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준교수의 책을 읽고
우리 학교 도서관에 가서 신간도서를 살펴보고 있으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서 선생님이 오셔서 어떤 분야의 책을 주로 보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과학 분야 빼고 다 본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보고 싶었던 책이 눈에 들어왔다.
큰딸이 대학에 셀렙 같은 교수님 수업을 이번 학기에 수강한다며, 내게 추천해 준 책이었다.
도서대출하는데 좀 민망했다. 과학 분야 빼고 다 본다고 해놓고 과학 분야 도서만 대출하다니.
그러나 책을 한참 보고 나서 알았다. 과학의 눈으로 본 인문학도서라는 걸.
과학 정보만 나열되어 있었다면, 딸의 강력한 추천이라도 책장을 다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딸의 말대로 교수님은 쉽게 설명하는 가르치는 능력이 탁월한 듯했다. 세바시영상에서도 느꼈지만, 책을 읽으면서 확실히 느꼈다. 적어도 이 책에 대해서는 물리학교수님이 쓴 책이라고 어려울 거라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과학적 사실 외에 교수님의 개인적인 시각을 담았기 때문에 모두 다 전적으로 공감되지는 않았지만, 과학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에 매료되었다.
그중 몇 가지만 인용하여 내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처음>
물리학에서는 물체의 처음위치와 처음속도를 합해 초기조건 또는 처음조건이라고 부른다.
새해 첫날 다짐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도 처음조건이 중요하다.
새해 다짐을 실천하는 첫날에 처음속도를 올리는 방법이 있다. 내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새 다짐이 있다면 하루 전인 오늘 당장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면 내일은 이미 0이 아닌 처음속도를 갖게 된다.
외부의 영향이 없을 때 현재의 운동상태를 지속하려는 경향을 물리학에서는 관성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습관을 들인다는 것은 결국 관성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달려 있다.
시작이 중요한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거창한 한 걸음이라도 “0이 아닌 처음속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작은 빠를수록 좋다. 완벽한 시작을 꿈꾸는 사람들은 꿈만 꾼다. 완벽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시작을 절대로 하지 못한다. 일단 시작하면 관성의 도움을 받는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흐름이다.
얼마 전 포스팅 한 제목
열정의 연료보다 습관의 관성을...
https://m.blog.naver.com/chungvelysam/223048065189
그래서 이 글이 너무 반가웠다. 과학적으로 검증된 습관형성의 조언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허공>
파인만은 우리는 분명히 원자들의 모임이지만, 원자들의 모임‘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원자들의 특별하고 유일한 짜임이 사랑하는 이를 만든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성분을 똑같은 비율로 모아도 인간이 될 수 없다는 글을 본적이 있다. 인간은 객관적인 구성요소의 총합 그 이상이다. 그 총합 이상에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이 포함된다. 하물며 원자의 짜임이 다르다면 약간의 차이로도 그 개체는 완전 다른 존재일 것이다.
과학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성공>
통계물리학 분야에 상전이(phase transition)라는 개념이 있다. 물이 끓어 수증기가 되듯이 물질의 특성이 급격히 변하는 것이 상전이다. 액체상이 기체상으로 바뀌는 순간은 불현듯 다가온다. 99도까지 아무 일 없이 액체로 있던 물은 100도에 도달하면 갑자기 끓기 시작한다. 우리가 99도까지 온도를 올리려 공급한 열에너지로 물의 겉모습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마지막 1도를 올려 100도에 도달한 순간 물은 끓기 시작한다.
성공의 결실은 갑자기 온다.
101번째 망치질이 돌을 깼다면, 100번의 망치질이 의미 없었다고 볼 수 없다. 우린 이런 얘기를 끊임없이 들으면서도 끝까지 기다리지 못한다. 중간 과정에서 적어도 눈에 보이는 비슷한 성과라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거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것도, 완치를 위해서 이런 기다림이 필요하다. 보통 성과는 서서히 오는 것이 아니라 진짜 어느 순간 신기하게 불현듯 온다.
