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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r 23. 2023

추억의 의미, 기억의 해동

재수하는 제자를 만났다.

깜찍한 종이가방에 숨겨 온 프리지어를 내게 안겨주었다. 제자의 정성만큼 짙은 향기도 따라왔다.

순간 누가 누구를 응원하고 격려하러 만났는 것인지 잠시 혼란스러웠다.

영어단어 리프레시하라고 내 영어단어장 4단계인 수능필수어휘구 800개 유인물을 건네주었다. 제자는 무슨 낭만적인 회상물을 마주한 것처럼 추억 돋는 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2년 전 자습단어로 권해주었던 그 단어장을 구석구석 하나라도 새어 나갈까봐 열심히 학습했던 예전의 노력과 배움의 즐거움을 다시 떠올리고 있었던 거였다. 그렇게 공부했던 기억과 그 소소한 성취의 순간이 의미있게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추억은 의도적으로 되뇌었던 기억을 의미한다.

지난 주 토요일 특강을 하러 근무하던 직전 학교에 2년이 지나서 그 출근길을 기억을 더듬듯 이동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던 길과 나의 시선이 머물던 곳곳의 기억들이 간신히 조금씩 되살아 났다. 지하철 환승하기 싫어서 자전거를 타고 언덕길을 지나 숨가쁘게 다소 거리가 먼 지하철역에 도착해서는 철인삼종 경기하듯 지하철에 오르기 위해 뛰어내려갔던 계단이 여행을 떠나온 듯 낯설었다. 지하철을 나설 때 그 익숙했던 출구의 방향조차 헷갈렸다. 그러나 이내 조금씩 눈이 녹듯 기억은 되돌아 왔다. 그러고 보니 다니던 그 길은 거의 그대로였고 틀린 그림 찾기처럼 한 번씩 눈에 들어오는 새로운 거리의 모습이 기억에 저항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때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한 번씩 꺼내보지 않아 얼어붙었던 거다.

그 중 유독 어떤 기억은 애쓰지 않아도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래서 학교를 다녀오는 동안 추억으로 화석화되어가는 그 과정 어딘가를 잠시 엿보고 온 느낌이었다.

너무 일상적인 일들은 너무 많이 반복되어 추억으로 남기에는 오히려 역부족이었다. 그저 추억의 배경 역할만 할 뿐이었다.


이제껏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스쳐지내보냈지만... 그들은 내게서 기억 속에 머물다가 추억이 되지 못하고 조금씩 사라져가기도 했지만... 한 번씩 마주치게 되는 제자의 모습에...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나는 그 학생의 이름과 기억의 파편이 떠오를 때마다, 학생들과의 만남은 의식적인 기억이나 추억으로 포장되지 않아도 여전히 가슴 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사소한 자극에도 살아나는 추억, 불현 듯 떠오르는 추억, 한 번씩 의도적으로 생각나게 되는 추억... 기억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은 그런 감격이다.


올해 학년실 선생님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10여 년 전 대구여고 제자의 어머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 이름을 이야기하시는데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이름이 내 기억 속의 소중한 존재를 깨워냈다. 그 아이의 기억이 갑자기 한 번에 살아났다. 세월의 흐름을 잠시 잊은채로 그 행복한 기억과 느낌에 감격스러워했다.


이후 그 선생님이 학년 모임에서 선생님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딸에게 보여주었고, 딸은 “선생님 많이 늙으셨네”라고 반응했다고 한다. 감사하게도 내 수업이 너무 재미있었다는 기억도 함께 전해주셨다.

옆에 계신 선생님이 사진에 뽀샵 좀 해서 보여주지 그랬냐고 농담을 하셨다.

그런데 난 제자의 그 말이 오히려 너무 감동이 되었다. 난 여전히 젊은 리즈시절 그 모습으로 그 제자에게 기억되고 있었다는 것이니까... 나이 든 나의 낯선 모습과 그 기억의 불일치는 오히려 내게 소중한 의미였다.

내가 그 제자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떠올리는 것처럼, 담임도 아니었던 일개 1학년 영어교과쌤에 불과했음에도, 그 오랜 시간 동안 잊히지 않았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그런 소중한 느낌을 연결해준 선생님께 너무 감사했다.


혹 제자들을 다시 마주해서도 떠오르지 않더라도, 왜곡된 기억의 일부만으로 미화된 느낌을 가지는지 모르겠지만... 기억과 추억이 시작되기 직전의 순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진심을 다했으므로 후회도 아쉬움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한 번씩 예전을 떠올리면 아쉬움이라는 느낌이 그득한 것 같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게 아쉬움이 아닌 그리움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재수하는 그 제자는 추억과 현존 그 어딘가의 애매한 자리에 있었다. 추억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듯한 애씀이 느껴졌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침 졸업한 작년 제자에게 문자가 왔다.

내일 고등학교 첫 모의고사라서 마치자마자 나를 보러 오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모의고사가 그렇게 늦게 끝나는지도 몰랐고, 기숙사에도 바로 들어가야 한다고.. 대체 선생님을 언제 볼 수 있냐고.. 시간 되는 날 무조건 가겠다고...

추억으로 봉인되기를 원하지 않은 학생 한 명 더 추가ㅠㅠ


재수하는 그 제자는 영어 읽는 게 오래 걸리고 이해가 잘 안 된다고 고민을 얘기했었다. 난 속도는 신경쓰지 말고 그저 천천히 정확하게 읽으라고 조언했다. 자연스럽게 감이 살아 날 거라고.. 그동안 열심히 해왔으니...

이후 제자는 속도를 늦추니 정확하게 읽힌다고 내게 말했다.


난 제자에게 이렇게 격려해주었다.

작년에 무대를 뛰었다고해서 재수 시작하자마자 바로 무대 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라고...

작년 무대의 아쉬움 점을 보완하며 충분히 연습을 더 한 후에 자연스럽게 올라갈 무대에서 즐길 수 있도록 차분히 준비하라고...

그동안 애쓰고 노력했던 모든 것이 어디 안 갔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어디 가지는 않았지만 얼어붙어버린 걸 해동하지도 않고 바로 요리하려 하지 말라고...

해동의 과정이 꼭 필요함을 인정하라고...



우리의 기억은 공부한 내용이든, 만남이든, 만남으로 나누었던 교감이든... 세월의 흐름에 점점 얼어 붙는다. 한 번씩 꺼내주지 않으면 점점 꽁꽁 얼어붙을 수도 있다. 그 흔적이 생각나지 않는다고 이제까지의 모든 만남과 생각나지 않는 기억이 부정되지는 않는다. 소중했고, 충분히 잘 지내왔기 때문에 무사히 안전하게 봉인된 것이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로든 의도적인 기회로든 해동의 과정을 거치면 그때의 행복도 같이 깨어난다. 예기치 못했던 기쁨이며 축복이다.


세월의 흐름으로 약해지고 무뎌지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언제 깨어날지 모르는 소중한 기억과 추억들을 더 많이 쟁여두고 산다. 깨어나지 않더라도 그랬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그 흔적과 현실의 행복을 키워간다.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은 추억부자들이며, 교사를 대적할 이들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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