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 관찰 후 수업 후기>
1. 래퍼처럼 쏟아내기
컵과 스푼 하나를 가지고 전치사의 의미를 래퍼처럼 쏟아낸다. 학생들의 눈은 교사의 컵에 고정되어 있다. 귀는 교사의 말에 집중되어 있다. 볼펜을 잡았지만 써야 할 타이밍을 못 잡고 있다. 잠시 딴생각하면 내용이 쓰윽 지나가 버린다. 초집중하든가 편안하게 듣든가 둘 중 하나이다.
2. 뉘앙스, high expectation
1) 미묘한 차이. 차이에서 오는 느낌이나 인상
선생님 영어 수업을 들으며 뉘앙스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원래의 의미가 있고, 의미가 확장되어 파생된 의미도 있다. 제대로 배우지 않은 사람은 이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깊이 배울수록 언어가 정교해지고 풍성해진다. 선생님이 언어의 미묘한 느낌을 학생들에게 알려주려고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2) 번역한 책을 읽을 때, 어떤 번역서는 기계적이고 딱딱하지만, 어떤 것은 자연스럽다. 같은 번역임에도 어떤 어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문장이 건조해지기도 하고, 살아 꿈틀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든다. 미묘함이 몸에 배면 언어가 풍성해지고 삶이 풍부해진다. 시작은 작은 것을 대하는 디테일이다. 전치사 강의 속에 이런 디테일이 느껴졌다. 디테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이게 디테일인지 돌아볼 겨를 없이 무덤덤해졌지만, 이를 통해 일정 수준 이상의 디테일을 당연히 받아들이게끔 하는 것 같았다. 교사가 높은 기대감을 가지고 해당 수준까지 도달해야 함을 강조하면, 비록 학생들은 그 수준까지 이르지는 못하겠지만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선다.
3. 여백의 미
1) 교사에겐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학생의 종착점을 알기에 잠시라도 쉴 틈이 없다. 종착점을 모르는 학생은 긴박하지 않지만, 가야 할 길의 거리와 험난함을 아는 교사는 매 순간이 촉박하다. 고등학교에서 절박한 학생들을 수없이 봐왔고, ‘중학교 때 미리 준비할걸’이라며 뒤늦게 후회하는 학생들을 수없이 상담했으므로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들이 안타깝다. 1년 뒤 그들의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기 때문이다. 재촉하지 않을 수 없다. 교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학생들이 많이 후회하지 않게 최소한의 기본기를 다져놓는 것이다. 고등학교에 가서 덜 후회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것에 시간을 쓸 여유가 없다. 기본기만 다지는 데에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2) 학생에겐 교사의 열정이 부담이다. 교사의 열정을 오롯이 받아서 소화할 역량도 관심도 부족하다. 그저 코앞에 닥친 공부 할 분량이 너무 많기만 하다. 저걸 언제 다 외워야 한단 말인가? 학원 숙제로도 벅찬데 수업 시간에 하는 공부하는 내용은 학원의 몇 배에 해당한다. 학생의 한계를 넘어선다. 수업 시간에 조금은 놀고 싶은데 틈이 없다. 우리를 대하는 선생님의 마음을 알기에 섣불리 말을 꺼낼 수 없다. 선생님의 설명 중에서 아는 것이 나오면 받아들이고 모르는 것이 나오면 잠시 딴생각을 한다. 그저 선생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기 때문에 나의 허점은 노출되지 않는다.
3) 수업을 촬영하며 조금 답답했다. 책상 배치로 답답했고, 엄청난 양의 콘텐츠에 압도되어 답답했다. 제일 뒷줄에 앉은 학생들의 의자가 벽에 붙어 있어 지나다니기 불편했다. 학생들은 이 불편함에 익숙해졌나? 아니면 나만 불편한가? 이곳저곳을 마구 돌아다니며 촬영하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책상 한 줄 한 줄이 장애물이었다. 막혀 있는 벽과 같았다. 수업을 참관하기 전에 학습지를 미리 공부했다. 영어 공부에 관심 많은 나에게는 매우 유익한 자료였다. 보내준 자료를 순서대로 공부했다. 형용사, 계속적 용법, have been ~ing, 전치사. 전치사에서 막혔다. 어디까지 수업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이것을 전부 다룰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 전치사 시작 부분에서 컵과 스푼을 사용한 것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학생들이 집중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집중력은 끊어졌다 이어졌다를 반복했다. 교사가 제시한 학습량에서 무너졌다. 내 용량을 초과했다. 그것도 한참 초과해서 나는 과포화 상태가 되었다.
