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부 연대기2 (중학교 시절-교사꿈의 시작)
초등학교보다는 좀 더 넓고 큰 무대인 중학교로 진학을 했다. 그래도 여전히 작은 규모의 농촌학교였다. 초등학교보다 커진 규모의 무대에서 여전히 1등을 하고 싶은 욕심은 있었고, 계속 전교 1등을 하며 장학금을 받았다. 전교 1등을 지켜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실현 가능한 목표였으므로 난 시골학교지만 전교 1등의 정체성을 스스로 확립하면서 자존감과 자신감을 적립해 갔다.
그렇게 자신감이 붙게 되니 훨씬 더 큰 무대인 시군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도 매년 1, 2등을 했다. 매년 학교 대표로 시군수학경시대회에 나가게 되면서 수학공부는 원 없이(?) 했다. 문제집이 그렇게 다양하지 않던 그 시절, 소도시 시중에 있는 문제집은 다 풀었던 것 같다. (아버지 친척 병문안으로 대구를 따라왔을 때 서점에서 새로운 문제집을 발견하고 신기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까지도 대구는 아버지 고향갈 때 기차로 스쳐지나가던 도시였고, 유일하게 잠시 방문해서 수학문제집 샀던 기억이 전부였는데, 이후 대구 시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3년간 경시대회에 참가하지 않고서 내가 그렇게 공부를 할리가 없었기 때문에 당장의 메달의 기쁨보다 고등학교 공부에 대한 준비이기도 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니 더 큰 의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선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학교 진도를 따라가며 단계별로 심화문제를 풀어가는 즐거움이 뭔지 제대로 알게 되었다.
큰 딸은 이과생이었지만 수학선행을 하지 않았다. 방학 때 매 학기 예습 정도만 했었는데, 학원을 안 가고도 수학을 잘 했던 이유는 서두름 없이 진도에 맞춰 개념을 잘 다졌고, 스스로 심화문제까지 풀어가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시대는 다르지만 내게 이런 성취의 체험이있었기 때문에 딸들에 대해 친구 수학선생님들의 걱정어린 학원보내야한다는 강권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것 같다.
학교대표로 영어말하기 대회를 나간 것도 내게는 큰 계기가 되었다. 영어선생님께서 준비해주신 대본을 암기하여 자연스럽게 말하려 애쓰는 것이 거의 전부였지만, 영어를 언어로 받아들이면서 영어에 대한 흥미를 확장하게 되었고, 내 진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초등학교 때는 공부를 거의 안 했고, 수업들은 걸로 시험 전날 공부한 게 다였다. 중학교 와서도 시험이나 대회 등의 이벤트가 아니면 공부를 꾸준히 하지 않았다.
그래도 모든 수업에 집중하려 노력했던 건, 공부를 잘해보았다는 성취의 기억과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의지가 한 몫했던 것 같다. 그리고 수업을 따라갈 수준을 확보했기 때문이었다. 1, 2학년 때는 평소에 수업만 듣고, 필요할 경우 숙제와 예습, 복습만 했을 뿐 특별히 공부를 더 했던 기억은 없다. 그대신 시험때는 집중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평소에는 고전소설 완역본 위주로 독서를 많이 했고, 팝송이나 클래식 음악에 심취했다.
결정적으로 잘 했던 일 중 하나는 자발적으로 기획해서 꾸준하게 해냈던 영어단어 학습이었다. 메모지에 영어단어 10개 씩 적어 놓고 화장실 갈 때마다 하나씩 들고가서, 다 외우지 않고는 나오지 않았다. 무슨 질환에 걸릴 위험을 무릅쓰고ㅋㅋ 배탈이 날수록 내 영어단어실력은 더 늘었다. 1주일에 한 번씩 단어를 모아서 스스로 단어시험을 치기도 했다. 화장실에서의 시간은 집중력이 높아지는 혼자만의 시간이었기 때문에 단어 암기가 어려운 미션이 아니었다. 중1 때부터 1년 이상 그러고 나니까 더 이상 중학 수준에서 외울 단어가 없을 정도였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내신 및 모의고사, 학력고사에서도 영어를 틀린 기억이 거의 없다. 그 시작은 영어 단어였다. 그리고 노는 시간이나 다른 여가시간을 뺀 것도 아니고 그저 흘러나가는 시간만 잡아서 루틴으로 만든 것이었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학생들에게도 자투리 시간을 강조한다. 자투리 시간은 영어단어를 위한 최적의 시간이다.
