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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의) 남아 있는 나날들을 괜히 생각하다

by 청블리쌤

수업과 아이들을 좋아하던 유능한 후배 교사의 진로교사 합격 소식이 전해졌다.

작년에 진로교사를 고민하고 있을 때, 난 망설임 없이 국어수업을 누구보다 좋아하고, 교육특구 고등학생들을 감탄시키는 실력으로 수업에서 진심으로 아이들과 교감하는 역량은 앞으로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 끝까지 축복처럼 주어져야 한다고 말렸었다.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서 모든 열정을 다 쏟았고, 여전히 쏟을 열정이 남아 있던 후배쌤은 교육청 인사규정에 따라 고등학교 경력이 넘쳐 중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중학교 발령받고 많이 우울해했고, 2년 후에 같은 이유로 중학교에 오게 될 운명이었던 나를 플래카드 걸고 환영하겠다는 축복(?)의 말을 내게 던지기도 했다.

중학교에서도 열심을 다하고 아이들을 진심으로 만났지만, 오히려 그렇게 남들 이상의 열정으로 20년 이상 고등학교 교육에 특화되어 있었던 덕에 중학교 수업에 그 역량과 열정을 다 담아내지 못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눈높이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 우수한 교사의 역량이 아니냐고. 중학교에 와서는 중학교 수준에 맞게 가르쳐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가르칠 수 있다. 못 가르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 눈높이에 맞추는 것은 그동안 쏟아부었던 교과역량과 고등학생 소통의 축적의 경험치의 통로를 어느 정도는 막아두고 시작해야 가능하다.

영어도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고3 국어까지 하다가 중학교에서는 정작 가르칠 것이 없다는 느낌이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교육과정상 그 이상을 쏟아부으면 선행법 위반이고, 아이들의 사고력을 깊게 해주는 가르침을 베풀기에는 중학생들의 받아들일만한 추상화 능력과 이해력, 그리고 절실함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을 것이니.

상처 입은 고등학생들의 절실함을 만나면 교사는 가르치는 내용만 잘 준비해서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필요를 충족시키며 서로 행복한 시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고등학생도 기초수준이 있고,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을 위한 수업지도를 해야 하기도 하지만.. 중학교에 비할 바는 아니다.

중학교 기초학력 수업은 고객 모시는 것이 수업의 거의 전부일 정도인데 그마저도 실패할 때가 많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려 해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절실함의 부족도 있지만, 중학교 성적이 좀 나온다는 것을 자신의 공부실력으로 착각하는 교만함에다가, 사교육을 더 믿는 풍토가 더 결정적이다. 학교 선생님의 숙제나 수업보다 학원숙제가 늘 우선순위인 학생들에게 공교육교사의 진심과 열정이 먹힐 리 없다.

중학교는 가르칠 수준의 문제만이 아닌 것이다. 배움의 마음이나 태도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러면 태도를 갖출 때까지 기다려주면 되는 건 아니냐고? 그저 기다림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고, 학원에만 의지할수록 자기주도학습역량은 점점 더 묘연해지고, 중심을 잡고 고등학교에 가서 잘 할 능력을 갖추는 소수의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고등학교 가서야 중학교 선생님의 잔소리를 이해하는 학생들이 훨씬 더 많다.

처음부터 중학생들과 함께였다면 그러려니 할 것을 고등학교에서만 학생들을 만나 그들의 후회와 고통을 끝까지 지켜보고 타임슬립하듯 중학교에 와 있는 고등학교출신 중학교 신입선생님들은 그 기다림이 무슨 의미인지, 지금 학생들의 주저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모든 행동과 선택의 의미를 잘 알 것 같아서 그냥 지켜볼 수만은 없다.

물론 중학교에 특화되어 더 잘 가르칠 수 있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한 것도 부인할 수 없겠지만...

우울하게도 고등학교에서만 20년 이상 있었던 선생님들이 중학교에 오면 남아 있는 나날이 많지 않다. 그래서 노력을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은 기간 동안 20년 이상 축적된 그 능력치까지 끌어올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고 싶어 하는 교사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어야 하니 불만은 없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정말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까지는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중학교에 따라서는 칼퇴가 보장되는 저녁 있는 삶에 매료되고, 대입의 치열함에서 파생되는 내신과 수행평가의 부담과 생기부작성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깊은 만족감을 느끼며 다시 보내줘도 고등학교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분들도 있지만... 보통은 고등학교에서 쏟은 열정의 깊이만큼 더 아쉬워하시는 것 같았다.