4) 대학원에서 학위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당시 나는 논문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데이터양을 늘리고 있었다. 더 많은 수업을 보려 했고, 부족한 내용에 대해 추가 인터뷰를 하려 했고, 연구 대상이 남긴 메모 등도 수집해서 분석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다. 데이터의 양과 질은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너무 많은 데이터를 수집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데이터가 많아지면 어느 순간에 데이터가 연구자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과도한 데이터 축적은 오히려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었다. 적당한 순간에 데이터 수집을 그만두고 그 데이터를 분석해서 소화하는 작업을 해야 양질의 논문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데이터가 과도하게 많아지면 데이터양에 압도돼서 해석을 흐리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적절한 데이터양을 판단하는 것이 우수 연구자의 자질 중에 하나라고 말씀하셨다.
5) 선생님 수업을 보고 나서 다음 수업들이 보고 싶어졌다. 오늘 다루었던 내용들이 추후에 어떻게 반복되고 연습되는지 궁금해졌다. 콘텐츠가 간결하고 명료하여서 이 양질의 콘텐츠들이 어떻게 학생의 것으로 소화되는지 알아보고 싶어졌다. 또 다른 내용의 콘텐츠가 학생들에게 다시 밀려올지 아니면 오늘 다루었던 내용들이 반복될지 알 수 없었다. 양질의 콘텐츠를 계속 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임계점을 뛰어넘어 학생에게 질적인 변화가 있을지, 아니면 학생들이 양에 압도되어 양질의 콘텐츠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또 하나의 암기 거리로 취급될지 알 수 없었다.
6) 나는 요새 균형을 잃었다. 능력 이상의 과도한 일을 하다 보니 배움을 즐기지 못하고 있다. 인풋과 아웃풋 사이의 균형이 깨졌다. 무언가를 계속 쥐어 짜내는 일만 하고 있다. 여유가 사라졌고, 건강도 잃고 있다. 읽고 사색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지적 건조함만이 남아 있다. 워라밸. 일터와 삶터, 학교와 가족, 공부와 건강 사이의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나는 수업도 이와 같다고 생각한다. 한 차시 수업에서 교사의 시간과 학생의 시간 간의 밸런스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시간이 수학적으로 균등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교사가 8이란 시간을 쓰고, 학생이 2란 시간을 써도 된다. 학생이 2란 시간 동안 교사가 제시한 콘텐츠를 제힘으로 소화하면 된다. 물론 교사가 제시한 양이 조금 넘쳐도 좋다. 그러나 과하게 넘치면 학생은 스스로 소화할 힘을 잃게 된다. 수업은 교사의 계획하게 작동한다. 교사 중심이든 학생 중심이든 그 중심에 교사가 있다. 내용을 어떻게 소화시킬 것인가? 전문성 있는 교사의 역량에 달려 있다.
7) 교사의 시간과 학생의 시간. 수업은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맛있는 음식도 그것이 소화되었을 때 맛있는 음식이 된다. 내가 그것을 소화하지 못하면 음식이 나를 공격한다.
어느 지점에 교사와 학생의 타협점이 있을까? 빈틈이 없는 교사와 허점이 많은 학생 사이에 과연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교사와 학생이 만나려면 교사는 빈틈을 만들어야 하고, 학생은 허점을 메워야 한다. 교사가 먼저 틈을 보여야 학생도 행동한다. 교사의 틈은 학생이 숨 쉬는 시간이고 학생이 활동하는 시간이다. 교사의 시간에서 학생의 시간으로 넘어간다. 교사는 그들의 배움을 관찰한다. 학생의 시간이 오롯이 학생이 활동하는 시간이 아니다. 교사는 온 힘을 다해 그들을 관찰하고 피드백한다.
내 생각 : 좀 더 욕심을 내긴 했어도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업이었지만 내게서 그 “교사의 틈”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말 래퍼처럼 내용을 쏟아부었다. 실제로 학생들 수업평가를 받아보면 “래퍼인줄”이라는 소감도 눈에 띄긴 했었다.
내게 학생들을 관찰하고 피드백하는 것은 수업시간이 아니다. 교실 밖이다. 수업시간에 피드백을 해주기에는 학생들 수준이 충격적일 정도로 다 다르고, 당장의 피드백이 학생들의 기본기에 유의미한 변화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수업은 그들에게 자극이 되고 방향 설정의 모형이 된다. 내 수업이 어렵다면 내가 구축해 놓은 내 영어컨텐츠를 활용하여 기본기를 쌓고, 수업 외 시간에 나와 상담할 것을 알린다. 영어멘토링학습코칭에 공식적으로 참여하면 그런 과정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지만, 추가 참여도 가능하고 비공식적으로 내 컨텐츠에 접근하거나 언제든 원할 경우 상담도 받을 수 있다.
