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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Sep 06. 2023

소극적 저항의 삶으로 이어지는 강연

인문학의 출발은 의문과 반항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냥 순응하는 것만으로 발전과 성장과 개혁은 약속 받을 수 없을 것이니...

난 반항에 마비된 채로 살아왔다. 장남 신드롬, 연극 증후군 등이 내게 어울리는 강박이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에서 난 늘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최책감 속에 살았다. 

물론 나의 기질도 있었을 것이다. 삼남매가 모두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인 건 아니니까.

사소한 실수나 잘못으로도 인간관계가 깨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늘 나의 자격 없음과 무가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 때도, 조건 없이 날 이해해주는 배려심 깊은 친구들 사이에서도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거나, 나의 부족함이 증명되기 전에 도망가는 것을 택하곤 했다.

그래서 내겐 반항하거나 대드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나의 기호도, 나의 의견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화를 위해서 무조건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거짓 평온함에 버티는 것뿐이었다는 것을 그때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 평온함을 깰 용기는 내게 없었다.

그저 나 혼자서 소극적인 반항을 하며 분출구를 찾을 뿐이었다.

 

교사를 꿈꾸며 난 반항하고 저항하는 그림을 그렸다. 그 구체적인 그림은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님이 그려주었다. 그러나 키팅 선생님의 이상적인 교사상을 그리면서도 현실의 높은 벽을 외면할 수 없었다. 키팅 선생님도 저항했으나 의도했던 성과를 이룰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난 또 순응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을 담보로 나의 이상을 실현하려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늘 사회개혁보다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울 것을 외쳤다. 

이런 컨셉을 “비겁함”내지는 “소심함”으로 정의할 수 있을 터였다. 

그렇다고 부당한 것을 무조건 참아내고 억울한 것을 버텼다는 건 아니다.

 

학생들을 위해서는 저항과 반항을 했다.

 

교직 경력 1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학년 부장쌤이 우리반 학생들의 잘못에 대해 화를 내시면서 아이들을 벌을 주던 일이 있었다. 여학생들이 벌을 서면서 담임인 나를 애원하듯 쳐다보고 있었다. 억울하게 벌을 서는 건 아니었지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담임이 지도하겠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일으켜세웠어야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못하고 그냥 내 자리에 돌아와서 엉엉 울었다.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 자책감과 나의 무력감이 연쇄적으로 폭발한 탓이었다. 그당시 10명의 3학년 담임 모두 남선생님들이었고, 난 나이도 한참 어리면서 가장 여린 존재로 그렇게 혼자서 울고 있었다.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있는 눈물이 아니었다. 옆 자리 선생님께서 달래주셨고, 학년부장쌤도 사태파악을 했는지 오셔서 사과까지 하셨다.

그렇다고 담임으로서의 내 무능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애초에 학생들을 잘 지도했어야 했고, 그 상황에서는 내가 나서서 아이들을 달래주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난 여러모로 정말 무능한 담임이었던 것이 확실하다.

 

그보다 몇 년 전, 여고에서 학생들이 나에게 격없이 놀러오고, 말을 편하게 하고, 영어수업시간에 단어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학생들에게 재시험을 하면서 교무실의 정숙한 분위기를 깼던 적도 있었다. 교무실 밖에 “교무실 정숙”이라는 경고문이 붙었고, 급기야 학년 부장쌤께서 내게 와서 너무 편하게 얘기하는 학생을 향해 예의 없고 시끄럽다고 하면서 과격하게 학생을 야단치셨다. 그때도 느꼈지만, 그 메시지는 학생이 아니라 내게 전해진 경고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교직 경력이 더 짧았던 그 때는 정말 아무런 저항도 못했다. 지금이면 부당업무지시로 합법적으로 따질 수 있는 근거도 있지만 그때 난 바보같이 그 부장쌤의 사적인 일도 거절하지 못하고 다 해드렸던 것 같다. 지금은 학교라면 실외에서도 담배를 필 수 없지만, 그 때는 교무실에서도 옆자리에 누가 있어도 담배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때로 학년실이 너구리굴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역시 경력이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 고등학교에서 반 학생들이 특정 과목 시험문제 출제에 대한 문제점을 내게 얘기했을 때는 정당한 절차에 따라서 교과쌤께 직접 말씀드리고, 이의 제기를 하면 된다고 하면 될 것을, 문제를 키우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과 아이들 입장에서 도움이 되고 싶다는 순진한 생각으로 교과 선생님께 질의를 했다가 뭔데 참견을 하냐는 쌍욕까지 들은 적도 있었다. 

 

이래저래 나의 저항과 반항은 거의 실패였다. 저항을 안 해서 실패였고, 하지 말아야 할 때 끼어 들어서 실패였다.

 

그런데 경력이 쌓이고 삶을 좀 더 높은 곳에서 조감하며 상황파악이 되어가고 있을 때쯤...

최근의 강연들을 돌아보니...

내 강의 키워드는 반대, 반항, 저항하는 삶이었다.

이를테면 <AI와 맞짱 뜨는 인간교사>, <사교육 이기는 공교육 효과>, <사교육 없이 대학 보내기>, <성취주의에 맞선 과정 중의 소소한 행복.. 행복할 만큼만, 어쩌다 보니>...

 

순응하는 것처럼 지내면서도 난 절대로 나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던 탓이다. 그저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고, 당장 성취를 이뤄내려 너무 애쓰지는 않았을 뿐.

