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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May 03. 2023

나의 공부 연대기3 (고등학교 시절-행복교육 반대편)

비평준화 지역 고입시험에서 학교 수석으로 입학했고, 시군지역에서 한 문제 차이로 전체 차석을 했다. 

예비 고1 겨울방학에 시험공부 아닌 평소 공부 습관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매일 학교 독서실에서 하루에 12시간 이상 공부하려 애썼다.

중학교 때는 화장실에서 영어단어를 암기해도 될 수준과 분량이었지만, 고등학교에서 갑자가 많아진 단어와 숙어를 감당하기에 화장실은 너무 좁았다. 마침 왕복 2시간 버스를 타고 다니는 상황이어서, 버스 안에서 영어단어와 숙어를 암기했다. 한 번씩 친구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지만 주로 단어를 많이 봤던 것 같다. 버스도 화장실만큼 단어가 잘 외워졌다. 단어 하나 외우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머리에 되뇌이고, 아름다운 느낌의 단어를 외우면서 평소 마음에 두었던 여학생 한 번 쳐다보고, 지저분한 느낌의 단어를 암기할 때는 옆의 친구를 쳐다보고ㅋㅋ 주변에서 공부잘하는 거 티내냐는 비야냥거림이 들리는 듯했지만 그냥 난 그 자리를 지켰다. 첫 문턱을 넘으면 그 다음은 저항감없이 잘 진행된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 한 번씩 아버지께서 야자 마칠 때 태우러 오셨다. 오토바이로..

오토바이로 어두운 시골길을 달려가는 건 낭만적인지 모르겠지만, 영어단어를 볼 수 없어 속상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태우러 오실 때는 후레쉬를 챙겨오시도록 부탁했다. 오토바이 뒤에 앉아 다리에 힘을 주고 후레쉬를 비춰가며 헬멧밖으로 보이는 단어장을 목숨걸고(?) 암기했다.

지금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위험한 자세였지만, 그 때는 그렇게라도 사소한 시간을 지키고 싶었다.

그렇게 목숨걸고 외운 단어가 절실하게 기억 안 날 리가 없었다. 

그러면 그 사소한 시간을 활용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절대 공부해서는 안 되는 그 찌질한 시간에 공부를 했는데 야자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반대로 야자시간을 날렸는데, 쉬는 시간 따위에 공부할 리는 없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사소하고 찌질한 자투리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거창한 걸 이루는 것이 아닌, 작은 걸 잡으면 큰 건 따라온다고...

그렇게까지 공부했는데도 실패한 이유는... 수업때문이었다. 

수업 수준이 맞지 않다고 생각하고 혼자 공부를 감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망한 거였다.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나의 실패를 통해 수업의중요성에 대해 더 힘을 실어 말할 수 있었다.

전교 1등의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잘하는 학생들이 특정 학교에 몰리는 경향 상, 비슷한 실력의 경쟁자가 없는 학교에서 외로운 자리를 지켜야 했고, 무엇보다 수업 수준이 맞지 않아 고생했다. 영어선생님 한 분은 아예 나를 불러 수업 들으면서 졸지 말고 혼자 공부하라고까지 말씀하셨다.


고등학교 생활은 너무 힘들었다. 대입을 치르는 수험생이 다 그랬겠지만... 그때는 꼭 이뤄야 할 성취기준이 정해져 있었다. 나 혼자의 기대만이 아니라 부모님과 학교와 지역사회가 주목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린나이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버거운 짐이었다. 무슨 공인이라도 된듯 나의 모든 생활은 외부의 기대에 저당잡힌 것처럼 자유롭지 못했다. 휴식도 죄책감의 값을 지불해야 했고, 늘 충분하지 못하다는 자기 압박감에 시달렸다. 난 도무지 인간답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없어야 했다. 모든 사소한 행복까지도 대입 이후로 다 미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나의 그런 마음을 털어놓을 수조차 없어 더 괴로웠다. 내게 필요한 건 "넌 꼭 서울대 갈 거야"라는 격려가 아닌 "서울대 못 가도 괜찮아. 성적 떨어져도 괜찮아."라는 김새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건 망해버리라는 저주가 아니라 결과나 성취에 관계없이 널 사랑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서울대 떨어졌을 때, 주위 사람들에게 외면당했고, 난 죄인처럼 재수생이 되었다. 