내가 다니던 동네에는 고등학교가 없어서, 전학 오기 전에 살던 소도시 지역의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다. 버스로 왕복 2시간 거리였다. 난 그저 시골학교 1등이었는데, 수학경시대회 성과 때문이었는지 비평준화 지역 3군데 고등학교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아 우쭐했던 기억이 난다. 난 세 개 고등학교 중에서 아버지가 교목으로 계시던 사립고등학교를 선택했다. 학교 컷은 제일 낮았지만, 3년 장학금에, 스카이 합격 시 대학 4년 등록금까지 대주겠다는 파격 제안을 했었기 때문에 환경에 관계없이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될 거라고 착각했던 것이다. 게다가 학교 선생님들이 예전의 동료로서 아버지를 찾아오셔서 아들을 안 보내면 의리가 없는 것이라는 분위기까지 연출하셨다고 했다. 선생님들이 우리 집에 오실 때 친구 집에 피신해 있었다. 아버지는 내 의지에 반해서 강제로 선택에 내몰리는 걸 원치 않으셨던 것 같다. 물론 집안 형편을 생각하면 마땅히 그 학교에 가야 했지만 강요하지 않으셨다. 자율적으로 내가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나의 몫이 되었다.
비평준화지역 고입을 앞두고 중3 때는 반마다 9시까지 야자가 있었다. 급식이 없던 그 시절 도시락을 두 개씩 싸가지고 다니면서 공부했었다.
단지 고입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 과정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의미도 있었다. 물론 내게는 학교에서 암묵적으로 전달한 미션이 있었다. 시군 고입 시험 전체 수석이었다. 그때는 중학생들도 모의고사를 치르고 성적표를 받았다. 1, 2학년 때 꾸준히 공부하지 않고 시험공부만으로 연명했었으니 기대하는 성적이 제대로 나올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할 수 있다는 오기와 욕심은 있어서 1년 내내 힘든 무게를 감당해야 했다.
그런데도 3학년 때 학교 내에서 첫사랑을 시작하게 되었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기도 힘든 그 시기에 사랑이라는 사치라니... 아니 그래서 내겐 사랑이 더 필요할 수도 있었다. 그 사랑은 나의 성적이나 목표도달의 현실성 등으로 판단받지 않았고, 나의 외모나 나의 성격 등의 부족함에 의해 영향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 한다는 자부심은 있었고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그게 학생으로서 가장 큰 장점일 수도 있었지만, 그건 각자 가진 각기 다른 장점 중 하나일 뿐, 성적 외의 조건으로 보면 난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였다. 성적순으로 사랑받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애쓰지 않아도, 자격이나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날 사랑하고 아껴주던 존재와 사랑이 그 힘든 과정에서 날 살아 있게 하고 버티게 해주었을 것이다.
연애를 하면 보통 성적이 떨어진다. 물리적 시간 자체에 영향을 받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연애에 올인하는 정도에 따라 성적 폭락 폭이 다르다. 그러나 연애를 안 했으면 성적이 떨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증거도 없다. 공부시간이 많다고 모두가 공부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 경우에는 그 사랑으로 인해 내 목표를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을 잘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래서 큰 딸이 고등학교 시절 연애할 때에도 이해해줄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중3 때 학교 선생님들과 부모님과 교회와 지역사회의 기대에서 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만의 속도로 알아가는 즐거움을 누리기에는 늘 내가 이뤄야하는 목표가 기준이 되어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몸이 너무 안좋아서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숙직실에서 자다가 목이 돌아가는 일을 겪었다. 가만히 있으려 해도 목이 한쪽으로 돌아가는 황당하고 절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학교에서 119를 불러서 응급실로 향했다. 뭔지 모르는 약물치료와 수액을 맞고 입원실에서 깨어났고, 이내 회복되었다.
