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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Apr 26. 2023

반 학생들에게 배려의 의미를 담은 편지

지난번 포스팅한 수학여행의 추억에 이어지는 이야기.

끈끈함으로 뭉친 아이들은 3월 말 수학여행 이후 급도로 친해졌다. 2학년 문과반의 분위기는 어디나 잠잠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반은 내가 수시로 교실을 드나들고, 자체 설정한 사소한 생활평점제를 실시하여 밀착지도를 했음에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던 것 같다.


4월의 어느 날 참다못한 몇몇 학생들이 담임인 내게 수업시간, 자습시간, 쉬는시간에 너무 소란스럽고, 교실로 가져와서 학생들이 배식하는 급식에서 몇몇 애들이 맛있는 메뉴를 혼자 너무 많이 담아서 다른 애들이 못 먹는 일이 발생한다는 제보를 했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 반 전체학생들에게 무기명으로 해당학생을 모두 적으라고 했다.

마침 저장해 놓은 자료가 있어서 살펴보니...

35명 중 8명이 집중적으로 표를 많이 받았다. 수업시간에 소란스러운 학생들은 자습시간에도 대개 다 소란스러웠고, 쉬는 시간에만 특화되어 떠드는 아이들도 있었다. 급식을 너무 많이 받아 간다는 학생들은 6명으로 전문화되어 있었고, 그중 3명은 많이 받아 가서 많이 남긴다는 지적도 있었다.


설문결과를 정리하면서 화가 났다기 보다 마음이 아팠다. 이 모든 일의 원인이 배려의 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 특정 학생들을 불러다 벌을 주는 것보다 전체 학생들에게 편지를 써주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무기명투표를 하는 것 자체가 해당되는 학생들에게는 이미 벌받는 시간이었을 것이니...

편지를 바로 완성하지 마자 출력해서 쉬는 시간에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돌아섰다.


그런데 이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신 수학선생님이 내게 오셔서 수업 들어가니까 아이들이 울고 있더라고 어떻게 애들을 감동시킨 거냐고 물으셨다.

내게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징벌적 교육보다 변화하고 성장할 기회를 주는 교육이 더 바람직한 것이니까... 누구도 상처받지 않고, 자발적인 노력을 할 기회가 된다면, 당장의 교육적 성과를 눈으로 확인해야겠다는 교사 중심적 생각에서 잠시 벗어나는 것도 의미 있다는 걸 확인받게 되어 행복했다. 그 이후 아이들은 조금씩 달라지고 서로를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아래 그때 학생들에게 전해 주었던 편지의 전문...

그때는 2007년 4월...

지금이라면 좀더 절제하고 여유를 갖고 썼겠지만... 젊은 날의 나는 필터링이 덜 장착된 투박함이 있었던 것 같다.




반 학생들에게 보내는 첫 번째 편지...

 

배려란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혼자 살 작정을 하지 않았다면 우린 모두 배려를 배워야 합니다. 배려 없는 사람은 당장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은 다른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건 직장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을 생각하는데 자습시간에 내 궁금한 걸 위해 주변 아이들에게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도 방해가 되지만, 물어보는 학생의 귀한 자습시간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경우 고등학교 때 애들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제일 싫었던 때가 자습하는 시간에 묻는 것이었습니다. 집중하는 법을 배우게 되면 집중력에도 가속이 붙는 걸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한창 집중될 때 누군가가 그걸 깨 놓으면 다시 집중하는 데 더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주로 집중을 하지 않는 쉬는 시간 같은 때 질문을 받고 그랬습니다.

 

남을 생각하는데 자습시간에 수군수군 떠들 수는 없습니다. 자신 혼자의 답답함으로 인해 반학생 전체의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을 생각하는데 쉬는 시간에 쌩쑈를 할 수는 없습니다. 피곤해서 엎어져 있는 급우들이 있는데 내가 무슨 권리로 그들을 깨웁니까? 그리고 공부하면서 다음 시간 준비를 하고 있는 애들에게 적어도 방해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생각하는데 내게 주어진 일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제대로 하지 않아서 우리조 애들이 일주일을 더 고생하게 된다면 그 보상을 누구에게 해야 합니까? 내가 안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난 다른 이들에게 죄를 짓는 겁니다.

 

남을 생각하는데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다 집어먹을 수는 없습니다. 나의 욕심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남을 생각하는 데 질서를 깨고 내 멋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질서는 서로를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이기 때문입니다.

 

작년 우리반 학생 중 한 학생이 자습시간에 심하게 떠들어서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어머님 말씀이 자기 공부는 안 해도 남들 피해는 주지 말라고 했는데.. 이러시는 거였습니다. 참 안타까웠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가슴이 찢어지지요.

 

알고 보면 자기 것부터 열심히 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지만, 아닙니다. 배려가 우선입니다. 그 우선순위가 바뀜으로 인해 얼마나 세상이 각박해지고 상처가 많아지고 있습니까?

 

배려가 되면 자신의 일에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친구의 이름을 써야만 했던 아픔과 평소의 자신의 모습을 생각할 때 분명히 이름 적힘이 확실한 느낌으로 인한 불안감...

 

그러나 그런 아픔으로라도 전 여러분들에게 배려를 알게 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건 단지 성적만 올리기 위해서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름이 나온 사람들을 공개하지 않겠습니다. 얘기하지 않아도 본인이 잘 알 거니까요..

벌써 얘기하기도 전에 많이 반성했다고 앞으로는 그러지 않겠다는 쓴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누구나 실수할 수 있지만 그걸 깨닫고 고칠 수 있는 용기는 아무나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것은 통계를 내서 제가 그냥 가지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다시 실시하겠습니다(그리고 그때는 이름을 안 쓰고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처단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이름이 나온 사람의 이름이 다시 언급이 된다면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부모님께 통보한 후 거기에 따른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아직은 여러분 모두를 다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한 사람도 포기할 수 없지만, 또다시 주어진 이 기회에 배려를 배우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과감하게 내치겠습니다. 그 사람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지 않도록 지켜야 할 것이 담임으로서의 제 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방법이 서툴고 카리스마도 부족해서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있음이 늘 여러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전 여러분들과 같은 방향을 향해 서있습니다. 마치 건널목에서 모두가 신호등을 바라보며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전 그렇게 여러분들의 꿈이 켜지기만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하게 될 모든 일들은 그 동일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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