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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24. 2023

갑자기 16년 전 수학여행의 추억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차 없는 삶을 살다 보니 가족들과의 여행은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에 국한되었고, 딸들과는 제주도 갈 때 비행기를 딱 한 번 타봤다. 유일하게 해외여행을 시도했던 계획은 출발 전 날 둘째 딸 독감확진으로 취소했던 진한 아쉬움도 있다. 그래서 나도, 가족들도 해외에는 나가 본 경험이 없다. 그럼에도 난 나름 많이 다닌 것 같지만, 내 기준에서만 그랬을 거다. 그래서 늘 가족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거나, 정겨운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 외에 낯선 곳에 대한 동경은 전혀 없다.

“집 떠나면 *고생”, “어차피 내려올 산을 뭐 하러 올라가는가”가 여행에 대한 나의 모토다.

일단 저질 체력과 허리 통증, 멀미 등으로 인한 물리적, 신체적 한계가 여행에 특화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 내가 절대 피할 수 없는 여행이 있다. 1학년 야영, 2학년 수학여행...

수학여행은 보통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가는 경우가 많아서, 아예 2학년은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교과지도 면에서도 2학년은 내게 맞지 않다.

내 생애 고2 담임은 딱 두 번이었다. 그리고 수학여행도 딱 두 번이었고, 두 번 다 비행기로 제주도를 다녀왔다.

 

2007년 3월 말 첫 수학여행이 너무 기억난다. 벌써 16년이 더 된 기억임에도...

설렘보다 걱정이 앞섰다. 그 긴 기간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다. 긴 거리를 이동하는 것 자체가 부담인 데다가, 학생들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쌤들이 돌아가면서 밤에 불침번을 서야 하는 체력적인 부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학생들 중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학생들이 많았던 것 같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 신기한 듯, 놀이기구를 탄 것 같은 감탄을 연발하던 그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어떤 학생은 창밖을 내다보고는 뭔가가 자꾸 따라온다고 해서 보니...

비행기 날개였다ㅋㅋ

 

절대 잊을 수 없는 두 가지 기억.


기억 1

한라산 등반이 예정된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집결하기까지 활발하게 뛰어다니던 아이들이 등반 전,  환자는 열외하라고 하니 갑자기 많은 학생들이 대거 이동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어떤 남학생 반은 절반 이상이 (나이롱) 환자가 되었다.

난 여학생반 담임으로 당연히 절반 이상의 학생들이 열외할 것으로 예상했다. 내가 등산을 만류할 수는 없지만, 절반 이상의 학생이 잔류한다면 학생들과 산 밑에서 편안하게 기다리는 명분이 생길 것이므로 나름 표정관리를 하면서 우리반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반의 35명 중 단 한 명의 열외도 없었던 거다. 선택의 여지없이 학생들과 힘겨운 등산을 시작했다. 산 정상까지는 올라가지 않았지만 충분히 힘든 코스와 시간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반 아이들은 후회를 하는 듯 힘겨운 표정으로 걸음이 느려졌다. 어떤 학생들은 자기의 크로스백을 내 어깨에 걸어주기도 했다. 모두가 낙오 없이 산 중턱의 목적지에 도달했고, 힘겨운 여정을 보상받은 뿌듯함과 아름다운 광경을 누렸다. 내려오는 길에 학생들에게 물었다. 남학생들도 다수가 빠지는 상황에 우리반은 왜 다 올라가기로 했냐고 하니까, 한 명이라도 빠지면 담임교사인 내 입장이 곤란해질까 봐 모두 합심해서 올라가기로 했다는 거였다. 속으로 “얘들아, 난 곤란해도 되는데, 왜 그랬니?”를 외치고 있었다. 2학년 담임쌤들 중에 내가 가장 어린데다가, 허약해 보여 아이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했을 것이니 학생들의 마음씀에 대해 불평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힘든 만큼 고맙기까지 했다.

 

기억 2

모든 일정을 마치고 우리반은 3개 조 중에서 첫 번째 시간대인 10시 경의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바람이 심하게 불어서 좀 불길하긴 했지만 비바람도 아니고 바람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하고 도착했는데... 전광판에 우리가 타기로 한 비행기편에 “결항”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돌풍으로 비행기가 이륙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학교 졸업여행으로, 신혼여행으로, 그리고 세 번째 비행기를 타봤던 난, “결항”의 의미가 뭔지 잘 몰랐다. 전광판의 영어를 보니 “Cancelled”라고 되어 있어 대략 불길한 예감만 가슴에 품었을 뿐이었다.

Delayed 하고는 결이 완전 다른 느낌이었다. 우리 비행기는 연착되거나 미뤄진 것이 아니라, 그냥 취소된 거였다.

알고 보니 과연 그랬다. 순차적으로 뒤로 밀린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의 비행기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이었다. 그러니 비행기표를 환불받거나, waiting list에 이름을 올려서 대기해야 했다. 결항비행편에 대해 국토부의 승인이 떨어지면 보충비행편이 편성되어 대기자 명단의 순서대로 비행기를 탈 수 있도록 조치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게 언제일지 기약할 수 없고, 확실한 보장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항의 의미를 두 번째 팀이 도착하고 명확히 알았다. 11시 이후에 돌풍이 해제되고 정상적으로 비행기가 운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심때쯤 두 번째 팀이 도착해서 예정된 시간에 맞춰 먼저 와 있던 우리를 뒤로하고 유유히 비행기를 타고 사라졌다. 그걸 보고 우리 비행편은 미뤄진 것이 아니라 아예 사라진 거라는 걸 제대로 실감했다. 2시 넘어서 마지막 세 번째 팀이 나타나서 역시 제시간에 비행기를 타고 사라졌다.

