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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Sep 07. 2023

체력과 집중력 할당량 넘지 않기

하루에 내게 주어진 집중력과 체력의 한계가 있다. 대부분은 학교에서 다 쓰고 집에서는 게으름을 시전한다. 그래서 늘 가족들에게는 미안하다.

칼퇴를 하게 된 중학교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예전보다 시간은 더 나지만, 세월의 흐름이 더해져 할당량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루한 걸 싫어하고, 뭐든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어렸을 때부터 프로그램이 되어서인지 재미있는 영상이라도 틀어놓고 쉰다.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드니 거의 리클라이너 자세로 앉거나, 오히려 도서에 빠져들 때는 누워서 집중하려 한다. 그러니 자세로 끌어쓰는 집중력의 덕을 볼 수도 없다.

영상을 보는 것도 의미 있는 교재연구이거나 삶을 배우고 감성을 충족시키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기운이 남아 있다면 뭐라도 생산적인 일을 갈구하게 된다.

지금은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인 것 같다.

헬스장을 등록했으나 아침에 간단한 운동과 샤워장으로만 활용하고 있고, 내게 남아 있는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하다 보니 집 밖을 나가는 활동에 엄두를 내지 못함이다. 앉아서 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글쓰기는 수동적인 자세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의미한 삶으로 통하는 문턱과도 같다.


어린 시절부터 야구, 축구, 농구를 즐겨 했던 스포츠맨 같은 성향에 비해 나의 체력은 내세울 게 못되었다. 젊은 시절에 고등학교에서 야자시간에 심화수업이 있는 날에는 공강시간에 눈을 감고 에너지절약모드(energy saving mode)로 무조건 겨울잠 자듯이 에너지를 비축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집중력의 부스터 역할을 하는 것이 카페인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과다한 카페인은 밤잠 혹은 새벽잠을 앗아가고 있음에도 그 경계에서 늘 고민하며 카페인을 연료처럼 수혈한다.

에너지가 남아 있고, 카페인 충전을 했음에도 뭔가 의미 있는 집중을 하지 않으면 학생 시절에 느꼈던 낭비에 대한 죄책감이 커진다. 그래서 카페인 충전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한다.


학교의 일상에서는 그냥 망설임 없이 카페인을 투여한다. 수업과 업무와 학생상담 등의 일을 위해 그저 디폴트값이기 때문이다. 


강연 전에는 카페인과 당을 보충 한 번에 보충하려고 최애 커피를 마시는 루틴을 정했다. 협찬을 해주면 간접광고라도 할 텐데... 시중에서 쉽게 살 수 있는 카페라떼 컵 커피라는 것만...


최근 몇년간 일상에서 내가 에너지를 끌어모으도록 하는 동력은 강연이었다. 

시험대비도 훨씬 일찍부터 시작해야 했던 난, 무슨 일이든 빨리 끝내야 직성이 풀리는 기질을 지니고 있다. 한때는 그게 강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다소 불편하다는 걸 몸으로도 체험하고 있다.

어쨌거나 강연 준비도 마감시간 상관없이 섭외된 그 순간부터 회로가 가동된다. 

이런 절박함이 에너지를 더 발휘하게 하기도 한다.

8월에는 강연이 3번 있었는데 9월에는 한 번, 그것도 확정은 아니어서 좀 허전한 느낌이 있다. 

뭔가 뚜렷한 목표에 대한 갈구가 있어야 힘이 나는 것 같기는 하다.


그래도 블로그와 카카오라는 유쾌한 강제성을 지닌 플랫폼이 나의 잔여 시간들을 의미 있게 해준다.

내게 삶의 의미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에 있다.

재미있고 감성적인 삶의 소재를 학교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것에서 블로그와 카카오로 나누는 것까지...

학생들과 독자들도 나의 눈과 귀를 통해서 세상을 보기도 하므로, 나의 삶 자체가 설렘의 연속일 수 있다.


그래서 난 소모적이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잘 할 수 없어서 에너지와 시간을 너무 많이 써야 하는 일이라는 판단이 서면 단호하게 거절하려 애쓴다. 

오히려 체력적 한계가 있고, 사교적인 약점이 있어서 내가 제일 잘할 수 있는 일만 선택해서 집중할 수밖에 없는 게 다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오래전 버스를 타고 먼 길을 가는 전교직원 친목회를 불참한다고 하니, 선배 교사 한 분이 이런 행사도 참여 못하도록 그렇게 몸이 약해서 어떻게 교사를 제대로 하겠냐고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 옆에 계시던 다른 선배 선생님이 교사 모임 안 가도 평소에 학생들을 열과 성을 다해 교육하고 있지 않냐고, 교사가 그러면 되는 거지 뭐가 문제냐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나를 대신해서 변호해 주셨다.

교직원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칭찬받은 일이 아닌 건 확실했지만, 나에 대한 변호에 대한 것도, 평소 학생들에 대한 나의 진심을 인정하고 알아봐 주신 것만으로도 큰 감동을 받았다. 그 선생님은 그 이후에도 학교의 중요한 학생지도나 상담 프로그램에 나를 지속적으로 초대해 주셨고, 학생 및 학부모 대상 강연도 맡겨주셨다. 계속 부탁만 한다고 미안해하셨지만, 그렇게 인정하고 신뢰해 주는 것 자체가 내게는 큰 의미와 힘이 되어 오히려 내가 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나처럼 한계가 뚜렷한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건 유한하다. 시간과 기회와 모든 좋은 것들 외에도 고통도 할당량이 있고, 자녀의 사춘기 등의 힘든 과정도 분명 할당량이 있다.

마감이 영감이라는 말처럼 마감시한을 의식할수록 더 집중할 수 있고,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깨달음이 삶에 더 집중하고 충실하도록 도와준다면...

유한함에 대한 아쉬움보다 그래서 매 순간의 행복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간절함에 집중할 수 있기를... 그래서 오히려 유한한 할당량에 감사하며 만족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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