코로나 직전까지도 보충수업, 야자 등 학교에서 교육활동에 젊음을 바쳤던 분들이니 그런 시간적 여유를 누리시는 것도 마땅해 보이긴 했다. 한때 고1들도 새벽 6시 50분까지 등교하고, 모든 학생이 9시까지 야자를 하고, 심자를 11시까지 할 때, 감독을 돌아가면서 하고, 퇴근을 미루고 학생상담을 하면서 워라밸을 유보했던 분들이 많다.

중학교 칼퇴 시간이 4시 반 안팎이니.. 퇴근하고 한참 쉬어도 고등학교 가장 이른 퇴근시간인 6시 반이 안 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한때는 야자감독하고 10시쯤 귀가하면 그냥 자기 바빴고, 주기적으로 심자감독까지 하고 12시쯤 오면 다음날 근무에도 영향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고등학교도 4시 반에 칼퇴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만감이 교차했다.

후배쌤은 중학교 첫 4년 만기 후 초빙으로 고등학교에 도전하고, 내신도 고등학교를 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령 후 내게 전화로 이제 고등학교 국어수업의 기회는 끝난 것 같다는 말을 안타깝게 전했는데... 도무지 남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시 고등학교에 가서 남은 불꽃을 살려 다 불태우기에는 남아 있는 날들이 많지 않을 것이니까.

옆의 선생님이 내게 진로쌤지원해보면 어떻겠냐고.. 경력이 너무 안 남으면 하고 싶어도 못한다고 하시면서..

난 영어수업 안 하는 교사를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지만... 쌤의 말씀 때문에 퇴직 예상일을 찾아보고야 말았다.

그동안 나이도 잘 안 계산하고, 남은 날들을 잘 안 따져봤었다.

나이로 규정하며 스스로를 제한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내 나이 되어서도가 아니라 나이와 상관없이 나이를 잊고 늘 진심을 다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꾸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상기시켜주기는 한다.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과 교직의 남아 있는 날들이 줄어든다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저 내겐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이 순간만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후배교사에게 전화로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고등학교 수업을 다시 할 보장이 있다면 보따리 싸고 말렸겠지만... 이제는 그저 마음으로 축하해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나마 그대의 열정을 발휘할 통로를 찾아 다행이라고... 후배교사는 아이들과 상담을 열심히 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눈물이 나려 했다. 진로교사가 되어서, 고작 평가 부담 없이 편하게 지낼 수 있다는 그런 소리가 아니라 상담을 많이 하겠다니... 그래서 진심으로 더 축하해 줬다.

남아 있는 나날들... 의식하지 않아도 그 끝이 자꾸 보이겠지만...

그냥 난 오늘을 산다.



<주제 외 덧붙임>

내일 저녁(이 글을 올리는 날 기준으로는 오늘 저녁) 타 지역의 영어선생님들을 뵈러 간다. 이미 3월 초에 초대를 받았고, 오랜 설렘 끝에 그날이 왔다. 날이 다가올수록 건강도 살펴야 하고, 코로나도 더 조심해야 하고, 목 상태도 체크하면서 행여 약속을 지키지 못할 일이 없도록 더 신경 써야 했다. 원고는 벌써 준비해놓고 몇 번을 수정하고 드디어 어제 최종원고를 완성했다.

선생님들께 선물처럼 드릴 여러 가지 자료와 링크들을 노션에 잘 정리해두었다. 가르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보조자료도 출력해두었다.

지하철 타고 환승하여 KTX를 타고 내려서 버스를 타는 원거리출장길이다.

보통의 나라면 여행이라는 즐거운 목적이라도 마음이 썩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체력적인 문제도 있고, 멀미도 있고, 오래 앉아 있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난 초청을 거부하지 않았다. 팀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이미 그 지역 영어 1정연수 강연을 올겨울에 했던 덕분에 낯선 길은 아닐 것이다. 그것보다는 너무 기대되고 설렜기 때문이다. 그 행복감이 그 외의 불편함들을 모두 압도했다.

나는 여행보다 수업, 그리고 열정있는 동역자들의 만남이 더 좋은 게 확실했다.

오전의 시험감독과 해당교과 시험 업무를 다 마치고 오후에 출발하여 밤늦게 돌아오는 길인데...

팀장쌤께서 시험기간일정을 고려하여 배려해 주신 덕분에 학교일정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미 여러 번 리허설처럼 강의원고를 돌려보고, PPT시연도 이미지메이킹으로 해보았음에도 더 준비해야겠다는 강박 같은 마음이 떠나질 않는다. 이렇게 다른 주제 글쓰기에 몰입하면서 잠시 부담을 잊은 것 같았다.

영어쌤들과의 만남으로 서로의 성장과 변화에 일획의 변화라도 그어질 수 있기만을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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