주변의 인식이나 기대에 내 자존감과 가치를 걸 필요는 없다는 걸 그때는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걸 알게 된 지금은 학교에서 고통받는 학생들에게 내가 필요했던 그런 존재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고통이 딸들에게 되물림되지 않으려 애썼다.

전교 1등은 120, 130점 이상 맞을정도로 준비를 해야한다. 운좋게 100점 맞는 것과는 다르다. 그말은 남들이 굳이 하지 않는 것까지 촘촘하게 더 준비한다는 뜻이다. 물론 준비도와 공부내공에 따라서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난 선행도 중학교 때까지의 평소 공부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 많은 압박감에 시달렸다. 

1학년 모의고사에서 전국 4등을 했다. 그래서 더 힘들어졌다. 학교의 기대에 부합하는 가능성이 너무 빨리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들의 따뜻한 격려와 기대의 말씀이 내겐 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난 그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충분한 내공을 갖추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모도 교사도 아이의 성취에 칭찬을 자제해야 한다. 아이가 어쩔 수 없는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과정과 그 노력에 칭찬을 집중해야 한다. 

자세한 이야기는 캐롤 드웩의 <마인드셋>이라는 책에서 확인해보시길...

그래서 친구관계를 포기했다. 학반에서 아이들과 교류 없이 거의 왕재수로 지냈다. 

내 목표는 서울대 영문과였다. 영어교사가 되고 싶었지만, 영어교육과보다 합격점이 더 높다는 이유로 설정한 목표다. 교직이수를 하면 되는 거였으니까. 

그러다가 학교에서 친구들과 교류가 늘어나고, 내게 질문하는 애들에게 가르쳐주고 설명해주기로 마음을 열면서 서울대 영어교육과로 목표를 하향조정했던 기억도 난다. 사실 영어교사가 확실한 진로였다면 입결 성적을 떠나서 그게 맞는 목표이긴 했다.

큰 딸이 중학교 성적이 20-30%대였고, 일반고 갈지조차 고민하기도 했었는데... 중학교 내신보다 고등학교 준비에 방향을 설정해주었던 덕분인지.. 첫 중간고사에서 전교 1등을 하는 대박사건이 일어났다. 딸의 과거(?)를 아는 학교와 교회의 모든 사람들이 다 까무라칠 일이었다. 딸은 중간고사 끝나고 나서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싶었는지 열심히 독서실을 다니면서 공부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딸은 그 자리를 지킬 자신이 없어서 친한 교회 선배에게 전화하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난 그 심정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이해가 되어서 가슴 아팠다. 딸에게는 농담처럼 진심을 담아 거기가 너의 자리는 아니고 꼭 미끄러질 것이니 부담갖지 말라고 말해주긴 했다. 마치 아빠의 기대지분은 포기하겠다는 식으로. 그리고 그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딸 아이의 무거운 짐을 강제로라도 내려놓아 진 것 같아 아쉬움보다는 안도감이 더 컸다.  

나도 딸처럼 그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고2가 되어서 수학이 망가졌다. 60점 대까지 떨어졌던 것 같다. 아무리 해도 안 될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서울대는 커녕 연고대도 이미 한참 전에 물건너 가는 성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내가 엄청난 결단을 했다. 고1 수학부터 다시 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몇 달만에 성적이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결국 정상궤도로 돌아왔다. 다시 돌아가니 안 보였던 것, 놓쳤던 것이 신기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 학생들에게도 자신있게 강조한다. 잘 안 될 때는 뒤를 돌아보라고.. 그게 수학이든 영어든... 할 수 있는 것부터 그 출발점부터 다시 시작해야 회복할 수 있다고.. 그게 18년째 진행하는 내 영어멘토링 학습코칭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기도 하다. 

