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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12. 2023

선 넘는 어른, 친해짐의 비결

지난번 포스팅 주제가 선넘는 아이들이었다. 선을 넘어봐야(너무 넘으면 곤란하지만) 넘어선 안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터득하게 되며 영점조정하듯, 자기절제와 사회성을 배워가는 것 같다는 교육현장의 이야기를 정리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는 선을 넘으면 안 될까?

사람마다, 받아주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난 그래야 친해질 수 있다고 본다.

사교적인 관계와 거리 유지는 가까운 관계에서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선을 넘는 듯한 리스크를 감당해야만 친해지기도 한다. 어른이 되어가며 사무적인 관계의 홍수 속에서 친구를 만들기 어려운 것은 굳이 그 선을 넘으려 하지 않거나, 넘었을 때의 리스크에 대한 염려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고 수시로 선을 넘나들어야 친구를 많이 만든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보통은 자기만의 생각으로 넘나드는 선은 무례함과 불쾌함을 동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선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염려로 세운 가상의 선일 경우에만 친근함으로 넘어서는 행위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년에 공개수업을 하고, 그저 일개 수업개선 계원인 내게 수업나눔을 요청한 열정 넘치는 선생님이 있었다. 특히 중학교 와서는 학년실의 분들과 교류가 거의 없고, 그러한 시도 자체가 가상의 선을 넘는 행위였을 것인데... 어색하지 않게 만남이 성사되어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었다.

그리고 그 친근함은 이후의 만남에서도 인사에서 묻어나는 친한 척으로 더 짙어졌다.

그래서 난 늘 그 밝은 에너지의 충전을 받으며 기분 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제 오전에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그 선생님이 내게 뜬금없이 바쁘냐고 물었다. 사무적인 관계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어조와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왜 그러시냐고 하니까..

앞자리에 앉아 계신 영어선생님께서 내 자랑을 하셨다고 하는 거였다. 그걸 굳이 내게 알려줄 필요는 없었는데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니, 작년 영어선생님께 만들어드린 아이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였다.


전교 등수를 대자보에 붙여 놓고 각자의 성적이 만천하에 드러나도 당연한 듯한 시대가 있었는데, 어느 때부턴가 수행평가나 지필고사 성적을 교실에 게시하는 것도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성적이 다른 학생들에게 공개될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정보이니 마땅히 지켜져야 했던 건데 예전에는 그건 존중과 배려가 없었던 것이었을 뿐, 이제 정상적인 분위기가 된 것 같기는 하다.

그래서 수행이든 지필이든 한 명씩 나와서 자기 성적만 확인하고, 때로는 서명을 하기도 한다.

한 명씩 나올 때 종이 두 장으로 다른 학생들 성적을 가리고 보여주는 것이 불편하던 차에, 자신의 성적만 보이도록 A4 용지에 구멍을 뚫어서 코팅을 했다. 서명이 필요할 때를 대비해서 맨 끝에 서명만큼의 구멍을 뚫어 놓았다. 작년에 함께 근무했던 선배선생님의 아이템을 그대로 따라 한 것이다. 작년에 내 것을 만들면서, 동학년을 하시던 그 선배영어쌤께도 선물해 드렸는데, 이번에 영어듣기 성적을 그걸로 편리하게 확인하시고는 앞자리에 있던 그 선생님께 자랑하는 것이 전화의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그 아이템과 나의 별명의 유래 등에 대해 선배 영어선생님의 감사한 칭찬으로 물든 덕담이 이어지면서, 나에게 바로 전화를 하신 거였다. 주변 선생님들이 놀라면서 바로 전화할 정도로 나하고 친하냐고 하니까... 친하지는 않고 그냥 혼자 좋아한다는 농담도 날리셨다고 한다.


덕담을 전달하는 것처럼 포장했지만 결국 용건은 그 아이템 주문 제작이었다.

내가 날로 먹는 거 아니냐고.. 다른 교과 선생님께 만들어 드리면 비용 발생한다고 하니까...

손하트 드리겠다고 이미 대금을 다 치르고 계약을 완료한 것처럼 말씀하셨다.


하루가 지난 오늘 선배영어쌤은 자기로 인해 비롯된 일이라고 미안하다고 하셨지만... 난 괜찮다고 했다. 그냥 유쾌하고 재미있었다고. 실제로 내가 갖지 못하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수혈받은 느낌이었다.


얼마전 전체 교직원회의할 때 학생회장 당선자 인사가 있었는데, 학생이 전체 선생님들 앞에서 전혀 수줍음 없이 당당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옆자리에 보다가 나보고 저런 자세는 배워야 하겠다고 팩폭을 날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나를 너무 정확하게 파악하고 남들은 굳이 넘지 않는 선을 기꺼이 넘어주시니, 내가 막아 놓고 오지 말라고 한 적도 넘어오라고 허락한 적도 없지만, 감사했다.


심지어 전화 마무리할 때 블로그에 올리셔도 된다고 미리 허락한다는 멘트까지 날렸다. 허락이라고 했지만 블로그 쓰라는 약간의 강요(?) 같은 거였다.

블로그는 내가 내킬 때 자발적으로 쓰는 것이었는데... 이런 소재 제공 및 포스팅의 강제성을 강제로 허락당하면서 쓰게 될 줄은 몰랐다ㅋㅋ


나는 학창시절에도 인간관계의 선을 넘나들던 학생이 아니었다. 늘 내성적인 성격으로 불편함을 겪었었는데... 지나놓고 보면, 내가 애쓴 것보다 소심한 나를 끌어내려고 애써주었던 이들로 인해 내가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 것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오늘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만나서 어제 일을 한 번 더 언급하면서.. 선을 넘은 건 아닌지 걱정이었다면서 은근히 글을 올려주기를 바라는 눈치여서.. 난 그 유쾌한 에너지를 글로 남기고 싶었다.

선생님을 잘 모르는 분들이 보면 자칫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할 수 있지 않겠냐고 하니 그럴 리 없다고 해서 내기 하는 심정으로 일단 올려보기로 했다.


이상한 분이 아니니 오해 마시길..

어쨌거나 참으로 부러운 성격, 감사한 인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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