이미 자연현상에서는 일관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상전이”현상... 우리 삶의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며 기다림을 견뎌야 하며, 그래서 멘토들의 확신에 찬 격려와 응원도 필요하다.
<알파고의 두 번째 학습 단계 : 강화학습(Reinforcement Learning)>
스스로 이리 해보고 저리 해보며, 인공신경망의 내부상태를 조금씩 바꾸어가며 인간이 설정한 목표에 천천히 도달하는 것이 강화학습이다.
수없이 막대를 넘어뜨리고 나서야 넘어뜨리지 않는 방법을 배운다. 사람이나 인공지능이나,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고 나서야 목표에 도달한다.
배움은 영점조정의 과정이다. 일부러 그럴 건 없지만 실패와 좌절은 배움에 포함된 디폴트 값이다.
<배움의 뇌과학>
밖에서 들어온 정보로 내 안의 무언가가 바뀌는 것이 배움이다. 몸으로 배우고 가슴으로 배운다는 말도 있지만, 배움은 하나같이 모두 우리 머릿속 뇌의 일이다. 딱딱한 머리뼈 안 말랑말랑한 뇌의 내부 배선을 뇌수술이 아닌 방법으로 바꾸는 것이 배움이다. 모든 배움은 뇌에 흔적을 남겨, 깊이 배워 깨닫고 나면 어제와 다른 사람이 된다. 배움과 깨달음은 비가역과정이다.
배움이 뇌의 내부 배선을 바꾸는 일이라는 설명에 설렜다. 우린 끊임없이 배움으로 다른 자아가 될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니. 그런 가능성을 열어둔 희망의 말이다.
비가역과정은 엔트로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원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다. 계란 프라이를 원래 날계란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교수님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의 흐름에 늘 동반하는 것이 있다. 엔트로피(entropy)다.
챗 GPT에게 물어보니 이런 대답을 했다.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한 방향성, 즉 과거에서 미래로 향하는 '시간의 화살'은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속적으로 관찰되는 엔트로피 증가 원칙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고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다.
이왕 돌이킬 수 없는 방향이라면 굳이 돌아갈 필요 없는 성장의 모습이면 된다. 배움의 과정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결국 뇌도 노화하고 종말에 이르겠지만, 아직 살아 있다면 배움은 뇌의 노화과정에 역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의식적인 노력일 것 같다.
<현재의 예측과 빅데이터>
시시각각 변하는 주변 환경의 정보를 모아서, 인간은 가까운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쉴 새 없이 예측하고, 현실의 결과와 비교해 끊임없이 수정해간다. 우리가 늘 경험하듯이 예측이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예측과 현실의 차이는 다음의 예측을 더 정교하게 할 수 있는 자양분이다. 현재의 인공신경회로망도 마찬가지의 방법을 따른다. 입력층에 넣어준 정보는 정보처리과정을 거쳐서 일종의 예측의 형태로 출력된다. 예측치와 현실의 정답의 차이를 줄이는 방향으로 학습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의 지도학습방법이다. 사람이나 인공지능이나 정확한 예측만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측하지 않으면 배울 수 없고, 배우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오류를 의식해서 예측을 망설일 이유는 없으며, 불완전한 형태나 준비의 부족에 대해서 단정적인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예측치와 현실의 정답 차이를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끊임없는 오류는 끝없는 성장과 발전의 전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꼰대>
정보 비대칭성이 큰 직업일수록, 한쪽에서 하는 이야기를 상대가 반박하거나 토 달기 어려운 직업일수록 더 좋은 직업으로 여겨진다. 대화 상대가 가만히 속으로 삭이며 내 틀린 말을 참고 들어줄 뿐인데, 내가 옳은 말을 해서 상대가 고개를 끄덕인다고 생각한다.
