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길을 다녀온 강의 이후... 이미 나의 체력적 한계를 넘어선 과정으로 난 현실 직시를 하게 되었다. 몸 상태와 기분 상태에 따라서 객관화할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 도달점에 다다른 것인데... 남들 앞에서 보통은 좌절의 과정보다는 결과를 이야기하게 된다. 하이라이트 필름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그 하이라이트를 보면서 일반화 과정을 거쳐 과대평가에 이른다. 그 인정과 칭찬에 중독이 되면 멈출 수가 없다. SNS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내가 열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청중들의 반응의 반사값이었다는 것도... 마지막 순간까지 단 하나의 말도 놓치지 않으려는 한 선생님의 열정을 나의 열정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이 먼 길을, 굳이 안 해도 되는 강의를, 굳이 받아들이며, 많은 분들의 귀한 시간을 담보로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강의 중 선생님들의 마음에 담겨진 한두 가지 이야기도 있었겠지만, 3시간이라는 긴 시간을 혼자 주절거린 것에 대해서는 누가 뭐라 하지 않았어도 스스로 유감스러웠다.
난 고등학교에 오래 있어서 중학교에서 아직 적응을 잘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교직 준비 기간부터 중학교는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쇼맨십도 없고, 사교적이지도 못한 내가, 단둘이서는 그래도 대화를 이어갈 수 있지만, 세 명 이상이 모일 때는 청중모드가 되는 MBTI의 극강 I인 내가 교사로서 설 수 있는 방법은 개별상담 아니면 강의식 수업뿐이었던 것이다.
활동중심수업에 실효성을 떠나서 난 그저 강의식수업을 옹호할 수밖에 없는 절실함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있을 때도 유머감각도 드립력도 평균 이하인 난 스스로 바꿀 자신이 없어서, 어떤 수업을 해도 재미있게 들어줄 학생들을 만나고 싶었고, 그런 절실함으로 대구의 교육특구 수성구의 대구여고 학생들을 만났다.
재미있게 하려는 농담과 컨텐츠를 준비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내가 뭘 해도 나를 바라봐 주는 미어캣 같았다. 물론 수업이 마음에 안 들 때는 갑자기 돌아서는 듯한 냉정함도 있었지만, 그런 긴장감이 교사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노력하고 연구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수업 외적인 요소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수업내용만으로 아이들의 전폭적인 집중력을 얻어냈다. 나의 내성적 성격도 별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지나놓고 생각하니 그건 나보다 학생들의 지분이 훨씬 더 컸던 거였다.
얼마 전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대구여고 졸업생으로부터 청블리쌤을 아느냐는 질문을 받았고, 학교 다닐 때 나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아서 잊을 수 없다고, 같은 교회 다니시는 것 같아서 여쭤보았다는 말을 아내에게 전했다고 한다. 자기성찰 중에 또 이런 자기자랑..
누구인지 확인된 바 없지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러나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내가 가르쳐 주고 영향을 준 것보다 그 학생이 스스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로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 테니, 주인공은 애초에 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훌륭한 학생은 어떤 선생님을 통해서도 배운다. 그리고 평범한 선생님도 훌륭한 선생님처럼 느끼게 만들어 준다. 그걸 나만의 역량과 공적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한 것이었다.
어제 강연을 하면서 새삼 느꼈다. 난 소통을 하며 사교적으로 다가가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을. 선생님들과 소통하면서 유연하게 더 재미있게 진행하면 좋았을 것을, 난 또 혼자서만 재미있으려고 욕심부리는 주인공을 자처했다.
학생들도 선생님들도 내 수업이나 강의를 들으면 지쳐갈 수 있다는 걸 이렇게 뒤늦게 깨닫게 되어 유감이다.
밑천이 드러나면서 더 이상의 강의 요청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섭외 들어올 때마다 상황만 되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수락하던 나는 진짜 강의 요청이 들어와도 고사해야겠다는 겸손함을 배울 때가 된 것 같다.
강의 중에도 먼 길 강의하러 온 나보다, 이렇게 정기적으로 배움의 자리로 나오시는 선생님들이 정말 존경스럽다고 재차 말씀드렸던 것 같다. 그런 배움의 자세는 겸손함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걸 혼자 알아서 배우고 있다고 착각하며 사는 난,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귀한 손님 대하듯 맞아주시고, 세심하고 과분한 친절을 베풀어주셨다. 그분들의 겸손한 배움의 자세에 자극을 받고, 스스로 성찰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던 걸 생각하면, 연수는 나를 위한 시간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분들 중 연수 들으시며 모든 내용을 다 기록이라도 할 것처럼 열정을 보이셨던 선생님 한 분이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셨다. 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라고, 내 강의가 의미 없지는 않았다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아플 때 처방받고 복용하는 약처럼 몇 번을 읽어 보았다.
참 감사했다. 교사 수업의 훌륭함은 학생이 결정하는 거라는 또 다른 증거가 되었다.
그 선생님은 연수 받은 후기와 느낌들을 공유해 주셨다. 인터뷰하듯 질문도 해주셨다.
그중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글을 마무리하여 한다.
<영어 교사로서의 영어 공부는 어떻게?>
체계적으로 공부한 게 아니고, 공부하다 보니 체계가 잡힌 거라서.. 공부는 거창할 필요 없어요.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귀에 들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즐기시면 될 것 같아요. 책이든, 영상이든 취미처럼 하시는 거죠. 수험생모드까지 갈 필요 없어요. 기회가 되시면 고등학교에 근무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기는 해요. 영어공부에 대한 유쾌한 강제성과 동기가 생기거든요.
영어교사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잘 하도록 도와주는 코치예요. 저도 영어를 잘 못해요.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영어교사가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자격론으로 주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영어원서도 보시고.. 어제 문법책으로 소개해 드렸던 영어문법 교재도 보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중 Practical English 강추입니다.
그리고 청블리코스도 한 번 훑어보세요. 몇 배속으로 강의도 들어 보셔도 되구요. 뭘 몰라서가 아니라 어떤 내용으로 체계를 잡아서 학생들에게 전달할지 감을 잡고.. 그 이후에는 그런 틀에서 뭔가를 더해가시면 될 것 같아요.
저는 영어지식을 위한 영어는 싫더라구요. 석사과정에서 질려버려서 그때, 다시는 학생수업에 도움 되는 것 아니면 쳐다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어요. 수업과 상관없는 영어지식은 학위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도 했구요.
내가 재미있는 거면 학생들도 재미있겠다는 사명감으로 재미있는 영어를 골라서 읽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까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라 그냥 이것저것 재미있게 하다 보면 체계가 잡히게 됩니다. 나만의 컨텐츠가 축적이 되어가는 거죠. 강박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면 편안하게 메모나 기록을 병행하시면 콘텐츠 축적 시간이 더 단축되겠죠.
절대 재미를 놓치지 마세요. 교사가 행복하고 재미있어야 내가 만나는 학생도 동일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니 시간 낭비 같은 즐거움을 그저 누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