그렇게 고3 때는 성적이 거의 회복되었고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노릴 성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고3, 9월에 아버지가 갑자기 교회를 옮기실 상황이 생겼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가까운 거리를 고려할 수 없었고, 뜬금없이 경기도에서 경북 김천 인근의 시골교회로 가시게 되었다. 동생 둘은 전학을 했고, 난 대입 학력고사를 서너 달을 남겨두고 있어서 전학이 가능하지 않았다. 

학교에 기숙사 시설은 없었지만 평상을 갖춘 자습실에서 자고, 학교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매일 가까운 존재감만으로 힘이 되었던 가족의 부재는 극도의 외로움과 허전함으로 드러났다. 


그런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난 서울대 영어교육과를 낙방하고 학교에서 약속받은 대학 4년 등록금도 날렸다. 전화로 합격여부를 확인하던 그 시절에, 어머니가 전화로 불합격이 확인되는 순간 오열하던 그 장면을 난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난 그 순간 우주 최강의 불효자가 되었다. 

고등학교 때 내 책상에 늘 붙여 두었던 좌우명이 있었다.

Slow but steady wins the race.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하면 경주에 이긴다.

거북이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당장의 위치가 중요하지 않다는 희망에다, 노력의 가치를 담은 좋은 명언이다. 그러나 전제는 어떻게든 경주를 이긴다는데 있다. 그렇게 꾸준히 노력했는데 경주에 이기지 못했다면 실패인 것이다.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꾸준한 노력으로 대변된다. 그당시 유행하던 삼당사락(세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에 맞게 잠을 줄이지는 못했지만, 그래서 아버지는  대학 떨어졌을 때 잠을 많이 자서 그랬다고 질책하셨지만,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낮에 집중하기 어려웠으므로 깨어 있는 시간에 시간을 쪼개쓰려고 늘 애썼다. 쉬는시간에도 점심, 저녁시간에 밥을 먹으면서도 공부를 했다. 난 잠을 적게 자면 집중할 수 없는 체력과 기질임, 그 한계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노력이 반드시 보상받아야 한다는 결론을 난 이미 정해놓고 있었고, 그 종착지는 원래 나의 목표였는지, 학교나 주변에서 설정한 목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울대여야 했다.

그러니 오늘의 꾸준함으로 보장받는 건 없었고, 혹 보장을 받는 성적이 나오더라도 끝까지 그 성적을 가져갈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 과정이 부담이고 압박이었다. 분명 뭔가를 알아가고 배우며 성장하는 건 기쁘고 즐거운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인데, 내게는 그걸 누릴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딸들이 성적에 연연하지 않고, 그저 배움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너무 기뻤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토끼가 되기를 종용한다. 거기다 거북이 같은 지구력과 끈기를 접목한 토끼가 되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타고난 재능과 후천적 노력의 프레임으로 이해한다. 물론 재능을 타고나지 않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러나 거북이가 애초에 토끼를 이기려고 경주에 참가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승리여부만이 경주의 목적이었다면 거북이 자신의 발걸음도 부담이었을 것이다. 

경주 자체는 상대평가다. 토끼는 상대평가에 최적화된 캐릭터다. 달려갈 길 다 가고 승리를 만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믿었고, 충분히 앞서 있는 것에 대해 만족했고, 승부가 나기전부터 여유를 누리며 무료해했다. 우리 시대 학생들의 모습과 겹치는 면이 있다. 이기는 것에만 초점이 있으면 자신의 속도에 관계없이 과정이 즐거울리가 없다. 이기는 것만 즐겁고 그렇지 않을 때는 과정 중의 모든 노력이 부정된다.

거북이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갔다. 완주했다는 건 그의 정신력과 지구력과 인내심이 바탕이지만, 과정자체도 감당할만한 즐거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것은 거북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결정지을 수 없는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기게 된 것이고, 그랬다면 거북이도 기뻐하긴 했겠지만, 승부에 앞서 거북이는 과정을 즐거워하고 행복했을 것이니 졌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결과만 선하다는 생각은 아이들에게도 해롭다. 도달하는 그 순간을 위해 모든 행복과 즐거움을 다 담보로 잡아 두어야 하며, 우리 삶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과정을 누릴 기회를 박탈당하기 때문이다.

