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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방어적 태도에 따뜻한 학생 반응

by 청블리쌤

초임 시절, 젊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성적 향상과 생활지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다소 과한 지도였음에도 눈치를 보지 않고 나만의 신념에 기대서 아이들을 대했다.

시대가 변했다.

지금은 "내 아이 기분 상해죄"라는 말이 교육현장에서 사용된다는 것만으로도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물론 무자비한 체벌이나 학생에게 상처를 주는 언사 등 감정을 앞세운 학생 교육은 나도 완전 반대다. 실제로 그런 분들은 실존했고, 많은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거다. 나도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교사는 아니었는지ㅠㅠ

나도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늘 조심하며 긴장하고 있다.

얼마 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내 블로그에 올린 자료를 소개하면서 학생들은 아무 말도 안하는데 나 혼자서 내 블로그 홍보가 아니며 블로그에 광고를 달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학생들에게 강제로 홍보해서 수익을 올리려 한다는 사소한 오해로부터 당당하기 위해 광고를 절대 달지 않았다고 미리 방어라도 하듯 선제적 변명을 구구절절 얘기했다.

그러자 학생 한 명이 이런 말을 했다.

"광고 달아도 괜찮아요. 우리는 선생님 돈 버는 거 좋아요."

순간 멍해졌다. 민원이 두려워, 사소한 일까지도 너무 위축되어 있던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 학생이 모든 학생들의 뜻을 대변한 건 아니었겠지만, 소신껏 펼치는 나의 교육활동에 대해 선제적 방어로 일일이 설명하고, 변명하는 내 비겁함에 부끄러워졌다.

한편으로 그런 학생의 마음에 너무 감동이 되기도 했다.

행여 민원이 두려워서 소신껏 수업을 진행하지 못하고, 교육활동도 축소되고 있지 않은지도 돌아 보았다.

생활지도를 할 때나, 입시나 진로상담할 때, 혹 나의 말이 책임질 요소로 돌아오지 않을까 늘 긴장하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고입이 다가오면서 학부모님 상담할 때도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다. 덕분에 내가 생각하는 방법과 방향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교만함에서 벗어날 기회는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무력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오래전 후배 선생님의 친구가 고3 담임을 하면서 입시상담을 해준 후 학생이 대학을 떨어진 책임에 대한 민원으로 재수 비용으로 매달 얼마씩 드렸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요즘 뉴스를 보면 충분히 현실적인 얘기로 다가온다.

그렇지 않아도 소심한 나는 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어차피 "내가 아니면 안 되고,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기다림의 숙명을 가진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더 확고하게 하는 느낌이다.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도, 어떤 인간관계든 서로에게 넘지 말아야 할 선 같은 것이 있다. 아무리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도 내 입장에서의 속도와 나의 소신을 강요할 수 없는 것이니.

교육은 받아들이려고 마음을 여는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변화다.

물론 당장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고, 마음을 열지 않은 학생들의 마음을 두드리는 역할도 해야 한다. 예전에는 너무 세게 두드리다가 생채기라도 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교사들이 무감각했었을지도 모른다.

교사보다 부모의 입장이라면 그 거리를 존중해 주기가 더 어렵다.

의사는 가족을 치료하지 않는 게 암묵적인 룰이다.

학교 교사도 자기 아이는 가르치지 않는 것이 서로의 정신건강에 좋다.

그만큼 가까운 거리의 관계는 객관화가 더 어렵고, 선을 지키고 거리를 유지해 주기가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게 교사 친구들의 자녀 컨설팅을 해줄 기회가 많았던 것 같다. 몰라서가 아니라 다른 의사에게 가족치료를 맡기는 것과 같았던 거였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교사들도 선택과 집중을 하며 차별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는 교육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대신 어떤 경우에도 포기는 없어야 한다.

"지금이 아닐 수도 있고, 나를 통해서만 교육이 완성되지는 않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에만 최선을 다하는 거다.

먼저 손을 내밀면서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굳이 손을 내밀지 않는 학생들을 억지로 손을 잡아 끌 수는 없는 일이다. 그 대신 언제든 손을 내밀면 잡아줄 준비는 해야 한다.