나의 신체적 이상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대부분 심인성, 신경성이라는 말이 붙었다. 약물로 치료가 안 된다는 의미였다. 난 그 당시 그게 스트레스라는 사실을 몰랐다. 주변의 관심과 기대를 사랑이라고 생각했고, 늘 그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채감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2학기가 되어 난 내 삶의 분신과도 같은 라디오카세트를 어머니에게 자발적으로 맡겼다.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가 잘 안 되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음악을 내 삶에서 분리할 수 없었는데, 점점 위기감을 느끼면서 음악만 들을 여유나 사치를 누릴 수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비장한 각오의 실천이었던 셈이다.
그 즈음에 첫사랑과도 헤어졌다. 고입이 다가오는데 그녀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수시로 공부를 가르쳐주고 이끌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내 힘으로는 안 된다는 무력감에 괴로웠다.
그당시 난 성취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까짓거 학교수석입학, 시군 수석 입학을 안 해도 그만이고, 그녀도 성적 좋은 고등학교에 갈 상황이 아니면 더 낮은 학교에 가도 되는 건데... 온통 삶의 가치를 성취에 두고 있었던 거였다. 나를 지탱해주었던 진심어린 사랑의 혜택을 보고 있었으면서 바보같이 충격요법을 쓴다고 결별을 선언했고, 난 여전히 사랑의 마음을 품은 채로 풀 수 없었던 오해의 마음까지 가슴 속을 가득 채우며 괴로워했다.
지금이라면 그녀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선택과, 더 낮은 고등학교 선택도 그저 존중해주었을 것 같다. 혹 충격요법으로 마음에도 없는 결별을 선언했다면 바로 오해를 풀었을 것 같다.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난 성장했지만, 그녀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는 그후로도 계속 미안한 마음과 죄책으로 힘겨워했다.
헤어진지 16년이 지난 해에 우연히 극적으로 전화연락이 되어 그때 어떤 마음이었는지 때늦은 오해를 풀고, 진정 사랑했던 첫사랑이었다고 겨우 말해주었다. 그 말에 그녀는 행복해했다. 통화 이후 아이러브스쿨 동창 SNS에서 내게 남겼던 말이 그녀가 내게 전한 마지막 메시지였다. "보고싶다, 친구야"
그 이후로는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난 그녀에게 공부를 가르쳐주었지만, 그녀는 내게 인생을, 배려와 공감과 용서와 진심을 가르쳐주었다. 교사의 역할은 공부 그 이상의 가르침을전하는 것이라는 걸, 난 이미 배우고 있었다.
그런 비장하고 슬픈 과정을 거치면서 내 기억에 2학기 모의고사에서 경기도 4등, 전국에서 60등을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난리가 났다. 3학년 담임선생님은 문자 그대로 뛸 듯이 기뻐하셨다. 그 성적은 학교 선생님들조차 내가 수석은 글렀다고 기대감을 거두던 시기에 일어난 드라마틱한 결과였다.
난 노력의 보상을 받은 것 같았지만, 마냥 기뻐하지는 못했다. 첫사랑의 아픔과 죄책감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나혼자 잘 되는 것 같은 느낌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중학시절은 공부와는 별개로 내 인생의 가장 행복했던 리즈 시절이었다. 하루 하루 지나는 것이 아쉽고 슬프기까지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영향력 있는 위치였고, 부동의 전교 1등 포지션에 글짓기 등 교내 각종 대회도 휩쓸었고, 학교 특색사업으로 매달 했던 체육대회에서 달리기로도 늘 1등을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내 키가 중1 때 키여서 다른 학생들보다 신체발달이 빨랐던 덕을 봤다. 학교 육상부에도 발탁되었지만 거부했다.