승률 70%의 엄청난 강팀도 30%는 진다.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결과는 자신들의 소관이 아니다. 과정과 결과를 분리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는 결과에만 집착한다. 결과는 우리 소관이 아님을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일수록 마음의 평안이 즐거운 성장을 매순간 발견하게 해 줄 것이다.

난 사교육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공교육교사다. 그러나 그건 자기주도적 학습과정에서 혼자 힘으로 할 수 없을 때 잠시 도움을 청해야 하고, 그 목적은 자율성을 유지하면서 자신 혼자의 힘으로 공부를 이어가는 자립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다. 무분별한 속도경쟁이나, 출발점을 남들보다 더 유리하게 만들려는 인위적이 노력이 아니라. 

그러나 사교육은 결론을 정할 수밖에 없다. 원하는 성적을 얻어내지 못하는데 과정이 즐거웠다고해서 학생이든, 학부모든 그 학원에 남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교육특구는 시험 한 번에도 학원을 갈아탄다. 

지금 생각하니 난 결론을 정해 놓은 그 과정에서 힘겨워하고 있었던 거다. 사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내게 정해진 결론은 서울대였고, 고등학교에서 스카이합격했을 때 약속받은 대학 4년 등록금이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늘 확인시키고 상기시켜 준 것은 내개 응원을 보내주는 가족과 학교선생님과 교회분들이었다. 그들의 기대와 응원은 내게 과분한 축복이자 사랑이었다. 그분들이 의도적으로 날 힘들게 한 건 아니지만, 난 나의 욕심과 꼭 그래야만 한다는 부담과 상황을 이기지 못해서 과정과 결론을 분리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도 몸도 계속 아팠다. 특히 고3 때는 그때의 일기장을 들춰보기가 겁날 정도로 거의 강박과 우울의 깊이가 신경증상이나 정신과 치료가 필요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론을 생각하고 압박하며 그 조건을 충족해야 나의 가치가 증명된다는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난 집에서나 학교에서 학생들의 그 짐을 헤아려 애쓰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려 늘 애썼다. 

그런 압박감없이 즐겁게 공부했다면, 물론 이기지 못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디든 도착했을 것이다.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 아닌 아쉬움만 가득하다면 또 다른 기회를 노리면 되는 것이었다. 

난 대학을 떨어지면서 나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고, 장학금 날리고 대학도 떨어졌다는 현실적인 낭패보다,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이 파훼되는 것을 느끼며 힘들어 했다. 

그 가난한 마음을 가진 순간에야 처음으로 개별적이고 인격적인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대학을 떨어졌어도, 인격적으로 온전하지도 않고 결함많은 나도 충분히 귀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자각이 날 살렸다. 그 복음의 감격으로 다시 일어섰고, 난 상처입는 사명자가 될 기회도 얻었다.

내가 교직에서 만나는 학생들이나 딸들은 나 같은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명감으로 불타올랐다. 교육특구 대구여고에서 전교권 학생들이 나에게 많이 기댔고 상담을 많이 받았다. 난 다른 학생들이 부러워하는 그들의 영광 뒷면에 어떤 부담감과 무게가 있는지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 감정이입된 공감의 위로를 줄 수 있었다.


성적이 떨어졌어도, 실수했어도, 넘어졌어도 괜찮아. 넌 네 모습 그대로 소중한 존재니까. 이미 넌 자랑스러운 내 제자니까. 매순간 조금씩 이뤄가는 성취와 성장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기를 기대하고 응원할게.

한 걸음, 한 걸음이 행복걸음이 되길. 과정을 즐기고 누리며, 결국 마지막 걸음이 내디딘 그곳이 도달점이길. 

성취와 좌절의 그 어떤 순간에도 변함없이 널 응원하고 지지한다.

모든 선택을 존중하고 그 결과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실패를 통해서도 배우길.

의미 없는 경험은 없으니 무슨 일을 겪든 넌 성장할 거다. 실연의 아픔으로도… 

과정은 "행복할 만큼만", 결과는 "어쩌다 보니"이길...