꼰대란 무엇인지도 물리학의 상관함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판단 기준이 형성된 시간과 공간상의 위치를 원점 (0,0)으로 정의하자. 시공간 위치가 원점으로부터 (t,x)로 떨어진 지금 이곳의 상황을 (0,0)에서 형성된 기준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이 꼰대다. 원점과 (t, x)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상관관계가 줄어든다. 엉뚱하게 판단하면서도 스스로 옳다고 믿는 중증 꼰대가 된다.
t :시간, x : 거리
꼰대 중에는 같은 분야 안에서 오래전 형성된 가치관과 판단 기준을 현재의 상황에 적용하는 시간 꼰대도 있고, 한 분야에서 가진 자신의 전문성을 다른 분야에 적용하는 공간 꼰대도 있다.
라테 꼰대인 시간 꼰대는 주변에서 훨씬 흔히 만날 수 있지만, 사실 더 위험한 것은 분야를 넘나드는 공간 꼰대다.
결국 우리 모두는 어쩔 수 없는 꼰대다.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움직이는 현재를, 바로 지금 새롭게 형성한 가치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중증 꼰대가 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다. 과거, 저곳의 기준과 현재, 이곳 사이의 상관관계를 늘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일이다. 시간이 지나 세상이 변하면 내 생각의 기준 시점을 시간축을 따라 옮기고, 널리 읽고 두루 만나서 판단 기준이 정의되는 공간을 넓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더 이상 덧붙일 수 없을 정도로 교수님의 의견에 완전 동의한다. 덜 꼰대가 되려 애쓰는 수밖에.
<평형>
줄다리기를 할 때, 양쪽의 힘이 비기면 줄은 옆으로 움직이지 않고 평형을 유지한다. 꼼짝하지 않는 줄만 쳐다보는 사람은 양쪽에서 줄을 당기는 많은 사람의 안간힘을 눈치채기 어렵다. 상황이 안정된 상태로 유지된다고 해서 노력을 멈춰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안심해서 노력을 멈추는 순간 힘의 비김이 어긋나 평형상태에서 벗어난다. 겉으로 보기에 평화로운 상황이어도 그 속사정은 다를 수 있다. 평화로운 겉모습과 달리 뒤에서는 수많은 힘이 서로 비기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은 눈에 띄지 않는 많은 이의 안간힘에 큰 빚을 지고 있다.
충돌이 있어야 평형도 있다. 얽히고설켜 토론하고 논쟁하다 보면 속도 상하지만, 그래도 일단은 서로 접촉해 만나야 합의도 평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직접 분자가 충돌하지 않아도 빛을 통해 열평형이 이뤄지듯이, 몸으로 만나지 못해도, 귀 기울여 듣고 눈 크게 떠 서로 마주 서야 하는 것은 아닐까.
평형의 상태를 당연히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로 들렸다. 안간힘과 애씀이 그 상태를 책임지고 있다면, 노력을 멈추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일방적인 몰락과 추락이 이어질 것이니...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애씀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할 것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가져야 할 감사의 마음이다.
<비움>
겨울이 다가오면 나무의 관심은 성장이 아니라 생존이 된다. 버리고 줄여서 긴 겨울을 버틴다. 여름날 무성한 나뭇잎이 자랑스러운 성장을 말한다면, 가을날 단풍과 낙엽은 나무가 내년 봄의 삶의 지속을 바라는 안간힘의 결과다. 올겨울의 버림이 없이는 다음 해의 성장도 없고, 나무는 내년의 여전한 삶의 지속을 위해 가을날 몸의 일부를 버린다. 가을날 다채로운 단풍에 감탄하며, 지속을 위해 버리는 나무의 고통을 떠올린다.
때로는 성장이 아닌 생존에 집중해야 하고, 그 생존은 비움에서 나온다는 역설은 바쁘게 무작정 한 방향으로 채우기 바쁜 상처 받는 학생들과 학부모님들에게 정말 필요한 메시지다.
