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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25. 2023

딸의 성취감 가로채지 않으려는 노력

재수하는 딸에게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도 화를 내거나, 부주의함을 탓하지 않았다. 몇 달 전에는 구입한지 한 달 밖에 안 된 폰을 분실했던 딸은 이번엔 카드와 민증이 든 지갑을 잃어버리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아빠는 해탈한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해탈한 것도 아니고 포기한 건 더더욱 아니다. 걱정되고 속상한 느낌이 있지만, 그걸 말로 표현하지 않고 참아내는 거란다. 정말 속상한 건 너 자신인데, 부모의 속상함까지 전달해서 비수를 꽂지 않으려는 노력인 거다. (알아 달라는 건 아니고) 비장한 각오로 시작한 재수의 여정에서 제시간에 공부하러 가지 않고 하루 종일 잤다는 걸 알고 나면, 아빠의 걱정은 너가 공부를 안 했다는 것보다 너가 얼마나 속상하고 마음이 힘들까 하는 거란다. 한참을 자고 나면 몸은 개운할지 모르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을 걸 아니까.


그리고 만약 아빠, 엄마가 아침에 널 두들겨 깨워서 제시간에 공부하러 나가도록 했다면, 그건 아빠, 엄마의 뿌듯함이고 성취감이지. 너가 이룬 것이 아니라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는 거니까. 가세가 기우는 한이 있더라도 300만 원 넘는 기숙학원을 보낸다면 그것도 성과 여부와 관계없이 아빠의 성취감이고 만족감이겠지.

결국 너가 주인공이어야 한다. 사소해 보여도 아침에 몸을 일으켜 나가고 제시간에 도착하고, 정해진 분량을 공부하는 모든 과정의 성취감은 오롯이 너의 것이어야 하고.

엄마, 아빠의 욕심으로 그걸 가로챌 수는 없지.


너가 공부를 덜 하든지 해서 장학금받고도 가지 않은 대학을 재수해서 가라는 건 너무 미안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래도 경북대에 가서 집에 남으면 아빠는 좋겠는데...너의 행복보다 아빠의 욕심을 우선시할 수 없으니 인서울에 성공한다면 너의 행복에 양보하고 존중하게 될 거란다. 물론 너의 행복이 아빠의 행복이기도 할 것이니 널 자주 볼 수 없게 되더라도 아빠 또한 기쁠 거고.


얘기나온 김에 잔소리 하나만 할게.

부디 거창한 결정과 완벽에 가까운 하루를 꿈꾸면서, 찌질해져버린 과정을 무시하거나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로 인해 스스로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았으면 한다.

아침부터 제시간에 도달하지 못했어도, 중간에라도 깔끔하지 못한 시작이라도 뭐라도 할 수 있으면 그것만큼의 성취이고 의미인 거니까, 사소한 성취를 누리고 즐기렴.

작년에 저녁때까지 자고 나서 너무 속상한 마음으로 슬퍼할 때 아빠가 그랬잖니. 아직 오늘이 끝나지 않았고, 저녁과 밤이라는 기회가 남아 있다고. 그리고 내일이라는 또 다른 기회가 있다고. 결국 사소해 보여도 매 순간 한 것만큼의 성취는 있는 거니까,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면 좋겠다고.

그러니까 넌 원서를 쓰는 큰 결정을 구성하고 있는 매 순간의 사소한 결정으로 너의 성취를 이뤄가는 거라고. 아침에 눈을 뜰지 말지, 눈을 뜨고는 몸을 일으킬지 말지, 콘서트를 갈지 말지.. 그 모든 결정으로 넌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을 배워갈 거라고.

그렇게 성장을 거듭해가서 성적뿐 아니라 모든 생활습관까지도 성장을 하게 되어 마침내 수능장에 들어갔을 때는 이번에도 망하면 안 되는데 하는 불안감이 아니라 그 전의 여러 선택을 거치면서 단련되고 축적된 실력과 자신감으로 "수능 너 드루와!" 이런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좌절의 순간에 함께 아파하고 변함없는 너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변함없는 응원을 보내고 기도하는 것 외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너의 성취의 순간에도 너 스스로 이룬 것에 대해 별로 해준 것 없이 숟가락 하나 얹고 함께 기뻐하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겠지만...

엄마와 아빠는 해탈의 경지에 이른 것 같은 쉬운 결정이 아니라, 오히려 거의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하는 고비를 넘기면서 잔소리를 하지 않도록 애쓰고 있고, 매 순간 개입하지 않기로 한 어려운 결심을 매 순간 실행하고 감당하고 있는 거라고... 그건 포기도 방치도 아닌 거라고...


너가 부담 가지라는 의도로 하는 말이 아니라, 엄마, 아빠는 너의 어떤 순간에도 너를 믿고 응원하고 있고, 변함없이 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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