"행복할 만큼만"은 큰 딸의 고3 때의 좌우명이다. 내가 딸에게 전했던 행복교육을 잘 담아낸 문구라서 감탄하며, 학생교육과 교사 및 학부모 강연에 계속 인용하고 있다.

난 정신력과 고통스러울 정도의 지속적인 노력으로만 성취할 수 있을 거라는 강박 속에서 주변의 부러움과는 별개로 늘 힘겨웠다. 그래서 난 행복교육을 그렇게도 외치고 싶은가보다.

고등학교 시절 나의 공부 정리 

정말 열심히 공부했지만 수업의 충족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학력고사에서 제2외국어와 직업교과(농업/상업/공업 등)중 택1을 하던 그 시절, 학교에서 제2외국어 선택자가 반에서 4명, 그 외에는 모두 농업을 선택하는 상황에, 다수의 횡포처럼 농업선생님은 고3 때에도 다른 공부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소수 과목이라는 이유로 제2외국어 시간에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다른 공부를 했는데... 난 농업시간에 수업을 안 듣다가 엎드려뻗쳐 벌을 자주 섰는데, 땀이 나면 들어가도 되었지만, 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분해서 그냥 오기로 버텼던 기억도 있다. 

내신은 전체 석차를 그룹별로 등급을 매기는 거라서 전혀 부담이 없었고, 대학지원 후 학력고사 성적으로 결정을 짓는 대입제도라서 학력고사 준비가 절대적인 목표와 공부방향이었음에도, 선택한 과목 아닌 과목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 분함은 몇 십년간 이어졌다. 정규교과는 모두 다 중요하다고 학력고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논리를 폈던 그 쌤은 농업과목 학력고사 대비를 위해 다른 교과 시간을 빌려 보강도 많이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직업과목 대신 제2외국어를 선택했을 지역의 수준높은 고등학교를 선택하지 않아 뒤따르는 선택에 따르는 결과에 대한 무게였다.

그당시 학력고사에는 문과도 사회 2과목에 과학도 1과목 선택해야했는데, 난 문과생들이 다 선택하는 지리대신에 세계사를, 생물 대신에 물리를 선택한 덕분에 3학년 때는 수업에 상관없이 혼자 학력고사를 대비해야 했고, 수업 선택권도 없어서 학력고사 선택과목이 아닌 과목 수업을 들어야 하는 부담도 있었다. 사회, 과학은 내 선택이었으니 할 말이 없지만, 어쨌거나 다수가 하는 걸 따라하며 타협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고집불통이었다. 자기주도성의 극단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학교 수준이 선택과목에 따른 교과 편성에 영향을 많이 주었다. 그리고 같은 지역에서 성적이 좋은 학교의 커트라인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들이 대다수였던 구성원이 어느 정도 이상의 수업 수준을 보장해주지 못했던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루저의 변명일 뿐이고... 

그래서 학생들에게는 늘 수업의 중요성을 말한다. 대구의 경우 교육특구의 학생수준은 매우 높아도 평준화지역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수업이 진행되니 건방떨지말고 수업들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실제로 교육특구 있을 때 내 수업을 가장 열심히 들었던 학생은 서울대의대를 진학한 학생이었다. 교육특구이기 때문에 평준화라도 기본 수준 이상의 수업은 이뤄졌지만, 그럼에도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어설프게 잘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을 잘 안 하고 딴 공부를 하려 한다. 대개 그런 학생들은 끝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건 어디서 많이 본 데자뷰이기도 하다. 내 삶에서 본 나 자신의 고등학교 때의 모습이니까..

실제로 꿈을 이룬 학생들의 공통점은 수업시간에 농담조차 받아적을 준비가 되어 있는 몰입하는 학생들이라는 것이었다.

모든 초점을 수업에 맞추고 수업이해될 정도의 예습을 하고, 수업 이후 반드시 복습을 하여 기억을 보존하는 효율성이 중고생 공부의 기본이다. 거기다 국영수의 평상시 꾸준한 공부까지 이뤄져야 수능대비까지 된다는 것이 원칙이다.

나의 실패와 시행착오가 나를 만나는 학생들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것도 나의 사명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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