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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21. 2023

졸업생 제자의 플래너점검(Feat. 교사의 기다림)

올 2월에 재수를 결심한 제자가 내게 담임교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진짜 담임도 아니고 매일 학교에서 만나는 담임이 될 수도 없지만, 평소에 스스로 알아서 잘 할 거면서, 힘들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상담을 해주고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 같은 멘탈코치 역할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렇게 첫 상담을 해주면서 정리했던 글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3017389563


내가 내건 조건은 아래 세 가지였다. 


1) 비판적 사고와 필터링 장착 – 무조건 내 말을 의심 없이 따르려 하지 말 것

2) 정기적으로 소식 전해준다는 규칙성(최소 월 1회 보고... 자랑이든 슬럼프에서 허우적이든)

3) 학교에 가서 원서 상담하는 등의 실질적이고 행정적인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므로 고3 담임선생님 다음 순위로 생각할 것. 주님이 담임이시니 난 3순위임.


제자는 고1 때 영어교과 교사인 나의 모든 종류의 수업과 모든 교육활동에서 무조건적으로 날 잘 따랐던 학생이었고, 그 이후에도 그 신뢰가 옅어지지 않고 있어서 나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있어야 균형잡힌 성장이 가능할거라 생각했다.


제자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플래너 검사를 정기적으로 해줄 수 있냐고...


난 늘 담임을 하면서 플래너 검사를 반강제적으로 하고 있는데, 먼저 요청을 받은 건 처음이다. 그래서 더 흐뭇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이 필요성도 모르고 귀찮아하고 불평하면서 플래너를 쓰다 보면, 그중 소수의 인원만 습관으로 정착이 되고,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내게 고마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자발적 기쁨을 주고받는 교육활동이 아니라서 내게도 긴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과정인데...


나의 교육원칙은 학생이 먼저 내민 손은 절대 뿌리치지 않는 것이고, 결국 날 필요로 없는 그 순간을 위해 애쓰는 것이다.


난 수도꼭지 같은 교사다. 틀면 나온다. 

그러나 중학교에 와서 목마름이 뭔지 모르는 대다수의 학생들에게 수도꼭지 홍보가 잘 먹히지 않는 건 당연하다. 아예 수도꼭지 근처에 오려고 하지 않으며 늘 도망다니는 기초반 학생들도 있고, 호기심으로 수도꼭지까지 데려왔는데(수업시간 잔소리와 영어멘토링 학습코칭 과정 초대로) 망설이는 학생들도 많다.

난 늘 학생들을 위한 코칭, 상담, 수업 등의 교육활동자체보다 기다림이 더 힘들고 지친다. 그래도 늘 그 자리를 지킨다. 그래야 학생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언제든 날 찾아 올 수 있을 거니까...


그런데 이미 자발적인 출발이라니..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 꿈의 문턱'이라는 이름으로 구글클래스룸을 개설했고, 제자가 주 1회 플래너 인증샷을 올리면 내가 간단하게 댓글을 달아주고 있다.


제자는 체계적인 자기주도학습은 물론 시키지 않은 것도 잘 기획해서 하고 있고, 최근에는 자신의 진로에 대한 여러 가지 고민과 리서치한 내용들을 체계적으로 구조화하여 정리하기도 했다.

너무 알아서 잘하고 있길래 내가 뭐가 필요하냐고 하니까... 제자는 지켜봐 주고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는 존재의 고마움에 대해서 언급했다. 물론 한 번씩 사소하지만 필요한 조언을 해주고 있기는 하다. 


최근까지 플래너에서 댓글로 제자에게 해 주었던 조언 중 몇 마디만 추려본다.





    너무 어려운 (국어) 지문이 조금 어려운 지문이 될 때까지 시간이 더 필요할 거란다. 지문분석 파악능력은 어차피 평생공부의 밑천이니 계속 힘내길...  