수업시간은 제한적이고, 그 시간에 학생들 수준에 맞게 속사포로 다 전달해 주어도 늘 아쉬움만 남는다. 다 주고도 더 주고 싶은 마음만 남는다. 어떤 학생들은 고통스럽겠지만 그 고통이 이후의 행복을 보장한다면 난 그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 주길 바란다.
활동중심 연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두 분 앞에서 난 컨텐츠 중심, 교사중심 수업의 중요성을 주장하는 대표교사인 것처럼 수업을 시연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컨텐츠 중심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생 스스로의 역할도 배움의 과정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난 수업시간을 그저 지키고 싶은 욕심이 지배하고 있다. 학생 스스로의 역할을 교실 밖으로 밀어낸 거다. 아무런 자리도 마련하지 않고 내몰 수는 없어, 영어멘토링학습코칭을 하고, 컨텐츠를 수준별로 구성하여 접근성을 높여 두었다. 그럼에도 선택을 강요할 수는 없어 늘 좌절감을 안고 산다.
컨텐츠 중심 수업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들음의 과정에서도 일어나는 이해중심의 압축된 수업 내용이다. 그렇게 압축되고 정제된 내용이 전제가 되어야만 활동중심수업에 견주어 장단점을 따질 수 있다. 그런 컨텐츠가 덜 준비되었다면 학생활동으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수능에 초점을 둔 고등학교 영어수업에서는 학생활동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못하는 환경에 놓이게 된다.
그럼에도 고등학교에서도 배움의 공동체 등의 다양한 방식이 시도되는데, 외국어 해독의 문턱이 높고, 학생들 자신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압축된 제대로 된 학습이 이뤄질지 늘 의구심을 가졌다.
내 티칭과 코칭의 목표는 학습의 주도권을 학생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지만, 나의 계획적이고 철저한 티칭으로 자립의 내공을 갖춘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수석쌤들의 수업후기에 비추어 볼 때 나의 티칭에서 수정 보완되어야 할 부분은 발문을 통한 학생들 생각 기회의 확장이다. 완결된 수업구성으로 단계별로 실력을 조금씩 쌓아 올리는 과정에서 각 단계별 연결고리를 시행착오를 거치면서라도 스스로 찾아내도록 유도하는 일이다. 그것도 내가 구성한 티칭의 흐름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수학과 과학도 단계별 학습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해를 통한 학습이 어렵고, 다른 과목도 기본기에 해당하는 사전지식의 영향을 크게 받기는 하지만 영어는 말 그대로 외국어 아닌가?
영어는 진도교과가 아니라서 그저 유기적인 연결고리 없이 단편적인 지식의 나열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다른 과목과는 달리 영어는 어느 정도의 기본기의 문턱을 넘어서지 않고는 다음 단계의 배움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어느 정도 이상의 활동중심 수업이 가능하려면 일정 수준 이상의 언어의 지속적인 축적이 필요하다. 말하기와 쓰기라는 아웃풋이 제대로 이뤄지기 위해 몇 시간의 수업과 학습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그래서 영어활동중심수업으로는 기본기를 넘어서기 위해 지적 간극을 메우거나 사고력이나 비판적 능력 등을 향상시키는 활동으로 활용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영어를 매개로 그저 영어의 정확한 해석과 문장 이해에 초점을 맞춰야 교실 밖에서 스스로 아웃풋을 구현하며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주어질 수 있다.
그래서 특히 중학교에서 학생활동은 게임을 하거나, 색칠을 하는 등의 말 그대로 활동으로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원어민 수업을 관찰하면 그 활동중심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다. 관련 표현을 배우긴 하지만 아이들은 표현을 연습하는 게임에 몰입한다. 영어를 매개로 한 게임이고 활동이지만 학생들의 수업시간은 배움이 아닌 흥미있는 활동으로 거의 채워진다. 영어에 대한 흥미를 확장하는 기회로는 더할 나위 없지만, 몇몇 아이들은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는지 학원숙제할 기회를 엿보기도 한다.
수업 비판에 대한 변명으로 채워진 느낌이지만, 수석쌤들도 알고 있다. 내가 나의 수업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실제로 그분들께 초대 받아 3년간 매년 3시간씩 활동중심연구회에서 강의를 했는데, 2년 차 강의에서 활동중심수업에 대한 비판 섞인 이야기를 쏟아내기도 했다. 3년 차 강의에서 어느 정도의 타협점과 수업방향에 대한 고민을 제시하긴 했지만, 유쾌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다음 포스팅에서는 영어 기본기와 배움에 대한 질문으로 후기를 작성해 주신 다른 수석선생님의 수업 후기에 답변을 하며 마무리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