 

그러고 보니 앞 선 블로그에서도 언급했지만 평소에는 순응적이었던 내가, 교사가 되기 위해 사범대에 진학하겠다는 나의 진로선택과 부부교사가 아니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은 오히려 임팩트가 강한 결정적인 순간의 저항이었다. 덕분에 난 그 선택의 결과값으로 무한 행복을 보장받았다.

나의 기호도 강요당하고, 선택장애가 있는 줄 알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서만 무심했을 뿐 난 뚜렷한 나만의 기준과 가치관이 서 있었던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고집이 없이는 그저 순응하며 받아들이기 쉽다. 난 고집을 끝까지 이어갔다. 딸들을 학원에 보내야 한다는 애정어린 선배교사들의 조언도 무시했고, 사회적 트렌드와 문화도 무시했다. 끝까지 딸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았다. 보내긴 했다. 고등힉생이 되었을 때 딸들을 베이스 기타학원과 댄스학원에 각각 보내주었으니.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의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강요를 하지 않았을 뿐 나의 가치관과 소신을 접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큰딸이 사교육없이 성균관대 공대 논술전형으로 합격한 이후, 삶으로 이어온 나의 저항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객관적인 인정과 호응으로 이어졌다. 

물론 사교육 없이 모두가 다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일반화시킬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딸의 목표는 성균관대 공대가 아니었다. 잠시 모의고사에서 그런 성적도 나왔어서 기대를 하긴 했지만... 고3 때 반 학생들과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면서 거기 합격하면 반 학생들 전체에게 뷔페를 쏘겠다고 되도 않는 내기를 할 때, 딸은 한양대 공대를 걸었었다. 당연히 될 거라고 생각 안 했기 때문에 내건 내기였는데.. 정말 한끗 차이로 내기에 질 뻔했던 것이었다.

그 과정이 의미 있던 것은 결론을 정해 놓고 억지로 몰아붙인 것이 아니라 그저 행복할 만큼만의 과정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다 누리면서, 어쩌다 보니 성취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카이나 성균관대를 갔다는 것 자체가 성공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사교육없이 공부한다면 모두 대단하다고는 하지만,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므로 이내 걱정과 조언이 쏟아진다. 큰 애가 합격했을 때 교회 집사님이 “사교육에 날린 강펀치”라는 멋진 표현을 해주셨다. 

 

나의 강연이 시작된 지점은 거기였던 것 같다. 농담처럼 큰애한테 강사비의 지분이 크다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전혀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의 소신과 나의 행복교육 방향에 힘을 실어주고 객관적인 납득이 일어나는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남들은 성공을 이야기하고, 더 존경받는 자리를 권한다. 나의 방향은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었다. 승진 등의 진로는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에 난 나만의 저항과 반대로 점철된 나의 삶을 그대로 보여드린다. 

나의 성취는 검증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이고, 학생들의 장기적 관점에서의 잠재적인 성장에 기대는 것이어서 인정받기 어려운 것이었는데...

선생님들과 학부모님들이 그 잠재적 가치와 행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신다는데 난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나의 강연이 실험적인 일회의 이벤트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역행하는 삶과 교육의 방향이 위로와 힐링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격스럽고 믿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외적인 조건이나 지위나 명예로는 증명할 수 없었던 나만의 교육철학과 방향을 설득시키고 인정받으려는 것도 아니었으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계속 침묵만 지킬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AI에 중점을 둔 이번 대구시 영어과의 연수 행사에서도, 울산 교사연구회의 연수에서도... 공통적으로 에듀테크에 초점을 맞춘 현시대의 연수에 반대되는 인간적인 이야기와 따뜻함에 대해 그래서 오히려 새롭고 울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손님을 맞이한다고 해서 없던 모습을 보이거나, 일상에서 벗어난 대접을 하는 건 내가 추구하는 바가 아니다. 그저 난 나의 모습과 나의 철학과 신앙과 교육방향으로 내 자리를 조용히 지키려 한다. 블로그나 브런치의 글도 그저 그런 솔직한 모습의 발현이기를 바란다. 나의 그런 행보가 때로는 트렌드에 역행하기도 하고, 시스템에 저항하기도 하고, 남들이 다 가는 방향이 아니어서 불편함을 줄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중이 원하는 바에 맞출 생각은 별로 없다. 내가 독자와 청중들을 선택할 수는 없지만, 그들은 나의 이야기와 글을 선택할 자유가 있으니까, 그 자유로운 선택에 기대어 난 나의 목소리를 내려고 한다.

나의 목소리는 세상을 바꾸고, 사회를 개혁하고, 교육에서의 임팩트 있는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적극적인 저항의 소리는 아닐 것이다. 용기도 충분하지 않지만, 그러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난 그저 나의 방향에 동행할 소수의 분들만으로도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한두 분의 선생님들이 뜻을 같이 하더라도 그 분들을 통해 삶이 바뀔 수많은 학생들의 세상을 함께 공유하는 기적 같은 축복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3년 넘도록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았다. 늘 마지막 강연이라는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는데... 언제 요청이 중단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어쨌거나 난 여전히 나의 삶으로 교육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기회가 된다면 마다하지 않고 서로에게 미칠 선한 영향력을 기대하며 설렘으로 기적을 이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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