그런데 때로는 거리를 존중하고, 감정을 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교사의 뜻으로 억지로 이끌려고 조급해하지 않는 것이, 때로 무력해 보이고, 교사의 역할을 다하지 않는 소극적인 처신으로 보일 수 있으나, 교사의 역할이 최소화된 그곳에서 자발적인 학생의 변화로 채워지며 궁극적으로는 더 큰 교육적 성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최근의 이런 분위기가 아니어도 나의 오랜 교직 생활에서 체험했던 일들이다.

영어멘토링 처음 시작할 때 60여 명의 최후의 1인이 남을 때까지 신청 학생들이 하나둘씩 낙오되는 걸 지켜보면서도 무력했고, 그래서 다른 방법들을 찾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관심과 격려 이상으로 참여를 강요하거나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그저 경고가 누적되면 제외될 수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상기시키고, 더 힘을 내도록 관심을 가져주고 격려해왔고 수업시간에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절실함에 대한 잔소리를 늘어놓았지만, 억지로 학생 개개인의 동기유발을 시키거나 의욕을 가지게 할 능력이 내게 없다는 걸 너무 빨리 받아들였다.

그 이후 매년 100여 명의 학생들이 거의 이탈 없이 수료했던 것은 멘토교사인 내가 아닌 학생들 자신의 열심이었을 뿐이었다. 중학교 와서 이탈률이 높아지니 그 사실이 더 명확하게 보였다. 영어멘토링 학습코칭의 주인공은 멘토링 내가 아니라 멘티인 학생들인 거다.

교육특구 고등학교에서 150명 이상의 학생들이 신청했던 전성기 때도, 신청하지 않은 그 외의 학생들을 더 초대할 수는 있었지만, 참여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난 인원을 성적 등으로 제한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다 참여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한 명이라도 더 참여하기를 늘 원했지만, 개별적으로 다가가서 참여하기를 강권하는 데는 늘 소심했다.

딸들에게도 무엇을 준비시키고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이른 시간에 딸들이 내 학습코칭을 시작하도록 이끌어 주지 못했다.

기다리는 마음이라고 편한 건 아니었지만, 거부당할 상처가 염려되었던 것인지, 주도권을 인정하고 자발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것인지...

그래서 나의 교육의 성과는 늘 나의 노력이 아니라 학생들과 딸들의 주도적 움직임에 의한 자발적인 변화로 드러났다.

부모들에게 필요한 "다정한 무관심"과 같은 노력이 학교 교사에게도 필요할 수 있다.

물론 교사 자신의 편의를 위한 "무심한 무관심"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모든 학생들을 약속된 만남의 시간 안에 모든 영역에서 기대했던 모든 성과를 다 거둘 수는 없다. 그리고 교육의 짐은 학생들이 만나는 수많은 선생님들과 학교 친구들과 나누어서 지는 것이다.

난 이미 오래전에 나의 한계를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 더 명확해졌다. 오늘도 난 내가 정한 약속 장소에 혼자 나가서 아이들을 기다리는 느낌이다.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고, 해주고 싶은 것이 너무 많지만, 그렇게 아이들을 만나고 싶지만, 결심하고 다가오는 것은 결국 아이들의 몫이고 그들의 선택이다.

민원이 두려워서이기도 하겠지만, 그 거리와 선을 지키고 존중하면서도 아이들이 먼저 와주기를 쓸쓸히 기다리며 희망은 여전히 품고 있다. 희망을 품고 있는 것만큼 아픔과 무력감의 상처도 져야 하지만, 기다림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러다 의외로 대부분의 학생들이 날 신뢰하고 있다는 걸 확인할 때마다 난 과분한 축복 속에 감사와 감격에 잠긴다.

그래서 "선생님이 돈 버는 거 우리도 좋아요"라는 말은 "선생님이 행복하시면 우리도 좋아요"라고 격려해 주는 것 같아 정겹고, 너무 큰 힘이 되었다.

그런 힘으로 아이들을 위해, 해 주고 싶은 교육활동을 늘 고민하며 행복해할 수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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