  

    약점을 찾았다면 성장 예약인 거다... 장하다^^  

  

    매시간을 후회 없이, 아쉽지 않게 보냈다는 것이 확실하면 결과를 떠나서 이미 다 이룬 거다.   

  

    아플 땐 자책하지 말고 그냥 쉬렴 안식의 이유.. 운동을 따로 하지 않아도 걸어 다니는 것만으로 어느 정도는 충당되지 않을까? 잠도 충분히 자고  

  

    계획이나 스스로에 대한 파악하는 역량이 계속 진화하고 있구나 그 자체로 성장중임.  원래 토요일은 집중이 잘 안된다. 고3 토요일 자습 있던 시절에 학생들이 심자보다 그 시간을 더 힘들어했지.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유혹과 매 순간 싸워야 했고ㅋㅋ  

  

    아직 인강의 비중이 큰 건 납득할 수 있지만, 너의 말대로 체화하는 데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시각은 정말 바람직한 깨달음이다. 넌 스스로 공부하는 방법을 깨우쳐 가는 것 같구나. 인강을 들어도 너가 주인공이어야 함도 기억하렴.  

  

    수능까지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건 착각일 수도. 하루 한 시간 일분일초를 생각하면..   

  

    두근거림이 일주일간 고생의 보상이기를.. 오늘 그 보상의 완성을 잘 이루길...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재수생도 원래 4월부터 고비가 시작된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새롭게 시도하며 방법을 찾고 자리를 지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임. 그전의 집중도와 비교하면서 좌절할 이유 없음.   

  

    오전에 언어, 오후에 수학, 저녁에 영어, 밤에 탐구 이렇게 블록으로 해서 뭔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느낌보다 영역을 섞어서 배치하는 새로움이 너한테 맞을 수도 있다. 그냥 참고 버티는데 익숙한 넌, 효율이 없는데도 그냥 밀어붙일 가능성이 높으니... 자주 과목 바꾸는 게 타협이거나 집중도가 높지 않다는 증거가 아닐 것이니 편하게 실리를 추구하렴.  지루함을 싫어하고 능동적인 변화를 즐기고 있다면 더욱더 필요함. 심지어 20분씩 과목을 바꿔가면서 해도 됨. 그 대신 사이클이 더 자주 돌아오겠지. 오히려 질릴 때까지 실컷 하며 포식하는 느낌보다 아쉬운 듯 다음 순서를 기약하는 회전초밥 같은 누림은 어떨지...  

  

    영어를 끝장내려 하지 마라. 결국 수능에서만 1등급 나오면 되니까.. 단어와 구문을 계속 보면서 감은 살아 날 거고 독해의 흐름도 잘 파악하게 될 거다. 이제 와서 구문 인강을 듣는 건 비추다. 이미 넌 천일문 시리즈를 잘 끝냈고, 혼자서 문장해석에 잘 적용해왔는데... 그걸 다시 이론 같은 원리로 거꾸로 역류해갈 필요는 없단다. 그저 지금 만나는 문장 하나하나에 집중해라. 문제 풀이보다 정확한 해석에 더 치중하면서... 시간은 점점 빨라질 거니까 지금은 모의고사 같은 모드로 영어지문을 대할 필요는 없다.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되니까 기피하고 싶은 거다. 예전 수준이 1등급이었던 상관없이 다시 처음부터 재활과정이라 생각하고 또박또박 정확성에 치중하며 시간을 더 들이고, 그럼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면 좀 더 쉬운 지문을 구해서 읽어 봐도 된다.   

  

    보상을 해줘도 좋고... 아무 보상 없는 보상이 공부 자체를 즐거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듯.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 결과를 떠나서 성취의 기억으로 몸에 새겨지기를 바랄 뿐이란다. 부디 재수의 과정에 긴 공부가 너에게 부담이 되겠지만, 공부 아닌 보상도 분명 필요하지만.. 그 자체의 본질적인 보상으로도 즐거워하는 일이 늘어나길 기대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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