 

한 번씩 비행기가 결항되어 공항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의 영상을 뉴스에서 접했던 기억이 났다. 뉴스 속의 그 모습을 스스로 재현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예쁜 옷을 입고 힘을 많이 주었던 반 학생들이 하나씩 사라지더니 잠옷 같은 편한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났다. 처음에는 우아하게 의자에 앉거나 서서 기다리다가,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간이 계속되고, 우리보다 늦게 온 다른 반 학생들이 비행기를 타고 가버리는 불공평해 보이는 상황을 마주하고는 더 이상의 긴장감 없이 무기력함으로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카드게임을 하다가, 그것도 지쳐서 서로의 등에 기대거나 아예 바닥에 드러눕기도 했다.

정말 힘든 건, 언제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라는 확답이나 약속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기약 없는 기다림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었고, 예고 없이 보충편이 편성되었을 때 반응을 보이지 못하면 다음 대기자로 기회가 넘어가기 때문에 공항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설마설마하던 기다림은 세 번째 팀까지 떠나고 난 후에는 좌절감과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번져갔다. 저녁때가 되도록 소식이 없었고, 교감선생님은 비행기 편성이 안 될 경우 배를 타고 목포에 가서 버스를 대절해서 돌아가는 방법이 어떨지 학생들에게 의사를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저녁 7시경 보충편이 편성되어 한 반 정도의 자리가 났다는 속보가 들렸다. 여학생반인 우리가 먼저 타기로 합의가 되었다. 난 표정관리가 안 되었다. 우리반 학생들 전원이 탑승하는 비행편에 담임이 동승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난 그렇게 반 아이들과 기약 없던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드디어 집에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정신없이 짐을 챙겨서 탑승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학생 반 담임인 선배 남자 선생님께서 내게 오셔서 급한 일이 있다고 나 대신 자신이 비행기를 타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담임이 어떻게 같이 안가냐고 하니까 자기랑 반을 바꾸어 인솔하면 된다고 고집하셨다. 교직 10년 차였지만 한참 연배가 높으신 분의 요청이라서 그냥 묵살할 수가 없었고 혹 우리반 전체가 뒷 순서로 밀릴까봐 끝까지 고집할 수 없었다.


반 아이들에게 찡찡거리며 동승할 수 없다는 소식을 알렸다. 반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교감선생님께 담임선생님과 함께 타지 않으면 자기들은 비행기를 타지 않고 남겠다고 항의했다. 내가 선동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아이들이 내 편에 서줘서 난 비행기를 함께 탈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다소 하긴 했지만... 교감선생님은 개입하지 않으셨고.. 비행기 시간이 가까워지자 절대 나 없이는 비행기를 안 타겠다는 반 아이들이 그저 미안한 표정만 남기면서 바쁘게 비행기를 타러 갔다. 아이들을 배웅하며 난 속으로 울고 있었다. 집에 바로 못 가는 것도 아쉽지만, 반 아이들과 생이별을 하는 것 같아서 너무 속상했다.

지금이라면 연배 높으신 분의 강력한 요청이라도 강력하게 거부했을 것이다. 그 선생님도 자신의 반을 두고 혼자서 가시면 안 되는 것이었고, 나도 우리반 아이들과 함께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당시 새파랗게(?) 젊은 교사가 연장자를 뒤로하고 훌쩍 떠나겠다고 주장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상실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우리반 아이들을 떠나보내고 나니 기다림은 더 의미 없게 느껴졌다. 아이들까지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쯤의 지옥 같은 시간 후에 또 다른 비행기가 편성되어 한 반이 더 탈 수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난 교체된 담임교사로 남학생들을 인솔해서 비행기를 탔다. 다른 한 반은 더 기다리기로 했고, 결국 그날 비행편이 더 편성되지 않아 근처 숙소에서 하룻밤을 더 묵고 다음날 비행기로 올라왔다. 그 반은 4박 5일에 수학여행이었던 셈이다.

 

우리반 아이들은 김해공항까지 가는 비행편이어서 버스를 타고 대구로 올라가는 일정이었고, 나중에 내가 탄 비행기는 대구 직항이었다. 결과적으로 밤 10시 넘어서 우리반 애들보다 내가 학교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난 반 아이들이 버스로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학교에서 기다리다가 버스가 멈춰 섰을 때 반 아이들을 한 명씩 맞아주었다. 아이들은 귀신을 본 것처럼 놀랐다. 분명 담임쌤을 제주도에 놓고 왔는데, 먼저 와서 자신들을 맞아주다니...

나도 학생들도 반가움으로 그 하루의 고생을 털어 버렸다.

우리는 고생을 더해서 순탄하게 돌아온 2, 3진보다 더 진하고 생생한 추억을 덤으로 얻었다. 학교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일상이라서 소중한 줄 몰랐던 그 평범함에 대한 절실한 갈망을 긴 시간 동안 생생하고 절절하게 온몸에 새겼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얼마간은 수업시간에 call off, put off, cancel 등의 표현이 나오면 이 일화를 말해주었지만... 한참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아이들은 비행기 결항으로 고생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말로 하는 설명보다 다들 몸으로 알게 되었을 것이다. 공감은 직접 체험을 통해 더 짙어진다. 그리고 그 어려운 시간을 버티게 해주었던 반 친구들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을 더욱 실감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해 3월 말 수학여행후 반아이들은 더 끈끈해졌다.

결국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심지어 시간낭비로 여겨지는 일들조차도 의미 없는 일은 없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불평하거나, 가정법적인 생각을 하는 것보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다. 심지어 그 상황을 즐길 수 있으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지나고 나면 고생스러운 느낌조차도 다 그리워지기 때문이다. 문득 그때 아이들이 그립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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