

나의 별명이 "청블리"라고 하면 모두가 의아해한다. 어딜 봐서? 어딜 볼 게 아니다. 비주얼로 붙은 별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학구열이 높았던 대구여고에서 내가 분홍색 옷을 입고 갔을 때 학생 한 명이 불러준 것을 시작으로 학생들에 대한 나의 사랑과 열정, 그리고 수업을 통해 확정되고 이름까지 대신하는 호칭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특별보충수업과 점심시간 인문학 특강과, 영어멘토링을 수료한 학생들에게는 "청블리키즈"라는 별칭이 수여(?) 되었다. 

위에서 소개한 학생들은 "청블리키즈"들이다. 1년간의 영어멘토링과 겨울방학 특별보충수업에 끝까지 남았던 학생들이었다. 그중 한 학생은 고등학교 가자마자 영어시험을 쳤는데 청블리수업과 교재에서 많이 나왔다고 청블리키즈임을 뿌듯해하기도 했다. 청블리키즈는 내 뿌듯함이기도 하다. 내 모든 걸 쏟아부은 교육적 결정체이자 결실이기 때문이다.


청블리키즈는 내게 도움을 받으러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아이들이지만, 결국 끝까지 살아남아 영어학습 독립에 성공한 아이들이기도 하다. 그래서 머지않아 청출어람이 될 것이다.


난 올해도 새로운 학생들에게 다가간다. 영어멘토링의 경우, 다가가서 아이들이 내게 손을 내밀 기회를 줄 수는 있지만 내가 먼저 억지로 잡을 수는 없다. 아이들이 내민 손은 절대로 놓지 않지만, 아이가 손을 잡았다가도 먼저 놓는 건 나도 어찌할 수가 없어 가슴이 아프다.


모두가 청블리를 만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다 청블리키즈가 되는 건 아니다. 부디 나의 열정과 진심과 노력이 아이들의 가난하고 절실한 마음에 닿기를 바란다. 


청블리키즈가 많다면 산술적으로는 나의 에너지와 노력을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니 그만큼 더 힘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겠지만, 난 그 만남과 과정에서 오히려 더 큰 힘과 에너지를 얻는다. 오히려 날 힘들게 하는 것은 몸은 편한데 아이들이 내게 아무런 도움도 기대도 하지 않는 상황에서의 무력감이다. 


난 올해도 (17년째) 주어진 수업에 그치지 않고 아이들에게 호소하고 홍보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교실 밖 <영어멘토링학습코칭>과정으로 아이들의 선택을 받는다. 학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수강료를 받지 않는다는 것과 아이들의 자기주도성에 초점을 두어 각자가 자신만의 무대 주인공이 되도록, 나는 무대만 마련해 주고 아이들의 출발점과 수준과 속도를 존중하면서 아이들의 아픔과 기쁨을 함께 하며 무조건 전심으로 응원하고 지지해 준다는 것. 결국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을 위해서, 그 순간이 올 때까지...


난 아이들이 각자의 무대에서 자주 넘어져도 결국에는 일어나서 자신만의 무대를 완성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행복한 교사다.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2665029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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