그 당시에도 난 남학생들보다 여학생들과 더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대화가 잘 통하고 감성적인 교류면에서도 더 맞았다. 대학시절도 그랬고, 교직에 나와서도 그 경향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교내에서의 내 영향력이 커서였는지 내가 존경하던 선생님 한 분이 내가 3학년일 때 1학년 담임반 학생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도록 초대해주셨다. 그래서 후배들에게 공부방법과 생활에 대해서 조언을 했었다. 아마 그때가 내가 교사로서 꿈을 꾸게 된 첫 순간이었던 것 같다. 그 시간 이후에도 후배들 중 몇 명은 내게 손편지를 쓰면서 감사와 다짐의 마음 등을 전달했고, 나도 답장을 정성껏 해주었다. 정말 교생실습 나온 것 같은 가슴벅차고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작고 초라한 것이라도 내가 가진 것을 나누면서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이렇게 교감이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설렜고 행복했다. 이런 아이들을 평생 만나고 싶었고, 그 꿈은 현실이 되어 지금까지도 벅찬 감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편지를 주고 받던 학생 중 한 명이 연탄가스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느꼈던 슬픔은 눈물로 비워내도 절대 비워지지 않은 깊은 상실로 아직 가슴 한 켠의 상처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런 일이 아니라도 보통은 1년간의 시한부 기간 이후 각자의 인생의 경로를 찾아 떠나가는 학생들에 대한 비장함과 슬픈 감성도 그때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의 꿈은 원래 의사였다. 초등학교 때 불치병으로 사별하는 슬픈 영화를 보고 불치병을 연구하는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과학실험대회를 나가려고 준비하는 중에 개구리 해부를 도저히 할 수가 없어서 의사가 되기를 포기했다. 순진한 생각으로 시작해서 사소한 이유로 오랫동안의 꿈을 바로 접었지만 지금 생각하니 너무 다행이다.
제자 중 한 명은 의대를 목표로 노력하다가 고3 때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하면서, 결국 진로를 바꿔서 연세대 건축과를 갔는데, 의대 아닌 건축과라서 너무 행복하다고, 자기 적성에 정말 잘 맞는다는 감사의 메시지를 내게 전한 적이 있다.
어쨌거나 진로가 수시로 바뀌는 것도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한 번에 결정하려고 미뤄두지 말고 이것저것 직간접체험을 통해 서서히 자신을 살펴야 하고, 중학교 때 특히 독서를 통해 진로 고민을 진지하게 해야 한다는 평소의 진로조언도 내 중학교 시절의 체험에서 시작되었다.
학교에서는 내게 과학고를 권유하기도 했다. 수학, 과학 모두 좋아했기 때문에 한동안 고민을 했었지만, 그러기엔 영어가 너무 좋았다. 그리고 교사의 꿈을 키우게 되어 과학고는 더 이상 미련이 남는 고민거리가 되지 않았다. 물론 합격도 장담할 수 없었겠지만...
중학교 때 성적이 훨씬 더 좋고 탁월해서 거부할 수 없이 과학고에 진학했다면 난 불행했을 것 같다.
나의 진로는 이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현실을 만나 자리를 잡아갔다. 이후 난 꿈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고, 그 시작은 중학교 때였다.
난 영원히 그 중학교에 머물고 싶었다. 학생들 사이에도 선생님들과의 관계에서도 순수함과 서로를 아껴주는 진심이 넘쳤던 그 순간을 잡아두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교 졸업 이후에도 학교를 떠나지 못하고 교직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긴 학교생활의 끝이 점점 보이는 나이가 되어가니 그 슬픔의 깊이도 점점 짙어진다.
중3때는 첫사랑을 했고, 방황하고 고뇌하던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며 편지를 주고 받는 상담자 역할도 했다. 그때 주고받던 편지와 나눴던 대화의 경험도 교사로서 상담자로서 준비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나의 공부 정리
중학교 때는 많이 사랑했고, 많이 고민하고 방황했으며, 글쓰기를 하면서 인생도 모르면서 인생의 깊이를 가지려 애썼다. 감성이 넘쳤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이해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웠다. 독서를 계속하면서 삶과 연결고리까지 이어가는 간접체험을 이어갔다. 여전히 이벤트 중심의 공부에 머물렀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최선을 다했다. 부족한 난,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공부보다는 인생에 대해 더 많이 배우고, 꿈을 구체화하게 된 결정적인 시기였다.
그러나 매일 꾸준히 학습하는 습관이 형성되지 않았고, 고등학교의 대략적인 선행조차 이뤄지지 않은 상태여서... 힘겨운 고등학교 공부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알고 있었더라도 그때의 행복과 공부를 바꾸지는 않을 것 같다. 공부든 업무든 성취든 삶의 과정을 포기하고 결과만 바라는 삶은 한 순간을 위해 대부분의 행복을 희생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기대에 스트레스를 안 받은 건 아니지만, 과도한 개입이 없이 날 믿어주고 기다려주셨던 것이 나의 행복까지 지켜주었고, 적어도 그 시기에 필요한 공부에 대한 성취를 이루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