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하고 있다는 착각, 잘 하고 있다는 착각...
그게 더 최악이다. 잘 하고 있다는 착각은 시작조차 할 수 없다는 의미인 거니까.
성경에서 스스로 부족함이 없는 행위로 채운 바리새인들이 소위 모두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죄인들보다 은혜와 성장에서 더 멀리 있다는 역설에 갇힌 상황과 같은 느낌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야고보서 3장 1절)
갑자기 위의 말씀이 부쩍 와닿는다.
가르침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와 책임이 뒤따른다는걸, 일상 속에서 무감각하며 마비된 것처럼 잊고 있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르친다는 것, 그렇게 남들 앞에 선다는 것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이라는 것을 외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최근 몇 년 간,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강연을 통해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과 다른 학교 학생들까지 만나면서 여기저기서 헛소리를 하고 다닌 건 아닌지, 아찔함에 가슴이 떨려왔다. 얼마나 아는 척하면서 마치 내가 선한 영향력과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과 자아도취에 빠졌을 것인지...
대입보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것 같은 고입 지도를 2년간 하면서, 특히 특성화고와 일반고의 경계, 일반고 중에서도 어떤 학교가 학생에게 유리할지 고민하는 선택의 기로에선 학생과 학부모님께, 나 스스로 확신이 있어도 객관적인 사실과 정보만 제공할 뿐 책임질 수 없는 선택에 개입해서도 주관적 의견을 얘기해서는 안 된다는 걸 느끼고 있다.
법적인 책임까지 져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심각함이 아니라도, 담임교사의 역할을 과대평가하면서 학생들의 미래를 담보로 나의 주관적인 확신이 절대적인 기준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신중함과 겸허함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 거였다. 왜 내 멘토링을 안 하며 내 학습코칭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건지 답답해하는 것 자체가 교만과 착각이었고... 내 수업만 따라오면 다 해결될 것처럼 얘기하는 건 내 아집의 발현일 뿐이었다.
고등학교에서의 수업과 학습코칭 방식을 고집하면서 중3 학생들에게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서 적응해야 할 것을 미리 체험해야 한다고 합리화시키면서 나 혼자만 절실하게, 나 혼자 열정을 다 쏟으면서, 아이들의 수업시간을 나만의 욕심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준비 안 된 아이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준비된 아이들에게도 여백을 주지 않는 나의 휘몰아침이, 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나의 꼰대정신이 혹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았을지 걱정이다.
그러고 보니 매년 해오던 비공식적인 수업평가를 올해 학생들에게는 아직 받지 않았다. 내가 지금 자각하는 좌절감을 명백한 증거를 통해 현실로 마주할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은 많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말을 많이 할수록 실수할 확률도 커질 것인데.
심지어 수업이라도 교사의 여백과 공백만큼 학생이 성장할 여지를 남겨줄 수 있을 것인데, 그래서 어떻게든 말의 절제가 더 필요할 것인데...
어차피 나도 마이크 없이는 단 한 시간의 수업도 못하고, 말을 많이 하면 목이 아파오는 한계를 지니고 있으면서, 그 고통까지 학생들에게 전가한 것은 아닌지...
일단 학교 학생들에게 내 수업평가부터 받아야겠다. 내 착각에 대한 인식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이들로부터 직접 확인해야 거기서부터 나의 교만함과 아집의 균열이 생길 수 있을 것 같고 그래야 껍질을 깨고 나오는 아픔 속에서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의식은 해결의 희망이기도 하니... 용기를 갖고 솔직하게 마주하며... 학생들에게 각자의 출발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나만의 출발점을 다시 찾는다면, 거기서부터 성장과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는 소망을 품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