내가 자주 인용하는 아래 문구와 맥락을 같이 한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백무산, <정지의 힘>
<법칙>
어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면 우리는 법을 만들지 않는다. 커다란 유조선의 공중 비행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 이유가 없다. 법이 필요한 이유는 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 따르는 법칙은 다르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길 수 없다. 손에서 가만히 놓은 물체가 땅을 향해 아래로 떨어진다는 자연법칙은 당위가 아닌 사실의 법칙이다. 내가 아무리 간절히 원해도 생각만으로 돌을 위로 띄울 수는 없다.
인간이 알아낸 당대의 자연법칙은 시간이 지나면 변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물리학자들이 찾아낸 자연의 법칙을 ‘법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경향이 눈에 띈다. 뉴턴의 중력법칙이라고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라고 하듯이 ‘이론’이라는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법칙’이라고 하면 인간의 합의로 정해진 당위의 법칙을 먼저 떠올리는 오해를 막으려면, ‘이론’이 ‘법칙’보다는 더 나은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의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과학은 예측 가능한 불변의 법칙 혹은 이론이라면, 사회과학은 확률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고전역학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다루지만, 양자역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다루고 있어, 관찰자의 한계를 넘어서기 힘들다. 전설적인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양자역학은 과학이지만 확률적인 것과 관련이 있다. 챗 GPT에게 고전역학과 대비되는 양자역학은 확률과 상관있냐고 물으니 아래와 같은 답변을 해 주었다.
네, 양자역학은 확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고전 역학에서는 특정 물체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가정합니다. 하지만 양자역학에서는 헤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라, 입자의 위치와 속도(보다 정확히는 운동량)를 동시에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양자역학은 입자의 상태를 나타내는 파동 함수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이 파동 함수를 제곱하면 해당 입자가 특정 위치에 존재할 확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자역학은 결과가 결정적이지 않고 확률적인 성질을 가집니다.
또한, 양자역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슈퍼포지션 원리도 확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원리에 따라, 입자는 여러 가능한 상태의 '결합'인 슈퍼포지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슈퍼포지션 상태에서 측정을 할 때만 특정한 결과가 나타나며, 그 결과는 확률적으로 결정됩니다.
따라서 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확률론적인 해석 방식을 사용하며, 이것이 고전 역학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성 중 하나입니다.
<말과 글>
휘발해 사라지는 말에 담긴 정보가 시간의 흐름을 버티며 오래 지속되려면, 우리 뇌 밖 외부의 저장장치가 필수다. 바로 글이 탄생한 이유다. 글은 뇌 밖에서 많은 이가 공유할 수 있는 공용 기억저장장치다.
말이 글이 되면 정보는 여러 사람에게 전달되어 말의 공간적 제한을 넘어서고, 말의 청각정보가 물리적인 실체가 있는 매체에 담겨 시각정보로 바뀌면 글은 말의 시간적 제한을 넘어선다. 글은 화석으로 고정된 말이다.
사람의 말과 글은 그 사람의 생각이 외부로 표출되는 수단이지만, 거꾸로 내가 하는 말과 내가 쓰는 글이 나의 생각을 규정할 때도 정말 많다.
과학에서도 말글과 생각은 양뱡항으로 소통한다.
교수님의 넓은 시각에 감탄했던 대목이다. 과학책에서 글쓰기의 필연성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글쓰기를 뇌 밖 외부 기억 저장장치라는 비유 아닌 사실적 묘사에 바로 수긍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은 남기기 위해서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옮겨놓은 것에서 쓰면서 자신의 생각이 규정되기도 한다. 말도 그렇지만 글은 특히 더 그렇다. 글은 지연된 시간만큼 좀 더 깊은 생각을 전제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과학도 말글과 생각이 양방향으로 소통한다고 한다면, 모든 영역에 다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 생각과 말글이 소통을 하고, 말이 글과 소통하며, 그 소통의 결과물로 타인과 소통한다. 그 과정에서도 그 결과물에서도 성장은 보장된다.
<교수님 세바시 강연>
https://youtu.be/kRZvYVOl5Vo?si=Z2Wqt1fr9WvC_o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